믿음이 희망을 낳습니다

히11:1-6


새해가 밝았습니다. 묵은 해는 지나고 새해가 왔습니다. 새해를 맞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고자 하신 것은 “희망”입니다. 세상에 희망만큼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어느 대학의 심리학과에서 실험을 했다고 합니다. 두 개의 큰 통에 물을 가득 채우고 크기가 비슷한 쥐 한 마리씩을 넣었습니다. 예상대로 이들은 열심히 헤엄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두 통은 서로 달랐습니다. 하나는 뚜껑이 닫혀 있고 다른 하나는 뚜껑이 열려 있었습니다. 뚜껑이 닫혀 있는 쥐는 한참 헤엄치다 탈출구가 눈에 보이지 않자 아예 포기했습니다. 그리고 4분만에 죽었습니다. 뚜껑이 열려 있는 쥐는 뚜껑이 열려 있음을 알고 여유있게 움직여 36시간이나 헤엄을 쳤습니다. 문제는 통의 뚜껑이었습니다. 뚜껑이 열리고 닫히고의 차이가 그렇게 큰 차이인지 몰랐습니다. 그래서 연구원들이 이런 결론을 냈습니다. “살고 죽는 것은 희망에 달려 있다. 희망이 있으면 살고 희망이 없으면 죽는다”.

그렇습니다. 희망은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살기 때문에 희망이 있는 것이 아니라 희망이 있기 때문에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음식없이는 40일 밖에 살 수 없고, 물이 없이는 8일 밖에 살 수 없고, 공기가 없이는 4분 밖에 살 수 없지만, 희망없이는 단 몇 초도 살지 못한다”. 이렇게 희망이 중요합니다.

작년 가을, 하나님이 새해 우리 교회가 나갈 방향을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얼마동안 낑낑대며 기도하는 데 어느 새벽에 저에게 한 단어가 전광석화처럼 떠올랐습니다. 희망이었습니다. 작년 한 해 우리에게는 희망이 없는 한 해였습니다. 세월호로 인해 온 국민이 좌절에 빠지고 경제란, 남북관계의 경색등으로 힘들게 살았습니다. 한국교회도 이런 저런 실수로 비난을 받아 자신감을 잃었습니다. 이 상황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주시기 원하실까? “희망”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희망을 주시기 원하셨습니다. 문제는 이 희망이 어디서 오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하다가 어느날 롬15:13을 읽었습니다.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여기에 “소망의 하나님”이 번뜩 눈에 띄였습니다.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모든 좋은 것은 소망의 하나님으로부터 옵니다. 소망의 하나님이 우리에게 모든 기쁨과 평강을 주십니다. 그런데 그것은 그냥 오는 것이 아니라 “믿음안에서” 옵니다. “믿음안에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사”. 믿음이 희망을 낳고 믿음이 희망을 충만케 합니다.

오늘 말씀 히11:1을 보시겠습니까?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오늘 말씀은 희망이 어디에서 오는지를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히11장은 크게 두 부분으로 되어 있습니다. 1-3절은 믿음이 무엇인가를 말합니다. 4-40절은 믿음으로 살았던 사람들이 누구인가를 말합니다. 여기서 실명으로 10명이 나옵니다. 그리고 익명으로 많은 사람들이 나옵니다. 1-3절에 나오는 믿음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믿음은 바라는 것의 실상”이고 또 하나는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의 실상이요”. 믿음은 먼저 바라는 것으로부터 출발합니다. 믿음의 본질은 바라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희망은 믿음안에 있었습니다. 믿으니까 바라는 것입니다. 저희 부모님은 어릴 때부터 저를 많이 믿었습니다. “공부잘하고”, “착하고”, 그래서 희망을 가졌습니다. “윤재는 커서 무엇인가 할거야”. 목사가 되리라고는 생각하지는 않았습니다. 일반 대학에 가서 법조인이 될 것으로 기대했습니다. 제가 부모가 기대한 것만큼 된 것은 아니지만 부모의 기대가 저를 여기까지 인도한 것은 사실입니다. 부모는 저를 믿었고 믿기 때문에 바라셨습니다.

믿음은 또한 보이지 않은 세계에 대한 관심입니다. 1절,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보이는 세계만 본다면 어떻게 믿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믿음은 보이지 않는 세계를 미리 보는 것입니다. 누가 천국을 가 보았습니까? 천국에 가면 돌아올 수도 없습니다. 누가 영생을 보았습니까? 못 보았지만 영생이 있음을 믿습니다. 믿음의 세계는 본질적으로 미지의 세계며 미래의 세계입니다. 믿음은 곧 보이지 않는 미래의 세계에 미리 가 있는 것입니다. 결국 믿음이 곧 희망입니다.

여러분에게도 믿음이 있습니까? 보이는 환경에서 희망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은 믿음에서 희망이 생기는 것을 믿습니까? 희망의 근원은 믿음입니다. 요14:1을 기억하십니까?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마음의 근심으로부터 자유를 얻는 방법은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으면 모든 문제가 풀립니다.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하나님 믿는 것이 희망의 시작입니다. 그러면 어떤 믿음을 가져야 합니까? 그것이 오늘 말씀 6절입니다. 히11:6,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찌니라”. 크게 세 가지 믿음이 필요합니다. 하나는 하나님은 살아 계신다는 믿음, 두 번째는 하나님은 그를 찾는 자에게 상주신다는 믿음, 그리고 세 번째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겠다는 믿음, 이 믿음이 희망을 낳습니다. 새해 벽두에 희망의 하나님이 믿음안에서 여러분에게 기쁨과 평강을 주며 성령의 능력안에서 희망으로 넘치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살아 계십니다.
희망을 낳는 첫 번째 믿음은 하나님은 살아계신다는 믿음입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도 하나님은 살아 계신다는 것을 믿습니까? 이 질문이 왜 중요합니까? 이 질문이 모든 믿음과 희망의 출발이기 때문입니다. 몇 년전 모 기독교 신문에서 기독교인들을 상대로 그런 조사를 했습니다. “당신은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는 것을 믿습니까?” 그랬더니 “하나님은 확실히 살아계신다”고 믿는 사람이 64.2%, “살아 계신 것 같은 데 확신할 수는 없다”가 28.9%, 그리고 “잘 모르겠다”가 14.5% 였습니다. 놀라운 것은 40% 가까운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이 살아 계신지 잘 모르겠다. 있는 것 같은 데 확신할 수 없다”라고 대답했다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하나님은 살아 계신다고 믿습니까?

