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태교도와의 대립과 이슬람교의 확립

 


메카 후기 메디나 초기 이슬람 법은 유태교도나 기독교 및 다른 일신교도에 대해 종교상의 관용을 베풀었다. 모하메드는 자기에게 계시된 것이 자기 이전의 일신교 예언자들에게 내려진 계시를 확인하는 것이라 믿어, 유태교도를 계시받은 경전의 백성으로 생각, 그 신앙을 유지하게 한 것이다. 이것은 다른 일신교도들도 자신을 예언자로 인정해 줄 것으로 예상한 결과이다. 메디나로 이주한 모하메드는 처음 유태교도와 맺은 협약인 <메디나 헌장>으로 유태교와 이슬람공동체인 움마의 공존을 인정했다.


또 유태교의 제도를 채택하여 메디나 초기시대엔 이슬람 교도가 예루살렘을 향해 예배토록 하고, 유태교의 1월 10일(속죄일) 단식일의 종교행사도 받아들인다. 또 예배일이 금요일인 것도 유태교의 안식일(토요일) 준비와 상통된다. 이런식의 친유태교 정책은 모슬렘의 계전 백성의 여자와의 결혼을 허용하고 (여자의 경우 비이슬람교와의 결혼은 금지됨) 그들이 먹는 음식도 먹을 수 있게 허용한다.


이런식으로 모하메드는 유태교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려 했으나, 유태교는 정치적으로는 이에 동의한 흔적이 있으나 종교적 문제에선 거부했다. 유태교의 반대는 모하메드의 유일신 사상 때문이 아니라, 그가 참으로 신의 계시를 받은 존재인가, 예언자인가 하는 부분에서 그들의 성서해석 결과 그를 인정치 않으려 한데 있다.


결국 메디나 이주후 2년째인 624년 유태인이 모하메드를 그들의 구약성서에 나오는 예언자 계통의 한 예언자로 인정치 않자, 모하메드는 그때까지 예루살렘을 향하던 예배방향을 메카의 카바로 향하게 하고, 바드르 전투 후엔 1월10일 행하던 단식을 대신해 라마단(9월)달에 1개월간 단식을 실시케 한다. -라마단 단식은 아바다드(종교적 의무 행위)의 하나로 그달에는 일출에서 일몰까지 모든 음식의 섭취를 금한다.


이렇게 유태교로부터 거부를 받게되자 모하메드는 유태교에 반격을 가한 것이다. 아브라함이 세운 카바신전으로 예배방향을 바꾼 것은 이슬람교를 아랍의 전통위에 확립시켜 세계적 종교를 이룩하려는 것이고, 유태교와의 결부를 부정하는 것이다. - 카바를 향함은 아랍 다신교의 신전으로서가 아닌, 알라의 집으로서의 카바의 의미를 강조한 것이다.


바드르 전투 후 카바신전의 건설자로서의 예언자 아브라함의 의의가 코란에 강조되어 계시되는데 내용은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스마엘과 함께 카바신전을 건설하고 이를 알라께 봉납했고 그자손(아랍인) 가운데 한사도가 나오길 간청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모하메드가 일어난 것이 아브라함과 이스마엘의 소원이 이루어진 것으로 볼수 있게 만든다.


아브라함은 유태교도 기독교도 아닌 하니프-순수한 종교의 신도, 순수한 일신교도-이며 그의 신앙은 이슬람이었고 모하메드의 가르침도 아브라함이 믿는 일신교의 부활이라 여기며, 코란은 그 계시가 모세나 예수의 가르침과 동일하다고 주장한다. -이슬람의 뜻은 신에대한 절대복종이란 아랍어에서 나왔는데 이 어휘가 코란에 처음 나타난 것은 바드르 전투 이후의 일로, 유태교와의 대립이 시작되면서이다.


순수한 아브라함의 종교복원으로서의 이슬람이란 성격은 모하메드의 구약성서에 관한 역사적 객관적 지식에서 도출되었다고는 볼수없다. 대신 코란은 유태교와 기독교가 본래 옳은 성전을 잘못해석하고, 그 일부를 조작하거나, 감추었다고 비난함으로써 유태교의 성서의 전통적 해석에 의거한 비난을 다른차원에서 되받아쳤다.


