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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에 대한 100가지 질문

 

1. 이슬람(Islam)이란 무슨 뜻인가?

 

신의 뜻에 절대 복종한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무슬림 (복종자란 의미로 이슬람교도를 통칭)이란 말이 여기에서 나왔다.

 

2. 알라(Allah)는 무슨 의미인가?

 

유일한 창조자라는 뜻이며 아랍어의 중성(中性) 보통명사. ‘알라신()’이라고 부르면 동어반복(同語反復)이다.

 

3. 이슬람은 언제부터 시작됐나?

 

역사적 실체로서 이슬람의 원년(元年)은 무하마드가 메카에서 메디나로 이주해(헤지라) 신앙공동체를 만든 622년이다. 무하마드는 610년에 알라의 계시를 받았다.

 

4. 흔히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 불교는 자비의 종교라고 한다. 이슬람은 어떤가?

 

평화의 종교라 할 수 있다. 이슬람의 어원인 살라미(salami)는 평화란 뜻이다.

 

5. 무하마드는 어떤 인물인가?

 

서기 570년쯤 아라비아의 꾸라이쉬족()에서 유복자(遺腹子)로 태어났다. 어머니도 6세 때 죽었다. 삼촌 집에서 양육됐고 25세 때 40세 부자 과부 카디자와 결혼했다. 40세부터 알라의 계시를 받아 포교활동을 하다가 632년에 숨졌다.

 

6. 이슬람의 예언자(預言者)란 무슨 뜻인가?

 

알라의 말씀을 인간에게 설명하고 해석하는 역할을 한다. 이슬람에선 모두 124000명의 예언자가 있다고 하는데 그중 28명이 코란에 기록되어 있다. 아담, 노아, 아브라함, 모세, 예수 등의 성경(聖經) 인물과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무하마드가 주요 예언자다.

 

7. 헤지라(Hijra)란 어떤 것인가?

 

무하마드가 지역 부족들의 탄압을 피해 메카에서 메디나로 추종자 70여명을 데리고 622년에 이주한 사건으로 성스러운 이주를 뜻한다.

 

8. 무하마드는 메디나에서 움마(Ummah)를 건설했다고 하는데 무슨 의미인가?

 

무하마드가 신도들을 모아 만든 형제애적인 신앙공동체. 그후 이슬람 메시지를 전파하는 사명을 지닌 신도들의 공동체란 의미로 움마란 단어가 사용됐다.

 

9. 무하마드는 부인을 몇 명이나 두었나?

 

모두 11명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4명 이상은 두지 않았다. 코란의 규칙을 지킨 것이었다.

 

10. 무하마드의 후계자라는 칼리프는 어떻게 선출되었나?

 

무하마드는 아들이 없었고 유언도 남기지 않았다. 때문에 후계자는 신도들이 협의해 투표로 선출했다. 1대 칼리프는 무하마드의 동료이자 장인이었던 아부 바크르였다.

 

11. 코란은 언제 완성됐으며, 어떻게 구성되어 있나?

 

무하마드가 가브리엘 천사로부터 받은 계시를 그의 제자들이 모아 644~656년에 완결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모두 114장으로 되어 있으며 각 장을 수라라고 한다. 알라가 1인칭으로 말하는 형식을 취했다.

 

12. 코란은 왜 아랍어로만 읽어야 한다고 하는가?

 

알라가 내려준 언어인 아랍어만이 가장 아름답고 의미를 제대로 전달할 수 있다고 본다.

 

13. 하디스(Hadith)는 무엇인가?

 

무하마드의 언행 및 전승을 기록한 책으로 종교예식과 일상생활 세칙을 모두 담고 있다.

 

14. 술탄은 무엇인가?

 

칼리프의 위임으로 이슬람 세계의 일부 내지 전역을 지배하는 세속적 권력자의 칭호.

 

15. 이슬람은 특히 기독교 신앙을 어떻게 보나?

 

이슬람은 예수(이사라고 부름)가 훌륭한 예언자지만 신성(神性)은 없으며 십자가에서 죽지 않았다고 본다. 삼위일체를 부정한다.

 

16. 교리적으로 보아 이슬람은 유태교 및 기독교와 어떤 관계가 있는가?

 

무하마드는 초기 시리아와 아라비아 쪽으로 흘러나온 기독교 이단인 단성론(單性論)과 유태교 이단의 영향을 많이 받아 그쪽 교리를 채택했다. 상당수 주변부 교리나 풍습도 유태교와 기독교에서 가져간 것으로 본다.

 

17. 기독교에서는 이슬람을 어떻게 보는가?

 

사이비 기독교 종파가 아랍 토착종교와 결합하여 발생한 전혀 별개 종교로 본다. 알라는 아라비아 부족의 월신(月神)에서 유래됐으며 기독교의 하나님과는 다르다.

 

18. 예루살렘과 이슬람의 관계는?

 

이슬람의 3대 성지(聖地)중 하나. 코란엔 예루살렘에 대한 언급은 없다. 단지 무하마드가 예루살렘 성전산에서 천상(天上)여행을 다녀왔다는 전설에 따라 성전산에 바위사원이 세워졌다.

 

19. 이슬람에도 원죄(原罪)의 개념이 있나?

 

기독교에서 말하는 원죄란 개념은 없다. 인간은 누구나 죄없는 선한 상태로 태어난다고 말한다.

 

20. 이슬람의 종파에는 어떤 것이 있나?

 

수니(Sunni)파가 다수파로 초기 칼리프들을 무하마드의 정통 후계자로 인정한다. 아라비아, 이집트, 터키 등에 널리 퍼져 있다. 시아(Shiite)파는 2대 종파로 암살당한 무하마드의 사위 알리를 정통 후계자로 본다. 이란이 본거지이고 이라크, 시리아 등에 분포한다. 이밖에 타 종교와 혼합한 드루즈파, 시아파에서 갈라져 나온 이스마일파 등이 있다.

 

21. 이슬람의 율법이라는 샤리아는 어떤 것인가?

 

법적이면서도 종교적인 내용이 많아 결혼이나 식사방법, 기도 방법이나 기도 시기 같은 주제를 담고 있다.

 

22. 이슬람의 율법은 법을 공개 집행하고, 눈에는 눈, 이에는 이식의 보복법 집행을 한다고 하는데 사실인가?

 

정의를 실천한다는 이유로 전통적으로 그렇게 실시해 왔으나 최근에는 종파와 나라마다 약간의 차이가 있다.

 

23. 이슬람 사회에서 일반법률은 어떤 비중을 차지하고 있나?

 

사우디 아라비아, 수단, 이란 등에선 이슬람 율법인 샤리아가 헌법이다. 하지만 터키를 비롯한 아시아, 아프리카의 일부 이슬람 제국에서는 샤리아를 전면적 또는 부분적으로 폐지하고 유럽이나 다른 국가의 법 제도를 채택했다.

 

24. 이슬람교도(무슬림)들에게는 육신(六信)이 있다고 하는데 어떤 것인가?

 

유일신이자 창조주인 알라를 믿는다. 예언자들을 믿는다. 거룩한 책들(코란 포함)을 믿는다. 천사들을 믿는다. 심판과 부활을 믿는다. 알라의 법칙과 정명론(定命論)을 믿는다.

 

25. 무슬림들이 반드시 지켜야 하는 5가지 기본적인 의무는 무엇인가?

 

알라 외에는 신이 없고 무하마드는 알라의 사도다라는 신앙고백(샤하다), 하루 다섯번의 기도(사라트), 구제(자카트), 메카 순례(하지), 라마단 금식(禁食)(사움)이다. 시아파는 여기에 성전(聖戰)(지하드)을 추가한다.

 

26. 이슬람교도들이 예배를 할 때 메카를 향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무하마드는 처음 예루살렘을 향해 기도하라고 했다가 유태인과 기독교인들이 구약도 제대로 모른다며 자신을 비웃자 630년 메카에 있는 카바 신전을 기도 방향으로 정했다.

 

27. 예배는 꼭 정해진 시간에 보아야 하나?