성경은 먼저 자연을 통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증거합니다. 3절입니다. 히11:3,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하나님의 존재를 우선 가장 쉽게 아는 방법이 자연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연은 우리 눈에 가장 잘 띄기 때문입니다. 작년 여름에 교회학교 어린이들이 시골로 수양회를 다녀왔습니다. 제가 물었습니다. “산에서 무엇을 보았니?” “별을 보았어요. 밀가루같이 많은 별들을 보았어요”. 그러나 우리 아이들이 보았던 별은 아마도 우주안에 있는 수많은 별들중에 지극히 작은 부분을 보았을 것입니다. 우리가 팔을 벌려 동전 100원짜리를 쳐들면 그 순간 하늘에 떠있는 별 1,500만개가 우리 눈에 가려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가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은하계는 지구에서 약 2백만 광년 떨어진 안드로메다 성운입니다. 빛이 200만년 달려야 도달할 있는 은하계가 안드로메다 은하계인데 그 은하계가 이 우주에 1천억 개 이상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 이 우주는 얼마나 넓습니까? 그 넓은 우주를 하나님은 손가락하나로 지으셨습니다. 시8:3,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의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하나님은 자연속에 살아 계십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신 또 하나의 증거는 역사입니다. 제가 작년에 독일통일세미나를 참석하기 위해 독일을 갔습니다. 동서독은 분단된지 45년인 만인 1989년11월에 통일되었습니다. 저는 독일 가기 전에 독일 통일은 어떻게 될만하니까 되었겠지 막연하게 생각하고 갔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습니다. 독일 통일은 기적이었습니다. 우선 독일을 둘러싼 모든 나라가 통일을 반대했습니다. 영국, 프랑스, 미국, 다 반대했습니다. 반대한 이유는 물론 달랐습니다. 무엇보다 동독은 소련의 지배하에 있었습니다. 적어도 소련이 물리력을 동원하면 통일은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그때 나타난 사람이 고르바쵸프입니다. 그가 1985년에 공산당 서기장이 되었습니다. 동서독 분단의 최정점에 서기장이 된 것입니다. 그때는 이미 동서독 통일 분위기가 고조되어 있었고 라이프니찌 교회에서 몇 년씩 통일 기도회가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그때 고르바쵸프의 행동이 중요했습니다. 그런데 고르바쵸프는 때맞춰 일어난 동구권의 개혁운동을 소련군 탱크가 진압하지 않도록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 전에 베이징에서는 민주화운동을 탱크로 진압했던 중국 공산당과는 대조적이었습니다.

소련이 할 수 있는 것은 무력인데 무력을 포기하는 일은 누가 시켜서 한 일이 아닙니다. 소련이 스스로 한 일입니다.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질 때도 아무런 진압이 없었습니다. 공산국가로서는 경이로운 일입니다. 누가 시킨 일입니까? 누가 역사를 움직입니까? 독일 통일이 필요할 때 고르바쵸프를 세운 분은 누구입니까? 그래서 통일은 대박이기 전에 신비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평화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통일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을 믿습니까?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면 무엇이 문제입니까? 루터가 종교개혁하다가 실망했습니다. 모든 일이 마음대로 안됩니다. 그래서 낙심해서 누었습니다. 어느날 보니까 아내 카타리나가 상복을 입고 앉아 있습니다. 루터가 깜짝 놀라 물었습니다. “아니, 누가 죽었나요?” 카타리나가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죽었어요”. 루터가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죽다니. 무슨 소리야? 하나님이 왜 죽어?” 부인이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죽지 않았다면 당신은 왜 그렇게 실망할 수 있어요?” 그때 루터가 자리에서 일어났답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시는데 무엇을 두려워 하겠는가? 하나님이 살아계시는 데 내가 무엇을 낙심하겠는가?

어떤 큰 교회 목사님이 병들어 병원에 입원했습니다. 그는 평생 고생해서 교회를 개척하고 큰 교회로 부흥시켰으나 병들어 죽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울면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제가 죽으면 이 교회는 어떻게 됩니까? 모두 뿔뿔히 흩어져 교회도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답니다. “네가 죽는 것이 문제냐? 내가 죽는 것이 문제지”. 그렇습니다. 내가 죽는다고 세상이 달라집니까? 그러나 하나님이 죽는다면 큰 문제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죽습니까? 하나님은 죽는 분이 아니잖아요? 다시 히11;6, “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찌니라”. 그는 반드시 살아 계십니다. 하나님은 죽지 않습니다. 영원토록 살아 산자와 죽은 자를 다스립니다. 자연과 역사와 세상을 다스리십니다. 하나님은 살아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희망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찾는 자에게 상주십니다.
우리가 가져야 할 두 번째 믿음은 하나님은 그를 찾는 자에게 반드시 상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살아 계시기만 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문제도 알고 계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면 언제라도 우리에게 보상을 주십니다. 히11장에는 그렇게 살았던 사람 10명이 등장합니다. 아벨로부터 기생 라합까지 입니다. 이들의 삶을 보면 공통점이 있습니다. 이들이 모두 믿음으로 살았다는 것과 믿음으로 산 이들을 하나님이 복주셨다는 공통점입니다. 자. 4절, 아벨이 믿음으로 살았습니다. 가인은 준비되지 않은 곡식으로 하나님께 예배했지만 아벨은 준비된 제물로 하나님을 예배했습니다. 아벨의 믿음은 예배로 나타났습니다. 믿음의 예배는 정성과 희생으로 드립니다. 구약의 예배는 동물을 죽여 희생제사로 드렸습니다. 아벨이 그렇게 예배했습니다. 믿음은 예배로 표현되고 고백됩니다. 여러분도 올 한 해 예배로 믿음을 고백하겠습니까? 그렇게 예배드렸을 때 어떤 상급을 받았나요? 4절, 아벨을 “의로운 자”라 부르셨습니다. 믿음의 예배는 우리를 의로운 자로 만듭니다. 5절, 에녹은 어떻습니까? 에녹의 믿음은 천국에 대한 믿음이었습니다.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니다”. “죽은 후에는 반드시 천국이 있다“. 이 믿음이 에녹으로 하여금 천국에 올라가는 상급을 받게 했습니다. C.S.루이스가 말했습니다. “지상에서 발자취를 남긴 사람들은 모두 천국을 목표했던 사람들이다. 천국을 목표삼으면 지상도 얻게 되지만 지상을 목표삼으면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 올 한 해 에녹처럼 지상보다 천국을 더 목표하며 살겠습니까? 천국을 목표하고 살면 천국과 지상을 같이 얻습니다.