카바신전을 알라의 집으로 간주하고 아브라함을 그 건설자로 여기는 것은 당시 메카와 그 주변 주민의 일반적 통념이었다. 모하메드는 이런 통념을 이용하여 이슬람교를 아랍의 민족감정과 민족적 전통위에 정착시키는데 성공하여 이슬람에 의한 아랍 민족의 통합과 모하메드 자신에대한 쿠라이쉬 부족의 적의를 약화시키는데 기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이슬람에 애니미즘의 요소를 남겼다는 오해와, 8세기 중엽까지 이슬람을 아랍 민족종교로 곡해하게한 중요원인이 되었다.


7.한다꾸(참호) 전투와 모하메드의 말년

 


627년 3월 쿠라이쉬 부족은 우후드전투에서 일단 바드르 전투의 복수를 했지만 모하메드와 그 움마를 지상에서 말살할 수 없었기 때문에 다시 약 7천 5백명의 부족연합군으로 메디나 대 포위작전을 행한다. 이에 대응하여 모하메드는 약 3천명 정도의 군사를 모집 메디나의 적의 공격에 노출되는 모든 곳에 참호를 팠다.- 한다꾸 전투


연합군은 2주나 포위를 했으나 참호를 못넘고 메카로 돌아간다. 쿠라이쉬 부족은 모든 재력을 원정에 소비하였으나 포위작전의 실패로 그 위신을 상실하고, 메카와 메디나의 균형은 메디나로 기울게된다.


모하메드는 연합군이 철수하자 곧 유태교도인 꾸라이자 부족을 처형하고 628년엔 1천 4백명의 이슬람교도를 이끌고 카바신전 순례에 나섰다. 쿠라이쉬 부족은 2백명의 기병대로 이를 저지하려했다. 결국 후다이비야에서 향후 10년간의 휴전과 다음해의 메카순례를 약속함으로 둘은 타협을 한다.-후다이비야 조약


모하메드는 주위 여러부족을 제압하거나 우호관계를 수립하는 한편 유태교도를 메디나로부터 완전 추방한다. 그후 630년 1월 일만 대군을 이끌고 메카에 진격하여 전의를 잃은 쿠라이쉬 부족으로부터 항복을 얻는다. 무혈입성한 이슬람군은 카바신전의 우상과 메카시내의 모든 우상을 파괴하여 이교(異敎)의 시대를 종식시킨다.

아랍의 유력한 쿠라이쉬 부족을 정복한 소문이 퍼지자 많은 부족이 메디나에 사절을 보내 맹약을 맺고 이슬람교를 수용한다.


630년 모하메드는 3만 대군을 인솔하여 타부끄 원정을 감행하기도 했는데 이는 이슬람의 북방정책의 일환으로서, 이슬람교의 위용과시가 목적이었다고 추정된다. 그후 632년 모하메드는 순례를 마치고 수개월후 세상을 뜬다.- 이별의 순례라 한다.-코란에 순례에 대한 규정은 자세히 나오지 않으나 이때의 선례로서 순례양식이 답습되고 있다.

 

 이슬람의 종파를 중심으로 재정리


우리나라 사람들은 이슬람이 모두 같은 신조와 의례를 행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이것은 큰 잘못이다. 순니이슬람에는 4개의 법학파가 있으며 또 정치적으로 보아도 세사람의 칼리파가 동시에 존재하여 수백년간을 대치해 온 일도 있었다. 따라서 이슬람이라는 건물 속에는 수많은 주거용 아파트가 들어 있는 것이다. 따라서 무슬림 가운데도 청교도, 개혁주의자, 신비주의자, 원리주의자(fundamentalist) 및 광적 신자 등이 있는 것이다. 세계의 큰 종교에서 보는 바와 마찬가지로 이슬람에도 일반 평신도들이 갖는 정통적인 중심개념이 있는 것이다. 그들은 스스로를 순니 무슬림이라고 부르고 전 세계 무슬림의 83%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나머지 20% 미만의 소수파 가운데에도 16%의 시아 무슬림, 그리고 나머지 다른 종파들이 있다.


1. 순니 무슬림

 


역사적으로 보면 순니들은 무슬림공동체 즉 움마의 순나(sunnah 관행)를 추종하는 사람들이다. 순나란 꾸란, 하디스 및 예언자와 정통칼리파들의 선례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들은 자신만이 정통무슬림이라 자처하면서 그들의 꾸란과 순나해설 또 그들의 종교적 입장과 행위가 이슬람의 주류가 되어 왔다고 본다. 4대 법학파 (하나피, 말리키, 샤피이, 한발리)의 추종자는 이슬람전통의 주류에 속하는 순니라고 믿는다.