 

태양의 위치에 따르도록 돼 있기에 정확한 시간이 정해진 것은 아니다.

 

28. 모스크는 어떤 곳인가?

 

아랍어로 엎드리는 곳이란 뜻의 마스지드에서 나온 말로 이슬람의 예배당을 일컫는다.

 

29. 모스크에 들어가기 전엔 반드시 몸을 씻는 이유는?

 

예배 전 몸을 씻는 것을 우두(wudu)라 하는데, 알라에 대한 예의 차원이기도 하지만 코란에도 청결하지 않은 몸으로 행하는 예배는 받지 않겠다고 되어 있다.

 

30. 모스크에 딸려 있는 미나렛의 역할은?

 

예배시간을 육성으로 알리는 역할(아잔ㆍadhan)을 하며, 이를 행하는 사람은 무에진(muezzin)이라 한다.

 

31. 무에진이 될 수 있는 자격이 있나?

 

크고 청아한 목소리를 지니고 있으면 누구나 될 수 있다.

 

32. 모스크 안에서도 남녀는 따로 앉아 예배를 보나?

 

남녀가 따로 앉되 남자가 앞에 앉는다. 좁은 공간에서 생길 수 있는 불편한 점을 예방하기 위한 것이다.

 

33. 이슬람에는 성직자를 두지 않는다고 하는데, 탈레반의 최고지도자인 오마르를 물라라 부르는 것은 무엇인가?

 

신과 인간 사이에 중매자를 두면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중매자만 보게 된다고 믿기 때문에 이슬람에선 성직자가 없다. 물라는 종교지도자, 율법학자란 뜻이다.

 

34. 이슬람을 흔히 정교(政敎)일치 종교라고 하는데, 왜 그러한가?

 

코란은 인간의 정신적, 물질적 생활 전반을 망라하기에 성속(聖俗)을 구별하지 않는다. 성과 속을 구별할 경우 정신생활이 물질생활에 종속될 우려가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35. 이슬람에서 모든 사람은 알라 앞에서 평등하다고 주장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슬람은 지위나, 명성, 부와 같은 세속적인 것들이 알라와의 만남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보기 때문이다.

 

36. 이슬람 사회의 슈라(shura)는 무엇인가?

 

협의를 뜻하는 말. 무하마드도 무슨 결정을 할 때는 슈라를 거쳤다. 지금도 쿠웨이트, 아프간 등 이슬람국가 중에는 슈라를 국회와 같은 기구로 활용하고 있다.

 

37. 이슬람 종교학교(마드라사)는 무엇인가?

 

일반적으로 이슬람의 고등교육 시설을 말하나 전통적으로는 울라마(율법사) 양성이 주목적이다.

 

38. 이슬람이 우상숭배를 금지하는 이유는?

 

알라가 유일신임을 인정한다는 것을 증명하는 행위가 바로 우상숭배 금지이기 때문이다.

 

39. 이슬람교도들은 금요일에 예배를 보는데 왜 그런가?

 

이슬람에선 금요일에 태양이 떠올랐고 아담이 창조됐으며 심판이 일어나기 때문에 금요일을 가장 훌륭한 날로 여긴다.

 

40. 지금도 아랍지역에서 기독교가 활동하고 있나?

 

일부 아랍지역에서 극소수 기독교 신도가 있으나 계속되는 탄압과 사회적 소외로 제대로 찾아보기 힘들다. 그마저 대개 단성론자나 정교회(正敎會) 계통으로 서방 기독교와는 차이가 난다.

 

41. 무슬림들이 많이 쓰는 인샬라는 무슨 뜻인가?

 

신의 뜻에 따라라는 아랍어로 무슬림들이 일상 생활에서 약방의 감초처럼 사용한다.

 

42. 이슬람에선 하루를 무엇으로 기준하여 계산하는가?

 

유태인과 같이 하루 해가 지면 새로운 날로 간주하고 아랍쪽도 그런 관행이 있어 결혼식 등 중요 행사를 밤에 열곤 했지만 지금은 대체로 하루 계산이 서구와 비슷해졌다.

 

43. 라마단은 무엇이고 왜 단식(斷食)을 규정하고 있나?

 

무하마드가 알라의 계시를 받은 달(대략 음력 9월경)을 라마단으로 정하고 단식을 한다. 초기엔 24시간이었으나 10일로, 다시 한달로 연장됐다. 올해 라마단은 1117일에 시작한다. 단식으로 지옥의 문이 닫히고 천국의 문이 열린다며 속죄의 의미를 강조한다 

  

44. 라마단 기간 중에 이슬람교도들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

 

해가 떠 있는 동안 음식은 물론 물도 마시면 안된다. 부부관계를 해도 안되며 남을 비방하는 말을 삼가야 하고 향수 냄새를 맡거나 화를 내서도 안된다. 다만 13세 미만의 어린이, 노약자들, 여행자, 생리 중인 여자 등은 단식이 면제된다.

 

45. 무슬림들은 반드시 메카순례를 해야만 하나?

 

모든 무슬림들은 자유로운 성인으로 온전하고 건강하며 적당한 재산이 있다면, 그리고 순례하는 동안 가족의 생계에 지장이 없다면 일생에 한번 메카 순례를 하도록 되어 있다. 여기에서 예외이면 면제가 되기도 하고 대리인을 보낼 수도 있다. 기업체에는 메카 순례를 위해 회사가 돈을 적립해주기도 한다.

 

46. 메카의 카바 신전이란 어떤 곳인가?

 

원래 아라비아 다신교(多神敎)의 우상숭배 장소였으나 무하마드가 아브라함과 그의 서자인 이스마엘이 알라에게 예배드린 곳이라며 이곳을 성지(聖地)로 삼았다. 카바란 입방체란 뜻.

 

47. 성지순례시 메카에서 하는 의식으로는 어떤 것이 있나?

 

보통 카바 신전을 7바퀴 돌고 내부의 검은 돌에 키스한 뒤 잠잠이란 우물 주변에 있는 99개 예언자들 무덤과 성자들의 무덤을 방문한다. 그리고 이블리스(사탄)라고 하는 돌기둥에 돌을 던지며 코란 구절을 외운다. 또 메카에서 25떨어진 아라파트 언덕을 오르고 6떨어진 미나에서 양과 낙타로 희생제사를 드린다.

 

48. 이스마엘과 이삭은 모두 아브라함의 아들이라고 하는데 서로 어떤 관계인가?

 

아브라함이 자식이 없자 여종 하갈에게서 얻은 아들이 이스마엘, 나중에 본처인 사라에게서 낳은 아들이 이삭이다. 서자(庶子)인 이스마엘은 쫓겨나아랍인의 조상이 됐고, 적자(嫡子)인 이삭은 유태인의 조상이 됐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으로부터 이삭을 약속의 아들로 받았다고 기록돼 있다.

 

49. 이슬람교도들은 왜 턱수염과 구렛나루를 기르나?

 

예언자 무하마드가 턱수염을 길게 길렀다 하여 그에 따르려는 행동인데, 여기에 유목민 고유의 연장자 우대 전통과 어울려 더욱 확산됐다.

 

50. 이슬람권 국가의 여성들이 집 밖에 나설 때마다 차도르(머리를 덮어싸는 보자기로 이란에서는 히잡이라고 함)를 쓰는 이유는?

 

남녀가 상대의 육체(겉모습)만 보고 인격을 판단해선 안 된다는 의미에서 시작됐다. 남자의 경우도 맨몸을 드러내지 않는다. 공중목욕탕에서도 꼭 팬티를 입는다.

 

51. 흔히 성전(聖戰)으로 일컬어지는 지하드(jihad)는 무엇을 의미하나.

 

지하드는 외부의 공격에 대한 항거 등 자기 방어의 목적을 갖고 있다. 또 내부적으로도 부패에 찌든 사회, 도덕적으로 황폐해져 가는 자신을 지키는 일도 이에 포함된다. 지하드가 악용 내지 남용될 소지가 있으나 판단하기는 매우 어렵다.