7절에 노아가 나옵니다. 노아는 어떻게 살았습니까? 믿음으로 방주를 예비했습니다. 믿음으로 사는 삶은 언제나 말씀을 따라 사는 삶입니다. 노아는 어느날 배를 만들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배를 만들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햇빛은 쨍쨍 내려쪼이고 비는 올 기미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노아는 순종해서 배를 만듭니다. 그 결과 어떤 상급을 받았습니까? 다 죽었는 데 노아 8식구만 살았습니다. 이것을 성경은 “의의 상속자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믿음으로 순종했더니 의로운 상속자가 되어 땅에 살아 남은 것입니다. 올 한 해도 말씀대로 순종하여 살겠습니까?

그 후에도 몇 명이 더 있습니다. 아브라함, 사라, 야곱, 모세, 라합, 이들이 믿음으로 살았던 방식은 서로 달랐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산 사람에게 하나님이 상급주신 것은 맞습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살았습니다. 오늘날까지도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 세계 3대 종교의 조상이라는 명예를 받았습니다. 사라가 믿음으로 살았습니다. 그 다음 해 아들 이삭을 상급으로 받았습니다. 모세가 믿음으로 살았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하는 구원자의 상급을 받았습니다. 라합이 믿음으로 살았습니다. 여호수아가 여리고를 정복할 때 모든 식구가 다 살았습니다. 하나님은 믿음으로 사는 자에게 상급을 주십니다. 믿음의 삶은 헛되지 않습니다. 심지어 33절 이하에 이름없이 죽은 수많은 사람들이 나옵니다. 이들에게도 예외없는 약속과 상급이 주어졌습니다. 어떤 사람은 희생당했지만 순교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40절에 결론입니다. 히11:40,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으니”. 언제나 더 좋은 것은 예비하신 하나님, 믿음에는 반드시 대가가 있습니다.

어떻습니까? 믿음은 공짜가 아니라는 것을 아십니까? 오늘 믿음으로 살면 내일 보상받고, 오늘 고생하고 살면 내일 축복받고, 오늘 기도하고 살면 내일 응답받고, 오늘 손가락질 받고 살면 내일 존경받고 살 것을 믿습니까? 희망은 여기에 있습니다. 믿음의 삶은 공짜가 아니기 때문에 희망이 있습니다. 반드시 상급이 있습니다.

독일의 신학자로 위르겐 몰트만이라는 분이 있습니다. 이 분이 1964년에 쓴 고전적인 책이 있습니다. 제목이 “희망의 신학”입니다(사진). 이 책은 우리가 믿는 기독교 신앙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희망이라는 것을 밝힌 책입니다. 이 책에 있는 몇 구절을 소개합니다. 묵상할만한 내용들입니다. “믿는다는 것은 실로 한계선을 넘어간다는 것, 그것을 초월한다는 것, 탈출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믿음이란 현재에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한계선을 넘고, 그것을 초월하고, 그것으로부터 탈출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믿음의 본질은 현재가 아니라 미래라는 말입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이렇습니다. “믿는다는 것은 미리 취한 희망 가운데서 십자가에 달린 자의 부활로 말미암아 무너진 그 한계선을 넘어간다는 것을 뜻한다”. 믿음은 현재의 한계선을 뛰어넘는 것이지만 혼자 뛰어넘는 것이 아니고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뛰어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부활은 이미 죽음을 뛰어 넘어 영원한 미래로 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과 함께 부활의 세계로 가 있기 때문에 그 자체로 희망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현재는 육으로 현재를 살아도 우리의 미래는 영은 미래에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희망입니다.

한 마디 더 있습니다. “믿음이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되심을 아는 것이라면 희망은 그분과 함께 사는 것이다. 믿음이 우리에게 영생이 주어졌음을 아는 것이라면 희망은 우리가 영생을 누리며 사는 것이다. 따라서 믿음은 희망을 세우고 희망은 믿음을 키운다”. 어떻습니까? 명확하지 않습니까? “믿음은 희망을 세우고 희망은 믿음을 키운다”. “믿음으로 살면 반드시 희망이 있다. 그 이유는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기 때문이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이미 죽음을 이기고 현재의 한계선을 뛰어 넘었다. 우리가 믿음으로 살면 반드시 하나님이 상주신다”. 그 믿음으로 사시기 바랍니다.

나는 하나님을 기쁘게 하며 살겠습니다.
우리가 믿을 세 번째는 “나는 반드시 하나님을 기쁘게 하며 살겠습니다“ 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을 중심한 삶입니다. 그럴 수 밖에 없습니다. 가량 방안에 T.V있다고 합시다. “T.V야, 너는 네가 존재하는 이유를 알고 있니?” T.V가 말합니다. “잘 모르겠어. 왜 내가 방에 있는지”. 그런데 그것을 가지고 삼성전자에 갔습니다. 그리고 묻습니다. “당신들이 이 T.V 만든 것이 맞습니까? ”예, 맞습니다“. ”당신들이 만든 이 T.V가 왜 존재하는지 그 이유를 말해주겠어요?“ 그때 삼성전자 직원들이 말합니다. ”T.V요? 사람들을 즐겁게 하기 위해서 만들었죠. 그런데 그것을 T.V에게 물어보면 어떻게 알겠습니까? 만든 사람에게 물어보셔야지. T.V는 사람들을 기쁘게 할려고 우리가 만들었지요“. 여기서 나오는 중요한 진리가 있습니다. ”발병자만 발명품을 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피조물이 어떻게 자기 존재이유를 알겠어요? 만든 사람이 알지 않겠어요? 잠16:4입니다. “여호아께서 온갖 것을 그 씌움에 적당하게 지으셨나니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느니라”. 이 말씀을 영어 성경으로 보면 이렇습니다. “The Lord has made everything for its own purpose”. 주께서 모든 것을 그 자신의 목적에 맞게 지으시고“. 그렇습니다.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이 그 목적에 맞게 지으셨습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모두 그 분의 목적에 맞게 살도록 지음받았습니다. 희망은 어디서 옵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지으신 목적에 맞게 살 때 옵니다. 히11:6,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하나니”. 믿음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지으신 목적입니다.

그래서 러셀 컬퍼라는 사람이 “당신이 당신이 된 것은”라는 시를 썻습니다.

당신이 당신이 된 것은 이유가 있지요.
당신은 하나님의 신묘막측한 계획의 한 부분이에요.
당신은 소중하고 완벽하고 독특하게 만들어졌으며
하나님은 당신을 그분의 특별한 여자와 남자로 부르고 있죠.

존재의 이유를 추구하는 당신
그러나 실수하지 않으시는 하나님
어머니의 자궁 안에서부터 손수 당신을 지으신 그분,
그러기에 당신은 그분이 원하는 바로 그 사람이지요.