이슬람 정통파는 상당한 정도의 견해 차이를 모두 그들의 교리에 포용해 왔지만 이슬람 역사의 초기에 그들도 순니 공동체에 수용하기에는 너무나 어려운 신학적인 문제점이 발생했다. 너무나 이단적이고 이질적인 분파들이 나타나 이슬람 역사속의 정치적, 종교적 및 사회경제적인 흐름을 조화 내지 융합시키려는 세력을 비난하고 나섰다.


2. 카리즈(카와리즈)파


무함마드가 사망한 후 25년째 되던 해에 칼리파 우스만이 살해당하자 예언자의 사촌이며 사위인 알리가 그 뒤를 이었다. 그가 살해범의 체포에 주저하자 우스만의 6촌인 다마스커스 총독 무아위야가 아랍의 씨족 전통에 따라 복수를 외치며 반기를 들어 무슬림끼리의 내란에 돌입했다. 이 제1차 내란 중에 무아위야의 평화협상 제의에 직면한 알리파는 주전파와 협상파로 갈라졌다. 이러한 분열에서 전열을 가다듬기 어려운 알리가 부득이 협상에 응하나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주전파는 절대신 알라만이 중재를 할 수 있고 인간은 현 상황에서 계속 싸워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알리의 진영을 떠나니 이것이 이슬람 역사상 최초의 종파 카리즈파(탈퇴자)이다. 후대에 카리즈파의 주장은 이것을 더욱 선명하게 요약하였다. 즉 마음을 달래는 것은 혀가 아니고 바로 행동에 있다고 주장했다. 카리즈파는 전투적인 청교도요 행동주의자여서 법을 그들의 손으로 집행하고자 했다. 그래서 지하드(jihad 성전)를 여섯번째 󰡐신앙의 기둥󰡑으로 삼았다. 그들은 자신들의 정당성을 너무나 확신한 나머지 그들과 생각을 달리하는 무슬림을 살해할 정도였다. 알리 자신도 이들에 의해서 661년에 살해당했다.


카리즈파는 메카의 부족 꾸라이쉬의 자손만이 칼리파가 될 수 있다는 순니파의 전통적 견해를 비난하고 무슬림이면 누구나 칼리파가 될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다만 여기서 고려되어야 할 점은 독실성이어서 심지어 건강하고 총명한 흑인노예도 칼리파 지위에 오를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들의 만민 평등주의적 입장과 아랍귀족층에 대한 적개심 때문에 베드윈과 비아랍계 무슬림 가운데 상당한 추종자를 확보할 수 있었다. 그래서 카리즈파는 우마위야조의 초기에는 눈에 가시와 같은 존재였으나 후에 무정부적인 그들의 태도 때문에 분파작용이 일어나 저절로 약화되었다.


이 파의 추종자는 오늘날까지 미미하게 존속하고 있다. 알제리와 튀니지의 베르베르 지역, 동아프리카의 탄자니아 및 아라비아반도의 오만에 그 추종자를 볼 수 있다. 카리즈파의 맹신적인 청교도 정신만 아직까지 순니무슬림 속에 남아, 18세기에 이르러 아라비아반도에서 와하비(Wahhabi) 운동의 발생 동기가 되어 오늘날 사우디 왕가의 모태가 되었다.

 

3. 시아(쉬아)파

 


칼리파를 알리의 가문에 되돌려주려는 운동으로써 시작된 시아이슬람은 곧 독특하고 구별되는 종교적 색채를 띠게 되었다. 물론 이 운동의 생성과정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재구성하기는 아직까지 힘들지만 가장 중요한 요인은 알리의 자손을 제거하려는 우마위야조(661-750)와 압바시야조(750-1258)의 조직적인 움직임이다. 시아파는 우마위야조의 창시자 무아위야가 알리와 파띠마의 장남인 하싼(Hasan)을 독살시켰다고 믿는 반면에, 순니들은 그가 자연사를 했다고 주장한다.