 

52. 아프간 여성들이 외출할 때면 반드시 착용해야 한다는 부르카는 어떻게 생겼나?

 

머리 끝에서 발끝까지 온몸을 감싼다. 내놓는 것은 손 뿐인데 그것마저 망사로 쳐 외부에선 누구인지를 알아 볼 수 없다.

 

53. 이슬람 지역 여성들은 어릴 때 할례를 해야 한다는데, 그 이유는?

 

할례란 성기의 일부를 도려내는 작업으로 그걸 하면 성에 대한 욕구가 절제된다고 한다. 아랍이나 아프리카의 토착 풍습. 순결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라고 하지만 여성에게만 요구한다는 차원에선 여성 차별이라 말할 수 있다.

 

54. 이슬람 사회에는 명예살인이라는 것도 있다는데, 왜 그런 일이 벌어지나?

 

여성이 혼전에 순결을 잃는다거나 결혼 후에 간통을 하게 되면 집안의 명예를 더럽혔다 해서 그 아버지나 오빠가 당사자를 죽이거나 병신을 만들기도 하는데 이를 명예살인이라 부른다. 따라서 명예를 더럽힌 남자도 이 사회에선 발을 붙이지 못한다.

 

55. 이슬람 지역 여성들이 손발을 치장하는 헤나(henna)라는 것은 어떤 것인가?

 

헤나란 꽃가루와 나뭇가루, 식물성 기름 등을 한데 섞어 만든 검은 색 계통의 안료를 말하는데 이를 이용해 아랍, 인도 여성들은 손등과 손바닥, 발등에 식물의 줄기나 잎, 나비 등을 예쁘게 그려 치장한다. 남성의 시선을 끌기 위해생겨난 풍습.

 

56. 아랍지역에도 찻집이 있나?

 

물론 있다. 서양의 오픈 카페처럼 주로 길거리에 있는데, 남성들만 출입한다. 여기서 물담배, 체스 등을 즐긴다.

 

57. 아랍과 이슬람, 중동은 서로 어떻게 다른가?

 

아랍은 인종, 언어 등 문화적인 요소를 일컫고, 이슬람은 알라를 믿는 종교를 말하며, 중동은 지리적 개념으로 서아시아와 북아프리카를 지칭한다.

 

58. 중동 평화와 관련하여 문제가 되는 팔레스타인은 어디인가?

 

현재 이스라엘 영토 및 점령지역인 요르단강 서안과 가자 지구를 합친 지역.

 

59.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종종 벌어지는 인티파다(Intifada)는 무엇인가?

 

이스라엘에 저항하여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땅을 되찾기 위해 1987년부터 본격적으로 벌이는 무차별 과격 무장 봉기를 뜻한다.

 

60. 아프간의 실질적인 정부인 탈레반은 어떤 조직인가?

 

구도자란 뜻. 이슬람학교에서 코란을 공부하는 학생을 가리키기도 한다. 199410월 동남부 칸다하르의 이슬람학교 학생운동가들이 세웠다. 969월 이슬람 조직간의 내전에서 승리, 국토의 90%를 장악했다. 종파간 자치형식으로 국가를 운영하고 있지만 UN은 합법적인 정부로 간주하지 않는다.

 

61. 이슬람의 교리에 폭력을 인정하거나 찬미하는 부분이 있나?

 

공식적으로 폭력을 옹호하지는 않는다. 다만 원리주의자들은 지하드(聖戰)를 언급한 코란 구절들을 자주 동원한다. 하디스에는 지하드가 두 차원에서 진행되는데 첫째 순수한 포교활동이며 둘째 신앙의 방어로 필요하다면 물리적인 방법으로 수행하게 된다고 밝혔다.

 

62. 이슬람 부흥운동은 무엇인가?

 

이슬람의 정신적 쇠퇴를 비판하고 무하마드의 움마 정신, 즉 순수 이슬람 정신으로 되돌아가자는 운동이다. 반서구적, 반체제적 성격을 띠고 있다.

 

63. 이슬람 원리주의 또는 근본주의란 무엇인가?

 

현재의 사우디 왕국을 세운 와하브의 와하비주의(主義)가 이슬람 원리주의의 중요한 흐름 중 하나다. 사우디는 친()서방적이지만 국민들은 와하비주의에 기반한 엄숙주의, 배타주의, 그리고 혁신을 반대하는 극도의 보수주의를 지킨다. 이슬람 근본주의는 샤리아가 지배하는 사회를 목표로 한다. 이란이나 탈레반의 아프가니스탄이 사례가 될 수 있다.

 

64. 원리주의자들은 왜 테러를 일삼고, 서구에 증오감을 갖고 있나?

 

서구의 물질주의가 이슬람 정신을 위협하고 있다고 보기 때문에 서구에 대해 본능적인 거부감을 갖고 있다. 특히 1948년 이스라엘이 건국되면서 이를 분쇄하려 했으나 실패하자 테러리즘이 증폭됐다.

 

65. 이슬람교에서는 원리주의 테러리스트들을 용인하고 있는가?

 

테러리스트로 이슬람의 명예가 실추된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일반 이슬람 사회에서는 지하드와 관련해 그들이 공개적 또는 잠재적으로 존경받기도 한다.

 

66. 이란에 이슬람혁명이 일어난 이유는?

 

부패한 친미(親美) 팔레비 정권이 이란을 서구화하는 과정에서 이슬람의 전통과 정신이 훼손되자 호메이니를 비롯한 물라(율법학자)들이 왕정을 끈질기게 비판, 왕정 타도로 이어졌다.

 

67. 이슬람권 반미(反美)의 뿌리는?

 

터키의 경우 근대화와 세속화에 어느 정도 성공해 세계체제에 순조롭게 편입했다. 하지만 나머지 중동 국가들은 이교도(異敎徒) 국가인 미국 주도의 세계질서에 끌려 다니는 것이 못마땅한 데다 미국의 이스라엘 지원, 페르시아만 전쟁 등으로 반미운동이 확산됐다.

 

68. 서구의 이슬람공포증은?

 

이슬람공포증(Islamophobia)은 유럽에 이슬람이 전파되기 이전부터 형성되었다는 게 정설. 강한 군대를 몰고 다니며 코란이냐 칼이냐를 외치는 이슬람에 대한 소문이 퍼지면서 적대의식과 두려움이 생겨났다.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11세기 십자군이 일어났다.

 

69. 이슬람 무장단체에는 어느 지역에 어떤 것이 있나.

 

1928년 이집트에서 시작한 무슬림형제단이 본격적인 불을 지폈다. 현재 레바논의 헤즈볼라, 팔레스타인의 하마스, 이집트의 자마아트 이슬라미야, 알제리의 무장무슬림그룹, 여러 나라에 걸쳐 있는 빈 라덴의 알 카에다 등이 있다.

 

70. 이슬람에서 음주와 돼지고기의 식용을 금지하는 이유는?

 

음주는 정신을 흐리게 한다는 이유로 이집트를 제외한 이슬람 국가에서 금지된다. 돼지고기는 불결한 음식으로 보고 있으며 다만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돼지고기를 먹는 것은 허용된다.

 

71. ()은 어떤 방식으로 잡는가?

 

이슬람법에 따라서 희생제를 맡는 사람의 이름이 언급되고 알라의 이름으로 알라는 위대하다라고 말한 뒤 단숨에 양의 목을 자른다. 피는 동맥을 통해 완전히 뺀 다음 고기를 도려낸다.

 

72. 이슬람권에서 술을 마실수 있나?

 

음주는 코란에선 우상숭배·도박과 함께 금지하고 있는 사항 가운데 하나다. 마실 수도 없고 제조할 수도 없다.

 

73. 이슬람에서는 남자에게 부인을 4명까지 둘 수 있도록 하고 있다는데, 누구에게나 가능한 일인가? 왜 여성은 4명의 남편을 둘 수 없나?