당신의 부모님도 그분이 선택했어요.
지금 당신이 어떻게 느끼든
하나님의 빈틈없는 계획대로 그들을 선택하사
그들의 손에 주님의 확인 도장을 찍어주신 것이죠.

물론 당신이 당한 고통 견디기 쉽지 않았겠지만
하나님 역시 당신이 마음 상했을 때 눈물 흘리셨어요
하지만 그것을 통해 당신의 마음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닮아가고 성장하길 원하셨죠

당신이 당신이 된 것은 이유가 있지요.
주님의 지팡이로 지어진 당신
당신이 사랑받는 당신이 된 이유는
하나님이 만드셨기 때문이죠

어떻습니까? 여러분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살겠습니까? 희망은 거기서 옵니다. 저는 이렇게 하나님을 기쁘게 하겠다며 끝까지 희망을 잃지 않고 산 사람중에 강영우 박사를 기억합니다(사진). 그는 일생 믿음으로 산 사람이었습니다. 중학교 2학년때 축구하다 실명한 후 맹아원에서 아내를 만나고, 그 후에 미국에 가서 한국인 최초의 맹인 교육학 박사가 되고 백악관 국가 장애인위원회 차관보로 일하게 된 것은 믿음이 아니면 있을 수 없는 일생이었습니다. 그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희망이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암에 걸렸습니다. 사람들은 그가 미국에서 최고의 의료진에서 치료받고 낫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뜻밖에 그는 치료를 포기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최근 여러번 병원에서 검사와 수술, 치료를 받았으나 앞으로 저에게 허락된 시간이 길지 않다는 것이 의료진들의 의견입니다. 여러분들이 저로 인해 슬퍼하시거나 안타까워하지 않으셨으면 하는 것이 저의 작은 바람입니다. 아시다시피, 저는 누구보다 행복하고 축복받은 삶을 살아오지 않았습니까? 끝까지 하나님의 축복으로 이렇게 하나둘 주변을 정리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작별 인사할 시간도 허락받았습니다. 한분 한분 찾아 뵙고 인사드려야 하지만, 그렇게 못하는 점, 너그러운 마음으로 이해해주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으로 인해 저의 삶이 더욱 사랑으로 충만하였고 은혜로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가 마지막까지 붙잡았던 것은 믿음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믿었고 그 믿음 때문에 희망을 가졌습니다. 그가 믿었기 때문에 가진 최고의 희망은 천국의 희망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수술을 포기하고 하나님 나라를 택했습니다. 그가 우리에게 남긴 최고의 교훈은 이것입니다. “믿는 자는 희망을 가진 자다. 그리고 최고의 희망은 하나님 자신이다”. 그래서 그가 남긴 마지막 책이 “내 눈엔 희망만 보였다”입니다(사진).

어떻습니까? 새 해 첫 주일, 여러분도 믿으면 희망이 있다는 것을 믿습니까? 믿음은 희망을 낳으며 희망은 또한 믿음을 지킨다는 것을 믿습니까?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믿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에게 상주심을 믿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면 반드시 하나님의 축복이 있다는 사실을 믿습니까? 바로 여러분이 믿기 때문에 여러분에게 희망이 있다는 것을 아십니까? 올 한 해 우리에게 주신 말씀으로 마치겠습니다. 롬15:13,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케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히11:1-6 2015.1.4(일)
믿음이 희망을 낳습니다
“음식없이는 40일 밖에 살 수 없고, 물이 없이는 8일 밖에 살 수 없고, 공기가 없이는 4분 밖에 살 수 없지만, 희망없이는 단 몇 초도 살지 못한다”.

롬15:13,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히11: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요14:1,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히11:6,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찌니라”.

하나님은 살아 계십니다.
히11:3,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네가 죽는 것이 문제냐? 내가 죽는 것이 문제지”.

히11;6, “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찌니라”.

하나님은 그를 찾는 자에게 상주십니다.

C.S.루이스, “지상에서 발자취를 남긴 사람들은 모두 천국을 목표했던 사람들이다. 천국을 목표삼으면 지상도 얻게 되지만 지상을 목표삼으면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

히11:40,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으니”.

위르겐 몰트만, “희망의 신학”(사진).
“믿는다는 것은 실로 한계선을 넘어간다는 것, 그것을 초월한다는 것, 탈출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믿는다는 것은 미리 취한 희망 가운데서 십자가에 달린 자의 부활로 말미암아 무너진 그 한계선을 넘어간다는 것을 뜻한다”.

“믿음이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되심을 아는 것이라면 희망은 그분과 함께 사는 것이다. 믿음이 우리에게 영생이 주어졌음을 아는 것이라면 희망은 우리가 영생을 누리며 사는 것이다. 따라서 믿음은 희망을 세우고 희망은 믿음을 키운다”.

나는 하나님을 기쁘게 하며 살겠습니다.

”발병자만 발명품을 안다“

잠16:4, “여호아께서 온갖 것을 그 씌움에 적당하게 지으셨나니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느니라”.

러셀 컬퍼, “당신이 당신이 된 것은”
당신이 당신이 된 것은 이유가 있지요.
당신은 하나님의 신묘막측한 계획의 한 부분이에요.
당신은 소중하고 완벽하고 독특하게 만들어졌으며
하나님은 당신을 그분의 특별한 여자와 남자로 부르고 있죠.

존재의 이유를 추구하는 당신
그러나 실수하지 않으시는 하나님
어머니의 자궁 안에서부터 손수 당신을 지으신 그분,
그러기에 당신은 그분이 원하는 바로 그 사람이지요.

당신의 부모님도 그분이 선택했어요.
지금 당신이 어떻게 느끼든
하나님의 빈틈없는 계획대로 그들을 선택하사
그들의 손에 주님의 확인 도장을 찍어주신 것이죠.

물론 당신이 당한 고통 견디기 쉽지 않았겠지만
하나님 역시 당신이 마음 상했을 때 눈물 흘리셨어요
하지만 그것을 통해 당신의 마음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닮아가고 성장하길 원하셨죠

당신이 당신이 된 것은 이유가 있지요.
주님의 지팡이로 지어진 당신
당신이 사랑받는 당신이 된 이유는
하나님이 만드셨기 때문이죠

강영우 박사(사진).

“내 눈엔 희망만 보였다”(사진).