 


하싼의 동생 후세인(Husayn)이 680년에 이라크의 쿠파 근처의 도시 카르발라(Karbala)에서 반란을 일으켰으나 참혹하게 살해되었다. 그의 부상은 치명적이었고 갈증에 목말라 했으나 그에게 물 한 모금도 주지 않았고 결국 그의 목을 잘랐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의 제삿날인 이슬람력의 정월(Muharram) 10일은 시아파의 중요한 종교적 공휴일이다. 이 날은 단식종료절과 희생제 때의 평화로운 명절행사와는 달리 신자들은 길거리에 나와 행렬을 지어서 후세인의 고통을 몸소 체험하려고 자위행위를 하기가 예사다. 시아파 전승에 따르면 후세인의 아들과 손자도 독살당했으며 그 후 몇 세대나 이 박해가 계속 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시아파의 핵심은 이러한 정치적 책략의 희생자들을 반신격화된 순교자로 만드는 데 있었다. 이러한 변형은 중근동의 전통종교로 자리 잡아온 영지주의적(gnostic) 또는 이원론적 가르침의 영향 아래 일어난 것은 명백하다. 영지사상이라는 단어는 그리스어로 󰡐신에 관한 지식󰡑을 뜻하는 영지(靈知)에서 왔으며 구약성서를 그리스어로 번역할 때 이 용어가 사용되었다. 과정을 뜻하는 영지사상은 종종 일종의 마술에 참여하여 그 마술로 신을 알게 되고, 눈에 보이는 세계에서 보이지 않는 움직인다는 것이다. 서기 2,3세기 경에 알렉산드리아에서 활약한 신플라톤학파는 플라톤의 관념철학을 영지주의적 색깔로 바꿔 놓았다. 영지주의는 또한 인간에게 신-구약성서나 꾸란과 같은 위대한 예언서의 구절에서 자구적인 의미를 넘어 깊숙히 파고들어 그 속의 비밀스러운 의미를 파악하는 능력을 갖게 한다고 약속했다.


이원론적 형상은 모든 유일신적 종교에 나타나 있다. 특히 기독교에서는 천국의 완벽성과 인간사회의 부패상을 대조하고 있으며 또 페르시야의 사산조(226-641) 시대에 유행한 조로아스터교(Zoroasterianism)와 마니교(Manichaeism) - 둘다 그 창시자의 이름에서 유래 - 에서는 선과 악, 빛과 어둠 및 불과 흙이라는 양극의 관점에서 우주를 해석하여 이 양극적인 두 힘이 인간의 영혼을 사로잡으려 다투고 있다고 보았다.


이슬람이 아닌 다른 종교에서 여러가지 신앙으로써 시아파는 혼합적신앙(syncretistic faith)이 되었다. 즉 이슬람이 아닌 외적요소에서 빌린 것을 새로운 합(synthesis)으로 융화시켜 나타난 구심적 인물이 알리, 후세인 및 그들의 자손들이라는 믿음이다. 그들은 이맘이라고 불리워졌는데 그 의미는 순니에서 집단예배인도자를 지칭하는 이맘보다 훨씬 격이 높은 의미로 사용되었다. 19세기의 한 시아파 신학자는 그 속성을 아래와 같이 요약했다.


󰡒꼭 믿어야 할 점은 이맘들은 모두 창세기에 빛에서 창조되었고 신이 주는 은총과 지식은 모두 그들을 통하여 오는 것이며 그들을 통하여 우주는 생동하고 그 존재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그들은 또한 예언자 무함마드를 제외하고는 모든 관점에서 가장 탁월한 존재여서 비록 인간적 욕구와 기능을 가지고 있지만 다른 모든 예언자들보다 우위에 있는 것이다. 그들은 또한 흠없이 완벽하여 크든 작든 그들 상호간에는 대등하여 덕, 지식 및 능력을 타고 난 것이다. 그들은 출생 때 이미 보통 인간처럼 태어난 것이 아니고 예언자처럼 할례되어 태어난 것이다.󰡓


이맘은 믿는 자들에게 꾸란구절의 비교적(秘敎的)인 속의미를 밝혀주어 그들을 어둠에서 광명으로, 타락에서 은총으로 이끄는 것이다. 시아파가 이맘에게는 완전무결성이 있다고 믿는 것은 순니파가 칼리파에게 기대하는 능력을 훨씬 능가하는 것이다. 시아파는 이슬람 속에 신과 인간 사이에 중재자의 개념을 도입하였는데 이것은 무함마드의 엄격한 유일신보다 기독교적인 예언자는 동시에 이맘이어서 이 세상 어느 곳 어느 시대에도 이맘은 신의 명증(明證)으로 항상 존재한다고 본다.