 

코란의 규정에 의해 경제적 능력과 부인 모두를 공평하게 사랑할 수 있는 자에 한해서만 4명의 부인을 둘 수 있다. 그러나 여자는 복수의 남편을 거느릴 수 없다. 여자는 경제적 능력이 없다고 보아 그랬을 것이다.

 

74. 결혼을 하게 되면 남자는 신부가 될 여자에게 마흘이라는 것을 지불한다고 하는데, 이는 무슨 의미인가?

 

신랑이 결혼과 함께 신부집에 지불하는 돈으로 남자의 경제적 능력을 증명한다는 의미가 있다. 그 돈은 이혼을 하더라도 여성의 몫이다.

 

75. 코란에서 별도로 금지하고 있는 결혼도 있나?

 

어머니, 여형제, 큰어머니, 작은어머니, 이모, 고모, 형제 자매의 여아, 유모, 같은 젖을 먹고 자란 여자, 장모 등과는 결혼할 수 없다.

 

76. 이슬람사회에서도 이혼은 가능한가?

 

남자는 언제든지 이혼 청구가 가능하지만 여자에게는 그런 권리가 없다.

 

77. 이슬람사회에도 창녀가 있나?

 

순결과 가정을 중시하는 이슬람이라 원칙적으로 있을 수가 없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아주 은밀하게 존재한다.

 

78. 이슬람의 남녀 분리 사회생활은?

 

원칙적으로 남녀의 공간이 분리돼 있다. 공공장소에서는 물론 집안에서도 그러하다. 사람과의 접촉이 많은 직종은 그래서 남자들이 한다. 그러나 서구 문물의 영향으로 그러한 전통이 허물어지고 있다.

 

79. 왜 이슬람 국가에서는 손으로 밥을 먹는가?

 

이슬람만의 습관은 아니다. 인도와 동남아시아에서도 그러하다. 손은 남의 것과 섞일 염려가 없어 가장 위생적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80. 왜 무슬림들은 오른손을 신성시하나?

 

하늘에서 알라의 오른쪽이 왼쪽보다 높은 곳이며, 순교하면 바로 그 오른쪽에 앉을 수 있다고 믿는다.

 

81. 아랍인들의 주식은 무엇인가?

 

쿠브즈라 부르는 우리의 빈대떡 크기 만한 식빵이다.

 

82. 이슬람 지역에도 대중목욕탕이 있나?

 

큰 도시의 시장에는 반드시 함맘(hammam)이라 부르는 대중목욕탕이 있다. 둥근 천장에는 구멍이 뻥뻥 뚫려 있고 바닥은 대리석이다. 그러나 욕조는 없다. 물을 수조에서 받아 씻을 뿐인데, 때를 벗기지 않는다. 팬티 차림으로 목욕한다.

 

83. 이슬람 전통 도시를 흔히 메디나(medina)라 부르는데, 어떤 특성을 갖고 있나?

 

좁은 골목으로 이루어져 있고 그 중에 모스크와 마드라사(종교학교), 함맘(대중목욕탕), 수크(시장) 등이 들어서 있다. 길가의 집은 대개 가게를 겸한다. 메디나의 외곽은 외부 공격에 대비해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다.

 

84. 이슬람 지역의 시장은 어떠한가?

 

수크(souq, 페르시아나 터키에선 바자)라고 하는데, 없는 게 없다. 매력은 흥정에 있다. 따뜻한 정이 오고 가는 매우 인간적인 만남의 공간이다.

 

85. 유태인, 화교와 더불어 세계 3대 상인이라고 하는 아랍인들의 상술은 어떠한가?

 

돈을 버는 일에 종사하나 돈버는 데만 급급하지 않는다. 마케팅에 열을 올리지 않으며 대체로 향락산업에는 손을 대지 않는다.

 

86. 이슬람교는 초기부터 포교가 빨랐다. 그 비결은?

 

우선 이들에 맞설 만한 세력이 없었고 단순한 교리와 막강한 군사력을 보유한 데다 종교적 열정이 매우 강했다는 점도 들 수 있다.

 

87. 아라베스크 문양이란 어떤 것인가?

 

살아 있는 것들은 그리지 말라는 코란의 가르침에 따라 식물의 형상, 기하학적 도형, 코란의 서체(書體) 등을 이용하여 문양을 그렸는데 이를 아라베스크 문양이라 부른다.

 

88. 모스크가 대체로 돔 구조로 되어 있는 특별한 이유가 있나?

 

반구형(半球形)의 돔은 천상의 하늘을 상징한다. 그러므로 알라에 바친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89. 이슬람교도들은 아이의 이름을 어떻게 짓나?

 

아이가 태어난 뒤 7일째 되는 날에 일가 친지들을 모아놓고 코란을 낭송한 다음 축하연을 베푼다. 이름은 맨 앞쪽이 그 아이 이름이고 뒤로 갈수록 먼 조상의 이름이나, 이름의 길이는 가문에 따라 다르다.

 

90. 이슬람의 장례는 어떠한가?

 

유족들은 사자를 위해 매장하나 대개의 경우 묘는 작게 만든다. 장례식은 모스크에서 치른다.

 

91. 이슬람에선 3개의 시계가 필요하다고 하는데, 그건 무슨 뜻인가?

 

그들은 원래 헤지라 역()을 쓴다. 그렇지만 지금에 와선 서력을 무시할 수 없게 돼 두 개의 시계가 필요하다. 여기에 일출과 일몰에 의해 시간이 결정되는 예배 때문에 또하나가 필요하다.

 

92. 이슬람교도들은 금요일에는 무엇을 하고 지내나?

 

금요일은 이들에겐 안식일이다. 일을 하지 않는다. 그래서 가게문도 닫는다. 모스크를 찾아가 예배를 드리고 남는 시간은 코란을 읽으며 하루를 지낸다.

 

93. 물에 대한 특별한 원칙 같은 것이 있나?

 

물은 알라가 준 것으로 개인이 독점할 수 없으며 누구나 마실 수 있도록 청결하게 이용해야 한다. 도시의 길거리에 설치된 물독의 물도 절대 헛되이 쓰지 않는다.

 

94. 이슬람교도의 숫자는 어느 정도인가?

 

세계 180여 개국에 12억명 정도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인구의 절반 이상이 무슬림인 국가 수만도 55개나 된다.

 

95. 현재 서구에서도 이슬람은 포교되고 있는가?

 

아랍 및 아프리카인들의 유럽 또는 미국으로의 이주에 따라 서구에서도 이슬람교도의 숫자가 늘어나고 있는 추세다. 인구 5800만의 프랑스의 경우, 개신교도가 70만명인 데 비해 이슬람교도는 300만명이나 된다.

 

96. 한국과 이슬람 지역은 언제 어떻게 교류하기 시작했나?

 

이슬람과 우리와의 교류는 9세기 통일신라시대부터 이루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9세기 때의 아랍측 기록에 신라의 이름이 언급되고 있는 데다 서역인이라 부르는 석상이 신라인들에 의해 세워지기도 했다. 교역에 따른 인적 교류인 것으로 보인다.

 

97. 현재 한국의 이슬람교 사원과 신도는 어느 정도인가. 언제 들어왔나?

 

625 때 터키군의 파병으로 이슬람이 우리에게 다시 알려졌는데, 최초의 모스크는 오일쇼크 때인 1976년 서울 이태원에 세워졌다. 현재는 전국 5곳에 사원이 있으며, 신도는 주로 이슬람국가에서 일자리를 찾아 온 근로자들이다.

 

98. 현재 한국에서 이슬람교 포교활동은 어떤 형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나?

 

적극적인 포교는 현실적으로 어려워 이슬람 지역에서 오랫동안 살았던 사람들이 제 발로 찾아오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99. 한국에서도 이슬람 또는 아랍음식을 맛볼 수 있나?

 

서울 이태원동의 해밀튼호텔과 중앙성원 주위에서 아랍·인도음식을 즐길 수 있다. 차와 향료 등도 구할 수 있다.

 

100. 덕수 장씨가 아랍인의 피를 물려 받았다고 하는데 사실인가?