롬15:13,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케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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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님, 큰 나무되게 하소서


히11:24-27 
성령님, 큰 나무되게 하소서

오늘은 교회력으로 맥추절이라 합니다. 맥추절은 옛날 구약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이 보리를 추수하여 하나님께 바친 절기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왜 이 절기가 우리에게 중요할까요? 보리는 해마다 이스라엘에서 거둔 첫 번째 곡식이었습니다. 이스라엘 곡식은 밀과 보리가 있지만 그중에 보리는 아무데서나 잘 자랍니다. 우리처럼 좋은 들이 있는 것이 아니라 대부분 돌작밭이거나 산 등성이의 비탈진 테라스가 전부인 이스라엘 땅에서는 밀보다 보리가 잘 자랍니다. 보리는 생활력도 강하고 소화도 잘 됩니다. 이 보리가 긴 겨울이 지나면 가장 먼저 익습니다(장재일, 245). 그러면 그 보리를 수확합니다. 보리를 수확하는 장면입니다.(Food, 24). 그리고 그것을 볶아서 13번 체로 곱게 걸러 가루를 만든후 떡을 만듭니다. 그것을 제사장이 하나님께 드립니다(장재일, 247). 이것을 “소제”라고 불렀습니다. 언제나 첫 번째가 중요하지 않습니까? 겨우내 곡식이 없다가 뜨거운 햇빛에 익은 보리를 수확했으니 얼마나 감사하겠습니까?
 
뿐만 아닙니다. 맥추절을 또한 초실절이라고도 불렀는 데 그 이유는 보리와 함께 난 첫 열매들을 하나님께 바쳤기 때문입니다. 포도, 무화과, 석류, 감람열매, 그 땅에서 처음 익은 곡식들은 모두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었습니다. 지역마다 먼저 익고 늦게 익은 지역이 있기 때문에 유월절부터 49일동안 자유롭게 수확해서 하나님께 바쳤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첫 열매를 하나님께 바치지 않습니다. 아예 우리는 농경사회에 살지 않습니다. 도시에 삽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이 절기를 지키는 것입니까? 먹는 열매만 열매가 아닙니다. 우리 모두 모두 나무를 심고 열매를 거두는 농부와 같습니다. 우리 자신이 곧 열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이 땅에 보내신 것은 열매를 바라셨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의 열매를 바라시며”. 예수님이 우리를 부르신 목적도 열매맺는 것입니다. 요15:16,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려 함이라”. “열매를 맺으라. 그나마 항상 열매맺으라”.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열매맺습니까? 그나마 항상 열매맺고 있습니까? 맥추절, 초실절에 우리가 질문할 것이 이것입니다. “우리는 열매맺고 있는가?” 그 중에서 가장 좋은 열매가 우리 자녀입니다. 그래서 오늘의 주제는 이것입니다. 나는 지금 열매맺고 있는가? 그리고 우리 자녀들은 지금 열매맺고 있는가? 열매맺기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우리가 이 이야기를 할 때 모델이 있어야 합니다. 오늘의 모델이 모세입니다.
 
신구약을 통해서 모세는 가장 큰 나무중의 하나입니다. 400년 동안이나 노예상태로 있던 이스라엘을 해방했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위대한 민족지도자요, 애국자였습니다. 또한 기도의 사람이요 영적 지도자였습니다. 그만한 인물이 이스라엘에 없었습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의 자녀도 모세같은 인물이 되게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 말에 사람을 표현할 때 나무로 비유합니다. 큰 나무, 재목, 동량, 대들보, 거목등이 그것입니다. 성경도 마찬가지입니다. 시편에서만 봐도 시1편, 시냇가에 심은 나무, 시52편, 감람나무, 시80편, 포도나무. 백향목, 시92편, 종려나무, 다 사람을 표현한 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큰 나무, 많은 열매를 기대합니다. 우리는 어떻게 그렇게 될까요? 큰 나무가 되려면 세 가지 과정이 필요합니다. 뿌리, 성장, 그리고 열매입니다.
 
믿음의 뿌리를 내려야 합니다.
큰 나무가 되는 첫 번째 과정은 뿌리내리기입니다. 뿌리없는 나무는 자랄 수 없습니다. 그나마 물가에 깊히 뿌리를 내려야 큰 나무로 자랄 수 있습니다. 자, 모세를 봅시다. 모세가 큰 나무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우선 그의 부모때문이었습니다. 그의 부모는 레위인이었습니다. 출2:1절입니다. “레위족속 중 한 사람이 가서 레위 여자에게 장가들었더니.” 2절입니다. “그 여자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아 그 준수함을 보고 그들 석달을 숨겼더니.” 모세의 아버지는 “아므람”이었습니다. 그 뜻은 “찬양을 드립니다”라는 뜻입니다. 어머니는 “요게벳”입니다. 뜻은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소서” 라는 뜻입니다. 둘 다 다 믿음의 사람입니다. 아버지는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며 살았고”, 어머니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살았습니다”. 이것이 모세가 큰 나무가 된 첫 번째 뿌리입니다. 성경은 모세의 부모에 대하여 아무 것도 말하지 않습니다. 다만 한 가지만 말합니다. “그들은 믿음의 사람이었다“.좋은 부모는 언제나 좋은 자녀를 낳습니다. 자녀의 문제는 곧 부모의 문제입니다.
 
”삶으로 가르치는 것만 남는다“는 책이 있습니다. 수원중앙침례교회 김장환 목사님의 아들 김요셉 목사의 책입니다. 이 책에 그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김요셉목사가 어릴 때 미국에 혼자 남아 공부하고 있었답니다. 미국 유학생이 가장 외로운 때는 감사절, 성탄절 휴가때입니다. 미국 사람은 모두 휴가 떠나고 한국학생은 대부분 한국나갑니다. 그런데 한국 못가고 집에 있으면 그렇게 외로울 수 없습니다. 그런데 성탄절 전날 , 자기 한국에 있는 아버지, 어머니가 아들에게 왔습니다. 성탄절이 얼마나 목회자에게 바쁘고 중요한 때입니까? 목회자가 성탄절에 교회 비우고 미국가자 신자들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니 어떻게 목사님이 성탄절에 교회를 떠날 수 있나요?“ 그때 목사님이 말했답니다. ”교회가 잘못되면 다른 목회자가 대신 할 수 있지만 아들이 잘못되면 아무도 책임지지 않습니다“. 김요셉 목사는 그때 부모님이 보여준 것은 삶으로 보여준 사랑이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삶으로 보여준 사랑만 자녀에게 남는다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부모는 자녀의 뿌리입니다. 하나님을 믿음의 땅에 뿌리내리게 하는 사람입니다.
 