 


시아파는 메카와 메디나의 성지순례에 못지않게 이맘들의 무덤 또는 그 친척과 심지어 그 옹호자의 무덤에까지 순례하는 것이다. 특별히 신성시하는 곳은 카르발라에 있는 후세인의 무덤인데 수많은 시아파들이 이곳에 묻혀지기를 원하여 그 소원을 성취하기 때문에 이미 오래전부터 이 도시는 죽은 이의 도시라는 별명을 얻고 있다.

 


우리와 같은 비무슬림세계 사람에게 비치는 시아이슬람은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운 신앙 즉 죽음, 순교 및 슬픔에 휩싸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오직 한쪽 측면에 지나지 않는다. 다른 한쪽에는 <숨은 이맘>인 구세주의 사상이 들어 있어 희망을 안겨주고 있는 것이다. 대부분의 시아무슬림은 열두 이맘의 존재를 인정하고 있다. 즉 알리, 후세인 및 그의 자손이 계승하여 12번째 이맘에 까지 이른다. 제 12대 이맘은 어린 나이에 압바시야조의 당시 수도인 이라크의 사마라시에 볼모로 잡혀가 그곳에서 873년(일설 878년)에 사라졌다. 그는 지상에서 보이지 않게 되었지만 결코 죽은 것은 아니어서 <숨은 이맘>으로써 오랜 은둔생활을 하고 있을 뿐이다. 그는 언젠가 지상에 마흐디로 나타난다고 믿는다. 중세 시아무슬림들은 마흐디를 다음과 같이 보고 있다.


󰡒그의 이름과 출생을 이미 절대신이 예언자 무함마드에게 알려 주었으며 그의 임무는 현세가 억압과 불의에 충만해 있는 것처럼 정의와 공정으로 군림하도록 할 것이며 그때 예배로 이끄는 부름은 이 세상 구석구석까지 들릴 것이고 종교는 완전히 신의 것이 되어서 신의 찬송을 받게 될 것이다. 그는 (제12대 이맘) 올바르게 인도된 마흐디이며 그에 관해서는 예언자께서 이미 언급하신 것처럼 그가 이 세상에 다시 그 모습을 나타낼 때에는 마리아의 아들 예수도 지상에 내려와서 그의 뒤에 서서 경배 올릴 것이다.󰡓


시아이슬람에 대한 그후 역사기록에는 이상에서 예측할 수 있는 것처럼 많은 인물들이 스스로 <숨은 이맘>인 마흐디로 자처하면서 등장하였다. 시아파는 순니파의 박해에 짓눌려 살아왔기 때문에 자신의 신분 즉 시아파임이 드러날 경우 자신과 가족의 생명 또는 재산에 손실을 입을 부득이한 처지에 놓일 때 순니파 또는 다른 파의 소속으로 자신을 위장할 수 있다. 이것을 타끼야(taqiyah)라 부른다. 대부분의 시아파는 이것을 교의로 삼고 있다.

이처럼 시아파의 특징은 이맘의 무결점성, 이맘의 부활, 타끼야(믿음의 가장), 마흐디 사상을 들 수 있다.


4. 열두 이맘파와 자이드파

 


시아파의 85%를 이루고 있는 열두 이맘파(약칭 이맘)는 오늘날 무슬림세계의 중요한 소수파를 형성하고 있다. 이란에서 열두 이맘파 시아이슬람은 16세기 이후 국교가 되어 국민의 90% 이상이 믿게되어 절대다수를 이루었고, 이라크에서는 인구의 과반수 이상을 점유하고 있으나 정치적 사회적 영향력에 있어서 순니파무슬림에 비하여 열등한 지위에 있기 때문에 사회적 갈등 분위기가 꿈틀거리고 있다. 레바논은 프랑스의 영향권 아래서 박해받는 종파의 피난처로써의 기능을 해왔기 때문에 오늘날 30% 이상의 인구가 이 분파에 속하나 그들의 대부분은 일반적으로 빈곤층의 대명사가 되고 있다. 파키스탄과 인도에서도 열두 이맘파시아는 전체 무슬림인구의 10%에 해당되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모로코의 왕가는 8세기 후반부터 현재까지 칼리파 알리의 자손이나 국민의 지배적 법체계는 순니파의 4대 법학파의 하나인 말리키이다.