 

13세기 원나라 제국공주의 시종관으로 고려에 와서 높은 벼슬에 올랐던 아랍인 삼가(三哥)가 고려 여인과 결혼하여 한국사회에 동화되었는데, 덕수 장()씨가 바로 그 후예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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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16세기의 오스만  제국군

 

13세기 말 몽골에 위협을 피해 소아시아에 정착한 투르코만 족은 오스만 1세가 비잔틴 국경지대의 8개의 성과 에스키세히르, 예니세히르를 점령하면서 오스만 공국을 건국했다. 4차 십자군의 콘스탄티노플 점령, 세르비아, 불가리아, 타타르 족의 침공, 대 카탈로니아 용병단의 반란으로 쇠약해진 비잔틴 제국을 약탈, 점령하면서 성장한 오스만 공국은 바야지드 1세(1389~1402년)가 1389년 세르비아 동맹국을 결정적으로 패배시켜 세르비아와 보스니아를 속국으로 만듦과 동시에 술탄 자리에 올라 제국의 반열에 올라섰다. (이전의 오스만의 군주들은 대공(Emir)의 칭호를 사용했다.) 이후 바야자드 1세 아래서 오스만 투르크 제국은 헝가리와 부르고뉴의 연합군을 제압하고(1396년) 콘스탄티노플 코앞까지 진군했으나, 1402년 14만의 병력을 이끌고 서진해 온 몽골의 후예 티무르에게 바야자드 1세가 이끄는 8만 5천명의 오스만 투르크 군이 앙카라에서 패배하고, 이어 바야자드 1세가 티무르 군에 사로잡혀 오스만 투르크 제국은 혼란기에 빠져들었다.

1413년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혼란을 종식시키고 술탄이 된 마호멧 1세(1413~1421년)는 오스만 투르크 제국을 재건했고 무라드 2세(1421~1451년)는 정복전쟁을 다시 재개해 1444년 코소보에서 그가 이끄는 5~6만 명의 오스만 군이 2만 4천명의 유럽연합군을 철저하게 패배시켜 콘스탄티노플을 고립시켰다. 정복자 메멧 2세(1451~1481년)는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고 비잔틴 제국을 멸망시켜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전성기를 열었다. 이후 오스만 투르크 제국은 1683년 비에나 공성전이 패배로 끝날 때까지 유럽의 최대위협세력으로 남는다.

전성기의 오스만 군대는 둔전병인 지방 기병대 시파히와 예나체리를 포함하는 술탄의 군대 카피쿨루 군단이 핵심을 이루었다. 이 외에 지원병인 아자프가 전쟁 중 보병으로 참전하고, 여러 속국에서 병력을 지원했다. 전통적인 오스만 투르크 군의 전술은 경기병인 아키닉스가 전초부대로써 정찰, 기습, 유인 등의 임무를 맡고, 아자프는 그 뒤에서 화살로 적군을 약화시키는 임무를, 예나체리는 중앙에 배치돼 참호와 목책, 낙타, 포병대의 도움을 받으면서 아군의 중앙과 술탄을 보호하는 임무를, 지방 기병대인 시파히는 양쪽 날개에 배치돼 적군이 아군의 중앙으로 돌파를 시도하면 적군의 측면과 후방을 강습해 적군을 괴멸시키는 역할을 맡았다. 술탄의 친위 기병대인 카푸쿨루 수바릴레이는 시파이의 뒤에 배치돼 필요하면 전장에 투입됐고, 타타르와 세르비아의 기병대를 진영 뒤에 숨겨 갑자기 적군을 기습하는 임무를 맡기기도 했다. 15~16세기의 오스만 투르크 제국은 대부분의 전쟁에는 2만~4만 명의 전투병을, 대규모 원정에는 6~8만 명의 병력을 투입했고, 최대 16만 명 정도의 병력을 전쟁에 동원할 수 있었다.


1.술탄의 군대. 카피쿨루 군단:


원래 술탄의 노예로 이루어진 술탄의 친위대였던 카피쿨루는 보병대인 예나체리를 추가시켜 술탄의 군대로 편성되었다. 카피쿨루 군단은 술탄의 기병대인 카푸쿨루 수바릴레이(Qapukulu Suvarilei, 궁정 기병대)와 정예 보병대인 예나체리를 주력으로 하고, 귀족 및 지방 유력자의 자제들로 구성된 술탄의 호위기병대 무테페리카, 포병대와 공병대가 포함돼 있었다. 15세기 초반까지는 그리스도 교 출신의 전쟁포로들이 카피쿨루의 핵심을 이루었지만 1438년부터는 그리스도 교인의 자식들을 강제징집하는 데브시르메 제도가 정착됐다. 데브시르베 제도는 그리스도 교 40가구 중 1명의 아이를 강제 징집시켜 1년에 1000~3000명을 뽑았는데 주로 농촌지역의 그리스도 교 가정에서 8~15세의 아이들이 징집됐으며, 도시지역이나 해안가, 아들이 1명만 있는 가정, 유태인, 광부, 전략적 요충지의 주민 등은 강제 징집대상에서 제외됐다. 14~18세기 동안 술탄들은 지방군을 견제하기 위해서 점차 카피쿨루 군단의 병력을 늘였다. 메멧 2세(1451~1481년) 치하에서는 카피쿨루 군단 내의 예나체리 병력을 1만 2천명 선으로 늘리고(메멧 2세 초기에는 3000명의 카푸쿨루 슈발레이와 6000명의 예나체리가 존재) 술래이만 1세(1520~1566년)은 카피쿨루 군단의 병력을 4만 8천명으로 증가시켰다. 16세기 중반에 이르면 술탄은 광대해진 제국을 통제하기 위해 예나체리를 주요지역에 주둔시켰는데, 지방에 정착한 예나체리들은 술탄에게 충성을 바치는 대신 그 지방의 유지들과 유착하게 되는 폐해를 낳게 된다.


가. 술탄의 엘리트 기병대. 카푸쿨루 수바릴레이(Qapukulu Suvarilei, 궁정기병대)

카푸쿨루 수바릴레이는 술탄의 친위 기병대로 중무장을 한 기병대였다. 카푸쿨루 수바릴레이는 술탄의 보병대인 예나체리 보다 군사적으로 더 중요한 위치를 담당했으며, 예나체리보다 높은 대우를 받았다.

강제 징집된 그리스도 교 아이들 중 재능이 뛰어난 이들은 시동(ic oglani)으로 뽑혀 토프카프 궁전에서 교육을 받게 하고 나머지는 시파히(지방 기병대)의 집으로 보내져 터키어와 이슬람교를 배우면서 예나체리로 키워졌다. 시동으로 뽑힌 아이들은 궁전학교에서 2~7년 동안 백인 환관장(Kapi Agasi)의 관할 하에 엄격한 교육을 받았다. 궁전학교에 들어온 시동은 먼저 이슬람교에 관해 배우고 교수(Hocas) 아래서 일반교육을 받았다. 이들은 재능에 따라서 정치, 종교, 혹은 군사에 대해 교육받았다. 이들은 터키어, 페르시아어, 아랍문학, 마상술, 창술, 궁술, 레슬링, 체육, 음악 등을 배웠다. 궁전학교에서는 시동들을 정직하고 충성스럽고, 예절이 바르며, 자기 자신을 제어할 수 있는 인재로 키웠다. 교육이 끝나면 시험을 쳐 시동들 중 가장 재능이 있는 사람들은 술탄의 궁전에 들어가 관리로써의 길을 걷고 나머지는 카푸쿨루 수바릴레이의 장교나 일반기병이 됐다.

카푸쿨루 수바릴레이는 6개의 연대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가장 먼저 창설된 연대는 좌 용병연대(Ulufeciyan-i yesar), 우 용병연대(Ulifeciyan-i yemin), 좌 외인연대(Guerba-i yemin), 우 외인연대(Guerba-o yesar)로 이 4개의 연대가 궁정기병대의 핵심을 이루었다. 나머지 2개의 연대는 무사연대(silahtar), 와 종자연대(sipahi oglan)로 이들은 카푸쿨루 수바릴레이 내에서도 엘리트로 여겨지는 연대였다. 콘스탄티노플 점령 당시에는 2500명가량의 카푸쿨루 수바릴레이가 있었으나, 16세기 말에는 그 수가 6000명 남짓으로 늘어났다.
각 연대는 ‘케투다 예리’가 지휘했다. 카푸쿨루 수바릴레이에는 전장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운 전 예나체리, 아랍인, 페르시아인, 쿠르드 이슬람교인 이 편입되기도 했다.