모세의 부모는 보여준 또 하나의 사랑이 있습니다. 23절입니다. 히11:23, “믿음으로 모세가 태어났을 때 그 부모가 아름다운 아이임을 보고”. 출애굽기에는 이 말을 “준수하다”라는 말을 썻습니다. “아름답다, 준수하다”는 말은 히브리어로 “토브”입니다. 이 말은 보통은 “좋다”는 말입니다. 이스라엘 사람이 평소에 가장 많이 쓰는 말이 세 마디입니다. “샬롬”, 평안의 인사입니다. “바룩 하쉠 아도나이“. 하나님을 축복합니다. 기도입니다. ”토브“, ”좋다“는 말입니다. 그냥 좋다는 것이 아니라 이지만 기대하면서 좋다는 말입니다. 모세가 핏덩어리 모세를 보면서 부모는 좋아했습니다. 다만 핏줄이기 때문이 아니라 기대감 때문입니다. 아들을 낳으면 다 죽이라난 불행한 시대에 모세가 태어난 것은 분명히 하나님의 뜻이 있다. 하나님은 반드시 아들을 통해 반드시 고난의 민족을 위해 큰 일을 하실 것이다”. 이 믿음과 기대가 모세의 부모에게 있었습니다. 그렇게 믿자 부모들은 모세를 죽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23절입니다. “믿음으로 모세가 태어났을 때 그 부모가 아름다운 아이임을 보고 석달동안 숨겨 임금의 명령을 무서워 아니하였으며.”
 
여러분, 큰 인물은 부모의 기대와 믿음에서 온다는 것을 아십니까? 부모가 자기 자녀를 보고 “내 자녀는 잘 될거야” 하고 믿는다면, 그래서 날마다 입버릇처럼 “너는 하나님이 보냈어. 너는 반드시 잘되거야” 한다면 그 자녀는 반드시 잘되게 되어 있다는 것을 믿습니까? 저도 아이들을 키우면서 아이들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잘 압니다. 목회사역으로 바쁜 저는 아이들과 많은 시간을 갖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한가지는 했습니다. “격려와 비전”입니다. 아들은 초등학교를 외국에서 보냈기 때문에 한자도 모르고 한글도 잘못 썻습니다. 그가 중학교 다닐 때 부모로서 고민이 많았습니다. 동양문화권에 살면서 한자를 모르고 한글도 못쓰면 어떻게 합니까? 한번은 무슨 글 하나를 써 보라고 숙제를 냈습니다. 저녁에 와서 보니 엉망입니다. 고쳐야 할 문장이 너무 많습니다. 고쳐주면서 말했습니다. “그래도 내용은 좋네. 잘썻어. 너는 앞으로 훌륭한 책을 쓸거야”. 그런데 먼 훗날 이 말에 감동받고 신문기자가 될 줄을 누가 알았겠습니까? 그리고 이번에 책도 냇습니다. 딸은 어릴 때부터 높은 데를 올라가기를 좋아했습니다. 엄마는 위험하다고 말했지만 저는 그것은 기특히게 여겼습니다. 그래서 늘 말했습니다. “높은 데를 올라다니는 것 보니 너는 앞으로 공부를 잘하겠구나”. 이 말이 훗날 학자가 되겠다고 미국에서 공부를 시작할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어떤 사람도 처음부터 위대한 인물로 태어나지 않습니다. 누구나 사람은 약하고 작은 어린이로 태어납니다. 그때 그를 하나님께 연결해 주는 사람이 부모입니다. 성경은 부모를 여러 가지로 비유합니다. “부모는 도공이다”. 부모는 자녀라는 도자기를 빚는 도공과 같다는 것입니다. 부모가 정성으로 빚으면 자녀는 튼튼하고 아름다운 그릇이 될 수 있습니다. “부모는 궁수다”. 부모가 자녀의 안고 활을 쏘는 궁수라는 것입니다. 자녀는 부모가 쏘는대로 날아갑니다. 부모가 자녀를 위해 어릴 때부터 하나님안에 자신을 심는 믿음을 심어주어야 합니다. “세 살 버릇 여든 간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성경이나 역사가 하나님과 세상에 기여한 사람들은 모두 어릴 때부터 하나님을 믿은 사람들이었습니다. 한국교회 통계가 있습니다. 한국교회 신자의 86%가 10대부터 교회 나온 주일학교 출신입니다. 15살 지나서 교회 나왔다는 사람은 14%에 불과합니다. 40세 넘어서 교회 나온 사람은 전체의 4%에 지나지 않습니다. 나이 먹고 예수믿기가 그렇게 어렵습니다. 100명중 4명꼴입니다. 설령 40 이후에 믿는다 해도 그 이전의 삶은 신앙적으로 허송한 것입니다.
 
믿음은 어릴수록 좋습니다. 유명한 성서 주석가 매튜 헨리는 10살 때 하나님 믿었습니다. 유명한 발명가 아이작 와츠는 9살, 미국 프린스턴 대학의 총장 죠나단 에드워드는 7살, 성경학자 아이언사이드는 4살, 초대교회의 유명한 순교자 폴리캅은 9살, 모라비언 교파의 지도자 진젤돌프는 4살, 그리고 유명한 전도가 빌리 그래함은 3살 때 하나님을 믿고 주일학교에 다녔습니다. 성경 잠언 22:6입니다.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묘목도 일찍 심어야 잘 늦게 심으면 바람에 흔들리고 병충이 먹어 넘어집니다. 이를수록 좋습니다. 이를수록 오래 몸에 배고 이를수록 오랫동안 습관이 되기 때문입니다.
 
요즘 미래학으로 사람들에게 한국사회의 미래를 진단하는 데 도움을 주는 학자가 있습니다. 최윤식박사입니다. 그가 쓴 책을 읽고 깜짝 놀랐습니다. “앞으로 2030년, 40년이 되면 한국교인은 400만이 되고, 교회학교는 3-40만으로 줄 것이다“. 그래서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우선 가장 큰 이유가 저출산이랍니다. 지금같이 한 집에 하나 낳고 결혼 늦게 하고 아예 싱글로 혼자 사는 문화가 계속되면 인구의 감소로 그럴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몇 년전 제 아들이 결혼한다고 해서 제가 며느리될 사람에게 물었습니다. ”그래, 아이는 몇이나 날거야?“ 놀랍게도 그가 말합니다. ”저는 하나님이 주시는 데까지 낳겟습니다“. 제가 그 자리에서 ”합격” 했습니다. 저출산과 함께 이유가 하나 또 있습니다. 그것은 지금같이 한국교회가, 믿는 가정이 아이들을 제대로 가르치지 않으면 그들이 어른이 된 2030, 40년년대에는 거의 신자가 없을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와 가정이 할 일이 두 가지 있습니다. 우선 생육하고 번성해야 합니다. 또 하나는 신앙교육을 제대로 해야 합니다.
 