 


시아무슬림 모두가 열두 이맘파에 속하는 것은 아니다. 자이드파는 열두 이맘 가운데 후세인의 아들로 끝나는 제4대 이맘까지만 인정한다. 그 이름은 후세인의 손자 자이드(Zayd)에서 유래했다. 즉 자이드를 포함한 다섯 이맘에게만 마술적 능력을 인정한다하여 다섯 이맘파라고도 부른다. 그는 할아버지처럼 반란을 일으키다가 이라크에서 전사했다. 자이드파의 교리는 알리 이후 모든 칼리파의 합법성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을 제외하고는 순니와 구별될 게 거의 없다. 비록 이맘파 즉 칼리파는 하싼이나 후세인의 자손 가운데서 나와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그들의 이맘은 완전무결성이나 인간과 신 사이의 중재적 기능을 지녔다고 보지 않아 단순히 왕이나 최고 종교지도자에 불과하다. 9세기말경부터 최근까지 자이드파는 남부아라비아의 예멘지방을 지배했으나 그 인구의 다수는 순니무슬림으로 남아 있다. 자이드파의 이맘이 예멘을 1000년이나 지배했으나 1962년에 군사쿠데타가 일어나 쫓겨나가고 이 나라는 공화국이 되었다.

 


5. 이스마일파와 암살단파


자이드파와는 대칭을 이루는 시아분파 가운데 가장 많이 논쟁의 여지가 있고 또 매력적인 것이 이스마일파 즉 일곱 이맘파이다. 그들은 열두 이맘파가 제6대 이맘 자아르 알 싸디끄(765죽음)의 장남인 이스마일이 술을 마신다고 비난하여 그의 동생 무사(799년 죽음)를 제7대 이맘으로 모신데 반대하고 이스마일을 옹립한데서 비롯한다. 이스마일파는 이스마일의 자손만이 <숨은 이맘>이 될 수 있다고 선언하고 이스마일의 계승권을 옹호하기 위해 끈질긴 투쟁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그들은 시아파를 통합적 교의로 이끌었다. 특히 영지주의적 의례에서 이원론적인 사항을 많이 도입했다. 이스마일파는 글자 그대로를 믿는 대중에게는 초보적 신조만을 포교했으나 무함마드가 받는 계시의 표면적 의미 속을 뚫고 들어가 진정한 내적 의미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은 사람들에게는 아주 정밀한 해석을 통해 포교했다.

 


정치적으로 보면 이스마일파는 압바시야 칼리파를 반대해서 격렬한 선전투쟁을 진전시켜 이 칼리파들을 타도하려 했다. 한때 그들의 목적은 달성되기도 했다. 이스마일이 사망한 후 100년경인 9세기 말에 그들은 압바시야조가 점차 쇠약해가는 틈을 이용하여 이라크에서 농민과 도시노동자의 불만을 선동하여 맹렬한 선교투쟁을 벌였다. 이스마일파와 당시 연합한 세력은 전투적인 까르마트(Carmathian, 그 지도자 Qarmat에서 그 이름이유래)였다. 이 파는 이라크와 시리아를 쑥대밭으로 만들고 나서 아라비아반도를 휩쓸었다. 심지어 메카순례객들을 공격했고 더구나 929년에는 메카도 점령했다. 놀랍게도 까르마트파는 카아바의 신성한 <검은 돌>을 빼내어 수백리 밖에 팽개치기도 했다.

 


이스마일파의 또 다른 분파는 북아프리카에서 아랍족과 베르베르족 사이의 만성적 긴장상태를 이용하여 권력을 잡았다. 909년에 <숨은 이맘>을 은신처에서 데려와 마흐디로 선언하니 곧 파띠마조(909-1171)의 초대 칼리파 우바이둘라 알 마흐디(909-934)이다. 튀니지의 시실리섬에까지 그 영역을 넓혔다. 969년에 그들은 이집트를 정복하고 옛 수도 푸스타트 근처에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여 그 이름을 까이라(al-Qahirah 승리자)라 하니 곧 오늘날의 카이로의 시작이다.