나. 예나체리:

술탄의 정예 보병대. 14세기 중반 무라드 1세가 오스만 투르크 최초의 정규보병대인 예나체리를 창설했다. 예나체리가 창설될 무렵에는 1000명 남짓의 예나체리가 있었으나, 점차 그 숫자가 늘어 15세기 중반에는 1만 여명 술래이만 1세(1520~1566년)치하에서는 2만 명의 예나체리가 있었다. 예나체리는 공성부대만이 철갑옷을 걸치고, 대부분은 갑옷을 입지 않았다. 15~16세기의 예나체리는 합성궁을 주 무장으로 애용했으나, 15세기 중반부터 총을 도입하기 시작해서 16세기 말에 이르면 대부분의 예나체리가 머스켓 총으로 무장했다. 예나체리는 거의 모든 무기를 능숙하게 사용할 수 있게 훈련받았으며, 서유럽의 집단사격전술과는 달리 예나체리는 개개인의 사격능력에 의존하는 전술을 썼다. 예나체리는 능숙한 사수로 이름이 높아서 달이 뜬 밤에도 총으로 목표물을 명중시킬 수 있을 정도였다.

강제 징집돼온 그리스도교 아이들 중 시동이 되지 못한 아이들은 외국인아이(Acemi Oglan)로 분류돼 예나체리로 키워졌다. 이들은 맨 처음 시파히의 가정이나, 귀족의 가정, 항구, 궁전주방에서 5~7년간 하인으로 일하면서 이슬람교와 터키어를 배우고, 기본적인 군사훈련을 받았다. 이후 대부분은 훈련대(Acemi Oack)에 입대해 수학교육과 군사훈련을 받았다. 재능이 뛰어난 이들은 예나체리의 엘리트 사단인 보스탄시(Bostanci, 정원사)사단에 바로 입대하거나, 제독부에 입대했다. 혹은 지원부대인 병기부(Ortas Cebeci), 포병대(Topcu), 대포 수송대(Top Arabaci)에 편입되기도 했다. 16세기 말부터 예나체리의 아들이나 이슬람교 자유민 이 예나체리에 지원할 수 있게 되었고, 17세기 중반에는 그리스도교 아이들을 강제징집하는 데브시르메 제도가 붕괴됐다.

예나체리는 3개 사단 196개 연대로 편성돼 있었다. 예나체리의 주요 3개 사단은 세마아트(Cemaat, 집회)사단, 볼루크(boluk, )사단, 세그멘(Segmen, 사냥꾼)사단이었다. 세마아트 사단은 예나체리 사단 중 가장 규모가 큰 사단으로 101개의 연대로 구성되었는데, 술탄의 호위대인 왼손잡이 연대(Solak ortas)와 술탄의 70개의 영지와 이스탄불의 해안방어를 담당하는 엘리트 사단인 정원사 사단(Bostanci)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세마아트 사단의 예나체리는 새로 점령한 지역에 주둔하기도 했다. 볼루크 사단은 예나체리 사단 중 두 번째로 큰 사단으로 61개의 연대로 구성돼 있었다. 볼루크 사단에는 예나체리 사령관의 호위대 및 이스탄불의 성문을 지키는 주둔군이 포함돼 있었다. 세그멘 사단은 34개의 연대로 구성돼 있었다.

예나체리 총사령관(Yeniceri Agas)은 예나체리 출신으로 궁전학교에서 고등교육을 받은 인재 중에 선발됐다. 예나체리 총사령관의 권한은 막강해서 술탄이나 술탄이 임명한 전군 총사령관만이 예나체리 총사령관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었다. 예나체리 총사령관 이외에 예나체리의 사령부에 속한 장군들은: 세마아트 사단 사령관(Kul Kahyast)과 세크멘 사단 사령관(Sekbanbasi), 이스탄불의 주둔군과 예나체리 훈련대를 관할하는 이스탄불 사령관(Istanbul Agasi), 수석 시종장(Ocak Imami), 재무장(Beythulmalci), 징집장(Muhzir Aga), 술탄의 궁전에서 예나체리 총사령관을 대표한 사령관대리(Kahya Yeri), 예나체리의 훈련을 총괄한 훈련대장(Talimhanecibasi), 예나체리의 처벌과 사형을 담당한 감옥소장(Azar Basi), 예나체리의 행정업무를 총괄한 서기관(Yeniceri Katibi) 등이 있었다.

예나체리의 기본부대 단위는 100~3000명으로 구성된 연대(Orta)로 코르바시(Corbaci, 국 만드는 사람)가 연대를 지휘하고, 아스시 우스타(Asci Usta, 주방장)가 부연대장을, 아스시(Asci, 요리사)여러 명이 아스시 우스타를 보조했다. 그 아래로는 하사관을 맡은 전령(Cavus)과 기수(Bayraktar)가 병사들을 지휘했다. 병사들은 경력에 따라서 3등급으로 나뉘었는데 신입병(Eskinci)이 가장 아래계급이고, 전공을 세운 병사는 고참병(Eskinci)으로 승진했다. 병사들 중 가장 높은 계급은 연금병(Oturak)으로 이 계급에 오르면 결혼이 허가되고, 민간인 직업을 병행할 수 있었다. 연금병은 대게 전투에는 참가하지 않았다.


다. 포병대와 지원부대:

오스만 투르크 제국은 14세기 말 대포를 도입해, 메메드 1세와 무라드 2세 치하에서 상당한 규모의 포병대를 보유했다. 1440년에는 오스만 군도 서서히 야전포를 갖추기 시작했다. 오스만의 거대한 공성포는 1422년 콘스탄티노플에서 나타나기 시작해 15세기 중반에는 450kg 의 포탄을 1마일 가량 날릴 수 있는 대포가 등장했다. 15세기 중반의 오스만 군이 보유한 대포는 200~300문 정도였다. 15세기 중반의 공성포는 하루에 10발 정도의 포탄을 발사할 수 있었다. 이 시기의 오스만의 포병대는 서유럽의 검은색 연기가 나는 화약보다 우수한 흰색 연기가 나는 화약을 사용했다. 오스만 군의 포병대는 공격하기 바로 전에 다수의 대포가 차례대로 대포를 쏘고, 대포를 장전할 때는 엄폐물 뒤에 숨어 자신을 보호했다. 그 다음에는 중간 크기의 대포가 적군의 요새를 약화시키고, 마지막으로 거대한 공성포가 적의 요새에 결정타를 가하는 방식으로 포격을 가했다. 오스만의 대포는 나무로 만든 지지대를 높이거나 낮추어서 대포의 사정거리를 조정했다. 17세기에 이르면 오스만 군은 포도탄(일종의 산탄)과 폭죽 등을 대포에 쓰기 시작했다.

오스만 투르크 제국군의 포병은 대부분 중앙군 카피쿨루 군단에 속해 있었다. 콘스탄티노플의 점령 이후 메멧 1세는 카피쿨루 군단의 포병대를 포병연대(topcu ocagi)와 대포의 수송임무를 맡는 수송연대(top arabacilari)로 나누었다. 1575년 카피쿨루 군단의 포병연대의 포수는 1000명 정도였고, 17세기 말에 이르면 포수의 숫자는 5000명 이상으로 늘어난다.