최근 미국의 빌리 그래함이 인터뷰에서 이런 질문을 받았습니다. ”요즘 교회와 크리스쳔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빌리 그래함이 한참 생각하더니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세상과 같아지려는 것이 문제입니다.” 요즘 가장 큰 문제는 교회가 세상과 같아지려는 것입니다. 세상이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이 더 큽니다. 어떤 시인이 그것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내가 적을 만나 보니 적은 다름 아닌 우리였다“. 우리가 바로 교회를 허는 여우라는 말입니다. 초대교회는 교회가 세상과 같아지는 것을 두려워 했는 데 요즘은 교회가 세상과 달라지는 것을 두려워 합니다. 그러나 교회가 세상과 달라지지 않으면 세상을 바꿀 수 없습니다. 그래서 어떤 신학자가 요즘 교인들을 세 가지로 표현했습니다. 하나는 ”유목민 교인“, 옛날에는 신자들이 모교회 의식이 있었는 데 지금은 없답니다. 조금만 수가 틀리면 유목민처럼 교회를 옮깁니다. 또 하나는 조금 어려운 말인데 ”코쿠닝 교인“. 코쿠닝은 누에고치를 가리키는 영어단어랍니다. 누예고치는 좀처럼 속에 있고 나오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요즘 교인들은 힘든 일, 손해볼 일, 희생하는 일을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저 꽁꽁 숨어 있습니다. 저희 교회가 광교에 한신교회 세우고 제가 ”가라, 가라, 제발 가라“ 했지만 겨우 두 세 가정 갔습니다. 힘든 일을 안하려고 합니다. 세 번째가 구들장 교인, 겨울에 추울 때 구들장에 군불을 때면 따뜻합니다. 그러면 밖에 안 나옵니다. 편하기 좋아하고 모험하지 않고 피곤한 것 싫어하고 그냥 누었다 일어났다를 반복하는 것, 자기를 귀찮게 하는 것을 싫어하는 것, 이것이 구들장 교인입니다.
 
이러다 보니 자녀들이 보고 배울 것이 없습니다. 마땅히 행할 길을 가르치지 않기 때문에 세 가지 반드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첫째 주일날은 반드시 교회가고, 둘째 하나님께 반드시 십일조 드리고, 셋째 하나님께 반드시 기도하고, 이 “반드시”가 없기 때문에 “반듯한” 자녀가 안 생깁니다. 이렇게 나가니 2030년대에 한국에 교회학교가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유려가 나온 것입니다. 우리의 자녀들이 정말 큰 나무가 되기 원합니까? 하나님께 뿌리를 내리도록 해야 합니다. 그래야 그 뿌리에서 공급받습니다. 믿음은 공급의 문제입니다. 어릴 때부터 에배하는 습관, 기도하는 품성, 섬기는 체질, 몸이 말을 듣게 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자녀도 살고 한국교회도 삽니다. 시80편에 정말 좋은 말씀이 있습니다. 시80:-10, “주께서 한 포도나무를 애굽에서 가져다가 민족들을 쫓아내시고 그것을 심으셨나이다. 주께서 그 앞서 가꾸셨으므로 그 뿌리가 깊이 박혀서 땅에 가득하며 그 그늘이 산들을 가리고 그 가지는 하나님의 백향목 같으며”. 여기에 뿌리가 땅에 깊히 박히면 어떻게 된다고 말합니까? 10절, “그늘이 산들을 가리고, 가지는 백향목같이 바다를 덮으며”. 아, 이 축복, 이것이 하나님이 꿈꾸는 큰 나무입니다. 뿌리를 하나님께 두기를 바랍니다.
 
다음 고난을 이기고 자라야 합니다.
뿌리를 하나님께 내리게 했으면 그 다음은 자라는 일이 남았습니다. 뿌리를 내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꾸준히 자라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런데 꾸준히 자랄 때 가장 큰 문제는 인내와 고난입니다. 모세를 볼까요? 히11:24-26,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받기를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주심을 바라봄이라”. 여기에 중요한 단어가 둘 나옵니다. 24절에 “거절하고”, 25절, “더 좋아하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큰 나무로 자라기 위해서는 우리가 거절할 것은 거절하고 좋아할 것은 더 좋아해야 합니다.
 
먼저 무엇을 거절해야 합니까? 24절을 다시 보십시오. 히11:24,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받기를 거절하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거절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모세는 애굽의 공주의 아들을 거절했습니다. 공주의 아들을 거절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아십니까? 애굽은 당시 세계 최강국이었습니다. 아마도 지금의 미국, 중국, 러시아를 합쳐놓은 것과 같았을 것입니다. 모세는 그 나라의 왕자였습니다. 그가 왕자 자리에 있기만 하면 모든 부와 명예, 행복이 보장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거절했겠습니까? 세상적으로 살아야 했기 때문입니다. 술과 향락에 젖어 살아야 했기 때문입니다. 권력을 위해서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아야 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자녀들은 오늘 무엇을 거절합니까? 25절에 “죄악의 낙”이란 말이 나옵니다. 죄를 가져오는 재미와 쾌락과 즐거움을 거절합니까? 성경의 사람들은 하나님을 위하여 거절할 것을 거절해야 합니다. 다니엘은 하루에 세 번 기도하기 위하여 술과 포도주를 거절했습니다. 느헤미아는 무너진 조국을 재건하기 위해 왕의 음식을 거절했습니다. 요셉은 순결하게 살기 위해 보디발 아내의 유혹을 거절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사울을 미워하는 마음을 거절했습니다. 세례 요한은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기 위해 호의호식을 거절했습니다. 거절할 뿐 아니라 더 좋아하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다시 25-26절을 보십시오. 히11:25-26,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주심을 바라봄이라”. 모세는 세상의 쾌락을 거절하고 하나님의 백성을 위해 고난받는 것을 더 좋아했습니다. 신앙은 거절이며 동시에 선택입니다.
 
무명의 시인이 쓴 “올바른 선택을 위한 기도”라는 시가 있습니다. 신앙이 선택임을 깨닫게 합니다. “주 하나님/ 올바른 결단과 선택을 통해 제가 성숙하게 하소서/ 쉬운 일이 아니라 옳은 일을/ 사람들이 좋아하는 일이 아니라 참된 일을/빛나는 일이 아니라 영원한 일을 선택하게 하소서/제가 택하는 모든 것이 마침내 제 자신을 만들기 때문입니다“. 쉬운 일보다 올바른 일을, 지금 빛나는 일보다 영원한 일을, 사람들에게 인기있는 일보다 하나님에게 참된 일을 더 좋아해야 합니다. 시인 박노해도 그런 시를 썻습니다. 제목은 ”평화“입니다. ”일상에서 작은 폭력을 거부하며 사는 것/세상과 타인을 비판하듯 내 안을 잘 들여다보는 것/현실에 발을 굳게 딛고 마음의 평화를 키우는 것/경쟁하지 말고 각자 다른 역할이 있음을 인정하는 것/일을 더 잘하는 것만이 아니라 더 좋은 사람이 되는 것“. 그것이 평화를 이루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피할 수 없는 것이 실패입니다. 신앙은 실패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실패앞에 당당한 것입니다. 진정한 실패는 잘못해서 넘어진 실패가 아니라 넘어졌는데도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영국속담에 이와같은 말이 있다. “잔잔한 바다에서는 좋은 뱃사공이 만들어지지 않는다.” G.허버트도 말했습니다. “폭풍은 참나무가 더욱 깊이 뿌리를 박도록 한다.” 아브라함 링컨이 상원의원 선거에서 낙선했을 때 이렇게 말했습니다. “길이 약간 미끄럽기는 해도 아주 낭떨어지는 아니야.” 그리스도인의 기준은 실패했느냐 성공했느냐가 아니라 하나님께 순종했느냐 불순종했느냐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음으로 실패했지만 하나님께 순종함으로 성공했습니다. 고난을 이기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많은 사람에게 유익을 주는 열매가 됩시다
고난을 이기고 큰 나무가 되면 어떻게 됩니까? 많은 열매를 맺습니다. 어떻습니까? 이런 열매가 주렁 주렁 맺혔다면 여러분은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석류입니다(장재일271). 포도입니다(Food, 33). 종려열매입니다(Food, 41). 무화과입니다(Food, 44). 이런 열매들을 거두어 하나님께 바치는 농부들은 얼마나 기뻣겠습니까? 이것이 오늘 우리가 맥추절, 초실절을 지키는 이유입니다.
 
이스라엘 순례를 하다보면 매우 덥습니다. 그래서 주변을 두리번 거리다가 그늘있는 곳으로 갑니다. 너무 더우니까 종려나무나, 무화과나무처럼 키가 크고 잎이 많은 나무를 찾습니다. 그리고 찾으면 그 나무 밑에 앉습니다. 그때 얼마나 시원합니까? 잎이 많고 무성하니 그늘이 있어 시원하죠. 열매가 주렁 주렁 달렸으니 열매를 먹을 수 있어 좋죠. 나무가 있으면 주변이 물이 있으니 시원한 물가에 발을 담글 수 있어서 좋죠. 그래서 그 그 나무밑에 누어 봅니다. 그러면 하늘 높히 솟은 큰 나무가 보입니다. 그 큰 나무가 그늘이 되어 피곤한 나그네를 덮어줍니다. 그 큰 나무를 보면서 생각합니다. “아, 나도 저렇게 큰 나무가 되어야지. 그래야 많은 사람에게 그늘과 열매와 생수를 제공하지”. 그리고 열매를 보며 생각합니다. “아, 저렇게 많은 열매맺기 위해 나무는 얼마나 고생이 많았을까. 많이 기다리고 많이 참고 많이 노력했겠구나“. 그래서 나무에게 말합니다. “나무야, 고맙다. 그동안 네가 흘린 땀방울과 그동안 네가 지불한수고의 대가로 오늘 내가 이렇게 편하게 쉬는구나”.
 
여러분. 우리가 누어 쉬는 큰 나무를 보면서 사람들이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아, 이 나무의 수고로 내가 오늘 쉬는구나”. 그리고 큰 나무가 되기 위해 얼마나 오래 참고 기다렸는지를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불후의 명작 <노인과 바다>는 헤밍웨이가 80번이나 고쳐 썻다고 합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최후의 만찬>을 10년이나 넘게 그렸다고 합니다. 괴테는 <파우스트>를 23세부터 쓰기 시작하여 82세까지 60년에 걸쳐 완성했다고 합니다. 아주 가끔 대나무에 꽃이 핀 것을 봅니다. 그런데 그 꽃 한송이가 적어도 60년, 길게는 120년을 참고 견뎌서 피었다는 글을 읽었습니다. 대단합니다. 꽃 한송이가 그냥 피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의 주인공 모세의 일생도 기다림과 인내의 일생이었습니다. 그는 호렙산에서 떨기나무를 볼 때까지 40년이나 광야에서 양을 쳐야만 했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시내산에 올랐지만 십계명을 받은 것은 그가 8번이나 힘들게 정상에 올라간 후였습니다. 그리고 그 후 40년 가나안 땅을 행진했습니다. 오랜 기다림과 인내없이 모세같은 인물이 될 수 있었겠습니까? 모세만 그럴까요? 아브라함은 이삭을 낳는 데만 25년 걸렸습니다. 야곱은 하란에서 라헬을 얻기 위해 20년을 일했습니다. 요셉은 애굽의 흉년을 이기기 위해 14년을 지나야 했습니다. 오랜 기다림, 그것이 큰 나무되는 길입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그렇게 40년을 지나서 가나안땅에 도착했으나 막상 가나안 땅에는 들어가지 못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아직 눈이 흐리지 아니하고 기력이 쇠하지 않았는 데 120세의 나이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가 큰 나무가 되어 많은 열매를 맺었으나 그 모든 영광을 자신에게 돌릴까봐 하나님은 모세를 느보산에서 급하게 데려가셨습니다. 그렇게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고 모세는 죽자 이스라엘의 모든 역사와 성경은 그리고 모든 백성은 모세가 땀흘려 맺은 열매를 따먹고 평생을 안전하게 살고 있습니다. 그는 사명을 다하고 하나님 나라 간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도 이렇게 살지 않겠습니까? 여러분의 자녀도 이렇게 살게 하지 않겠습니까? 모든 영광은 하나님께 돌리고 자신이 일생에 걸쳐 맺은 열매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나눠주는 삶, 그것이 우리가 큰 나무가 되고 많은 열매를 맺어야 할 이유입니다. 오늘 거룩한 맥추절, 초실절에, 우리 모두 하나님의 열매가 되고 하나님의 나무가 되겠습니까? 오늘 교회학교 주일에 우리의 모든 자녀들, 우리 교회학교 자녀들을 하나님의 큰 나무로 키우겠습니까? 성령님, 우리의 자녀들을 큰 나무 되게 하옵소서. 많은 열매를 맺게 하옵소서. 이를 위해 자녀들의 뿌리는 하나님의 믿음암에 세워지게 하옵소서. 말씀과 성령으로 양육되고 성장하게 하옵소서. 고난을 이기며 실패앞에 당당하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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