포병대를 보조하는 부대는 구포부대 , 수류탄부대, 땅굴부대, 폭탄부대를 포함하고 있었던 야전공병연대(humbaracilar), 와 공성공병연대(lagimcilar)가 있었다. 이 중 야전공병연대는 구포(곡사포)와 유리나 쇠로 만든 폭탄, 유리나 청동으로 만든 수류탄을 주 무기로 사용했다. 공성공병연대는 군대 내의 노동자들을 통제했고, 공성 시에는 땅굴을 파고 폭약을 성벽이나 성문에 폭약을 설치하거나, 참호를 만드는 등의 임무를 맡았다.

이 밖에 카피쿨루 군단에 속한 지원부대는 병기부대(Cebecis), 물 배급부대(Saka), 장인부대(Karhane)가 있었다. 병기부대는 600여명의 기술자가 무기의 수리, 무기의 보급 등의 임무를 맡았다. 물 배급부대는 카피쿨루 군단의 의무병으로 전투 중 부상당한 병사를 후방으로 옮기거나, 부상자를 돌보는 일을 했다. 장인부대는 34개의 중대로 이루어진 기술자 부대로 검 제작공, 양털 제작자, 초장이, 화살 제작자, 포목상, 편자 제작공, 비단공, 약사, 구리 제작자, 주석 제작공, 빵 만드는 사람, 약사, 신발공 등을 포함하고 있었다.


2.봉건기병 시파히: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봉건기병. 오스만 군에서는 봉건기병 시파히가 군의 주력병력이었다. 15~16세기에는 4만 명 안팎의 시파히가 전쟁에 참가했다. 시파히는 보통 중무장을 했으나, 중앙군의 기병대 카푸쿨루 수바릴레이에 비하면 가벼운 무장을 했다. 시파히는 보통 체인메일에 주요부분을 철판으로 덧댄 메일 플레이트 갑옷, 화살, 창, 방패, 칼 등으로 무장했고, 보조 무기로는 메이스를 애용했다. 서유럽의 기사처럼 영지 티마르(timar)가 내려져 기병으로써의 무장을 갖추게 했으나, 서유럽의 기사와는 달리 시파히에게는 자신의 영지에 제한된 권리만을 행사할 수 있었다. 시파히는 자신의 땅을 직접 경작해야 했고, 자기 영지 주변의 주민들에게 돈을 주고 물건을 사야했으며, 국가에서는 시파히에게 봉급을 주지 않았다.

시파히는 소아시아 혹은 유럽지역에 정착했는데, 시파히가 하사받은 영지는 연간 수입 750에스퍼(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은화)에서 2만 에스퍼 사이의 영지를 가지고 있었다. 시파히는 영지에서 나오는 세금의 일부와 영지에서 나오는 농산물 중 5분의 1~3분의 1 정도를 받았다. 영지의 규모에 따라 각 시파히는 일정한 숫자의 기병을 데리고 참전해야 했는데 연간수입 1500~3000에스퍼(소아시아 지역) 혹은 6000 에스퍼 (유럽지방)이상의 영지를 가지고 있는 시파히는 잘 무장한 기병인 종자와 경무장을 한 노예기병 한 명씩을 거느리고 참전할 의무가 있었다. 부유한 영지를 가진 시파히는 15명의 기병을 이끌고 참전했고, 최대 50명의 기병을 이끌고 참전하는 시파히도 있었다.

전쟁에 참가하는 시파히는 1000명의 기병을 지휘하는 점호장(alay bey)밑에 편입됐다. 점호장은 시파히 중 가장 높은 계급으로 각 속주의 기병을 소집하는 임무를 맡았다. 점호장 밑에는 기수(beyrak-dar)와 수위장(cavus) 점호장을 보좌했다. 한 속주에서는 보통 1000~3000명의 시파히를 소집할 수 있었는데 각 속주의 총독(sancak bey)은 휘하에 1~3명의 점호장을 거느리고 있었다. 총독은 20명 이상의 시파히로 구성된 친위대를 데리고 다녔으며, 속주의 행정업무와 군사를 총괄했다. 이와 더불어 총독은 각 주요도시에 경찰총장(subashis)을 임명했다. 경찰총장은 전시에는 100~수백명의 병력을 지휘했다. 100명을 지휘하는 사람은 중대장(ceri-bashi)로 주로 부유한 영지를 가진 시파히가 중대장을 맡았다. 중대장 아래로는 10명을 지휘하는 십장(ceri-surucus)이 있었다. 전쟁이 일어나면 시파히 10명 중 1명이 후방에 남아 세금징수를 하고 영지의 방어를 맡았다.


3. 속국: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속국들은 오스만 군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다. 특히 오스만 제국의 초기인 14~15세기에는 오스만 군중 속국의 병사가 차지하는 비율이 높았다. 오스만 제국 의 속국 대부분은 주요도시가 오스만 제국에게 점령당한 다음에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종주권을 인정했다.

속국 귀족의 자제들이나 터키 귀족의 자제들은 술탄의 호위 기병대인 무테페리카(Muteferrika)에 소속돼 오스만 제국식의 교육을 받으면서 인질의 역할을 했다. 발칸 반도의 여러 기독교 속국들은 그리스도 교 5~10가구에 1명의 기독교 중장보병 보이누크(voynuk)를 제공했다. 속국의 중장기병은 기독교 군주가 자신의 직할부대를 제공하거나, 오스만 제국에서 면세를 받거나 영지를 하사받은 이들이 중장기병으로 참전했다. 기독교 속국에서는 최대 5만 명의 병력차출이 가능했다.

크림 칸국의 타타르 족은 궁기병을 오스만 제국에 제공했다. 대부분의 타타르 부족민은 가난했기 때문에 대게 보병으로 참전했다. 타타르 족의 칸은 칸의 직할지에서 뽑은 20개 중대의 말탄 총병을 보유하고 있었다. 칸의 직할부대 이외에 타타르 족 귀족들의 병력이 타타르 군의 다수를 차지했다. 코사크 인은 4개의 바퀴가 달린 무거운 마차를 연결해 요새를 만들고 그 위에 가벼운 대포와 총병을 배치하는 야전요새를 애용했다. 코사크 인은 전투용 카누를 이용해서 우크라이나 의 강을 지배했다. 동부 소아시아의 쿠르드 족은 1514년 오스만 제국의 속국으로 편입돼 기병을 제공했다.

중동의 속국들은 대부분 자국의 방위목적 이외에는 오스만 제국에 병력을 파견하지 않았다. 대부분 중동의 속국들은 반독립 상태를 유지해 소수의 예나체리를 제외하고는 오스만 제국군이 주둔하지 않았다.

속국은 또한 무기를 만드는 자원을 제공했다. 세르비아에서는 대포를 제작해 오스만 제국에 상납하고, 몰도비아, 트란실바니아, 왈라키아에서는 머스켓 총을 만드는 나무, 짐말, 주석, 초석, 밧줄등을 오스만 제국군에 상납했고, 쿠르드 족, 이라크, 레바논에서는 심지, 유황, 초석 등을 오스만 제국군에 상납했다.


4.비정규군:

오스만 군의 비정규군은 크게 보병 지원병인 아자브(azab, 젊은 남자), 적군 영토를 약탈하는 목적으로 쓰인 경기병 아킨지스(akinjis, 약탈자), 각 지방의 방위를 책임지는 각종 경비대 등으로 나뉘었다.

아자브는 전쟁기간 동안 보병으로 지원한 병사들로, 전쟁이 끝나면 언제든지 군대를 떠날 수 있었다. 오스만 제국에서는 최대 4만 명의 아자브를 동원할 수 있었다. 아자브는 주로 활로 무장을 했고, 칼을 갖고 있거나 막대기로 무장한 아자브도 있었다. 아자브는 아군이 전투 진형을 짜기까지 화살로 적군을 묶어두는 임무를 맡았다. 원래 아자브는 전쟁중에만 봉급을 받았으나, 14세기말에는 항상 봉급을 받으면서 요새에 주둔하는 아자브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16세기부터는 국경지방의 속주에 사는 모든 이슬람교인이 주둔군 아자브나 해군 아자브로 징집될 수 있었다. 베야지드 2세 치하에서 국경지방의 20~30가구의 주민들이 한 명의 아자브를 지원하는 제도가 정착됐다.

아킨지스는 원래 투르크 족의 전사 출신으로 이루어졌던 궁기병 부대로 1362년부터 국경지방의 주요 전략 요충지에 배치돼 적국의 영토를 약탈하는 임무를 맡았다. 전쟁 중에 아킨지스는 본대보다 먼저 적군의 영토에 진출해 적국 영토의 약탈, 적군의 통신망 교란, 정찰, 주요도로 확보 의 임무를 맡았다. 평상시에는 적국의 약탈로부터 국경지방을 방위했다. 아킨지스는 점령이 어려운 산악지대에 투입되거나, 점령이 어려울 경우, 반란군이나 적군을 상대로 게릴라전을 벌였다. 아킨지스는 투르크의 족장들이 지휘했고, 아킨지스는 족장에게 봉급을 받거나, 약탈로 생계를 이어갔다. 오스만 제국은 최대 3만 명가량의 아킨지스를 동원할 수 있었다. 아킨지스는 10단위로 구성돼 있었고(10명, 100명, 1000명),보통 2마리의 말을 끌고 다녔다. 아킨지스는 창과 활, 세이버로 무장했다.

오스만 제국에는 아자브와 아킨지스 외에 각 지역을 방위하는 비정규군이 존재했다. 고눌루얀(gonulluyan, 지원병)은 각 지방에서 주요도로의 순찰과 요새의 방위를 맡은 지원병으로 기병과 보병을 소유하고 있었다. 마르톨로(martolo)는 발칸 반도에서 세금을 면제받으면서 지방군으로 주둔한 부대였다. 고눌루얀과 마르톨로는 대게 소규모로 수백명 이하의 병사들이 지방의 경비 군으로 활약했다. 마르콜로와 고눌루얀 중 일부분은 갑옷을 착용했으며, 창, 칼, 방패, 총 등의 무기로 무장했다.


5. 해군:

오스만의 해군은 동지중해의 사라센과 비잔틴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수백 년간 오스만은 이탈리아 및 서지중해 국가들과 비슷한 형태의 해군을 보유하고 있었다. 오스만 해군의 주요임무는 육군을 수송하고 가능하면 해안포격으로 육군을 지원하는 것이었다. 또한 오스만 해군은 제국의 방대한 해안선을 방어하고, 기독교 해적의 안식처였던 지중해 여러 섬을 장악했다.

오스만 투르크 제국은 14세기 초반 카라시 공국과 다르나넬 공국을 점령하면서 비잔틴 제국 출신의 선원과 투르크 전사들로 이루어진 소규모의 해군을 창설했다. 15세기 중반부터 오스만 제국은 동지중해에서 베네치아에 맞설 수 있는 강력한 해군을 건설했다. 1470년 오스만 해군은 92척의 겔리 선을 보유해 흑해의 제해권을 장악했다. 15세기 말에 이르면 오스만 해군에 소속된 배는 500척에 육박했다. 1499~1502년 베네치아와의 전쟁에서 오스만 제국은 60척의 3단 겔리 선, 30척의 푸스타에 선, 3척의 대형 겔리선, 2척의 대형 카락선, 18척의 소형범선, 보급선 127척에 총 선원 수 3만 7천명을 동원했다. 오스만이 베네치아와의 전쟁에 참가시킨 2척의 대형 카락은 1080톤에, 2층 갑판, 탑승인원 1000명의 대형선이었다.

오스만은 1421~1430년 경 해전에 대포를 도입해 15세기 베네치아 인들은 오스만 제국의 배들이 그들의 배보다 더 낳은 대포로 무장하고 있다고 기록했다. 15세기 오스만 제국의 겔리 선은 대형포로 무장하고 소형 노선인 푸스타에 선은 다수의 소형포를 장착했다. 오스만 해군은 화약무기를 도입해 상대적으로 적은 수의 함선으로 홍해와 아라비아 만, 인도양의 재해 권을 장악하고, 포루투갈와 에디오피아의 해군을 견제할 수 있었다. 1511년 오스만 제국은 홍해함대를 현대화했고, 1525년에는 수에즈에 1530년에는 아라비아 만의 바르사에 해군기지와 조선소를 건설했다. 이어 알제리와 튀니스를 합병해 오스만의 해군은 서유럽을 위협했다. 17세기에 이르면 오스만의 지중해 함대는 북 아프리카 함대, 이집트 함대, 에개해 함대가 포함돼 있었다.

오스만의 해군은 오스만의 해양 속주에서 지원했다. 겔리 선의 선원들은 그리스, 알바니아, 북아프리카, 달마티아, 터키 해안가에서 징병됐다. 겔리 선의 노 젓는 사람들은 전쟁포로나 범죄자가 주를 이루었다. 이외에도 범선을 전문으로 하는 선원들은 칼욘실러(kalyonciler, 갈레온 선원)라고 불렸다. 15세기의 오스만 해군은 선박 수에서 서유럽을 압도했고, 강력한 함선과 대포를 보유하고 있었으나, 선원의 질이 서유럽보다 떨어졌다.

오스만 제국은 강에서 활약하는 함대도 보유하고 있었는데 이 중 다뉴브 함대는 60~200척의 소형선을 보유하고 다뷰브 강에서 병력수송, 대포운반, 육군의 지원 등의 임무를 맡았다. 모라바 함대는 80~100척의 겔리선, 겔리엇, 보트로 기병과 보병을 수송했다. 300명의 상비군이 항상 모라바 함대를 지키는 임무를 맡았다.


6. 전략, 전술:

오스만 제국은 많은 정복전쟁을 치루면서 점차 계획적이고, 유연한 전략을 수립해갔다. 전쟁은 그 전 해의 10월~11월에 계획을 시작해서 다음 해 8~9월에 전쟁을 시작했다. 군 사령부는 이전 전투의 기록과 옛 군인들의 목격담을 조사하고, 막대한 양의 보급품을 준비했다. 지방군의 동원령은 12월에 내려져 동원령을 받은 지방군은 이스탄불, 베오그라드, 코르틴 등의 도시에 집결했다.

전쟁이 시작되면 술탄의 깃발이나 재상의 깃발이 토프카피 궁전에 세워졌다. 진군로에 있는 도로와 다리는 수리되고 다리가 없는 강에는 다수의 거룻배를 띄워 다리를 대신했다. 오스만 군은 해질 때 행군을 시작해 정오에 야영지를 세웠다. 행군 중에는 먼저 경기병대가 정찰을 하고 중무장한 엘리트 기병대가 그 뒤를 따랐다. 기병대의 뒤로 보병대와 기술자 부대가 따르고 부대의 측면과 후위는 기병대가 보호했다.

오스만 군은 보병이 중앙을 방어하는 동안 기병이 적군의 측면이나 후방을 강습해 섬멸하는 방어적인 전술을 애용했다. 16세기 초 오스만 군은 경기병대가 적군을 아군의 보병대 앞으로 유인해 오면 아자프와 예나체리, 포병대가 적군을 사격하고 기병대가 적군의 측면을 돌파하는 전술을 썼다. 예나체리의 전술은 일단 적군을 사격하고 쐐기꼴의 진형을 이루어 적군에게 돌격하는 방식을 썼는데, 당시 예나체리의 돌격은 무적으로 알려졌다.

오스만 군은 전투마차를 야전요새로 애용했는데, 각 마차는 2마리의 노새가 끌고 각 마차에는 총병과 작은 대포가 배치됐다. 마차의 밑에는 탄약상자를 넣고 필요하면 마차 여러 대를 체인으로 연결해 야전요새를 만들 수 있었다.

오스만 군이 공성전을 치룰 때는 궁병과 총병이 성을 향해 사격을 가해 적군이 성 뒤에 숨게 함과 동시에 사다리 부대가 성벽으로 접근했다. 장기간의 공성전을 치룰 때는 깊은 참호를 파 계속 성벽 쪽으로 서서히 전진하고 30~100명의 지원자로 이루어진 각 공성부대가 제한된 임무(가령, 성문 밑에 폭약을 설치한다던가)를 수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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