 


이곳으로 제국의 수도를 옮기니 곧 경제적 문화적 중심지가 되었다. 이 새로운 수도에서 이 칼리파조는 커다란 도서관을 운영했고 아즈하르(al-Azhar)성원을 건립했다. 이 성원은 곧 신학의 배움터가 되어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으로 자랑하고 있다. 이 칼리파조는 11세기 초에 그 국력이 전성기에 이르러 팔레스타인과 시리아도 병합하니 이라크의 압바시야조는 그 그늘에 들어가는 듯 했다. 그러나 11세기말에 내분이 일어났고 더구나 셀죽 터키의 침입과 십자가원정과 같은 외환도들이 닥쳐 파띠마조의 국력은 쇠잔했다. 그후 파띠마조는 점차 수그러들어 카이로 근교에만 그 권위가 미치다가 1171년에 아이유브조의 살라 알 딘(1138-1193)이 카이로를 점령하여 이 조를 멸망시킨 뒤 이스마일파를 억압하고 순니이슬람을 다시 이집트와 시리아의 국교로 회복시켰다.

 


그러나 이스마일파는 파띠마조의 종말과 함께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진 것은 아니다. 이 파에 속하는 한 페르시아인 지도자는 11세기 말에 파띠마조와 결별을 선언하고 카스피아해 남쪽에 있는 산속에 그 추종자와 함께 난공불락의 요새를 만들었다. 그들의 이름은 암살단파(Assassin 이 명칭은 대마초를 뜻하는 아랍어단어 al-hashishin 에서 유래하여 십자군을 통하여 유럽 각국어로 들어감.)로 알려졌다. 그들은 대마초를 복용함으로써 천당의 쾌락을 미리 맛보게 되고 임무수행에 있어서는 초인간적 용기를 갖게 된다고 보았다.


현대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그들이 대마초를 복용했다는 비난은 근거가 없는 것으로 나타났지만 정치적 살인을 감행했다는 사실은 확실한 것으로 증명했다. 암살은 그들에게 있어서 종교의례적 행동이어서 가해자는 항상 단검을 사용하였고 도피하려고 시도하지 않았으며 암살대상자는 대체로 고위직의 인사였다. 최초의 희생자는 셀죽조의 술탄 말리크샤(1072-1092)의 재상으로 유명한 니잠 알 물크(1091 죽음)였다. 암살단파는 셀죽조가 12세기에 들어와 쇠약해지는 틈을 이용하여 페르시아의 변방지역과 서부 시리아의 산악지역에 새로운 요새를 만들었다. 십자군이 두려워한 것은 시리아의 암살단파와 그 우두머리인 󰡐산속의 쉐이크(sheikh al-jabal)󰡑였다.

 


암살단파가 테러행위를 무기로 삼은 것은 극단적 소수파의 저항전술로 이해된다. 그들의 최종목적은 그들이 옹립하고 있는 <숨은 이맘>의 통치체제를 전영역에 확립하는 것이다. 그 전제조건은 순니이슬람을 파괴하는데 있었다. 페르시아에 있었던 암살단파의 쉐이크는 <숨은 이맘>의 지시를 받아 행동한다고 주장했다. 특히 <숨은 이맘>은 쉐이크에게 이슬람의 다섯 기둥과 이슬람성법을 멀리 할 것을 지시했으므로 모든 사람은 새로운 계시를 받아들일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 라마단의 단식 기간중에 행한 큰 행사에서 신자들은 메카에 등을 돌린 채 예배를 올리고 오후에는 또 특별히 마련된 연회에 참석했다.

 


암살단파가 기대한 것은 실현되지 않았다. 순니이슬람은 쓰러지지 않았고 <숨은 이맘>은 그 자신의 통치영역을 확립하지 못했던 것이다. 13세기에 들어와 암살단파 내에서도 내분이 일어났다.마침 페르시아를 침입한 몽고군에 의해서 그곳의 암살단파는 섬멸되었고 시리아의 암살단파도 아이유브조의 살라 알 딘을 계승한 이집트와 시리아의 맘룩조(노예왕조 1250-1517)에 의해서 제거되었다. 현재 남아 있는 이 파의 추종자는 페르시아에서 인도로 도망한 자칭 한 이맘의 지도아래 19세기와 20세기에 그 모습을 나타내고 있지만 그 근원은 모호한 편이다. 이들은 그 지도자를 페르시아 왕가의 칭호인 아가 칸(Agha khan)이라 부르고 있다. 그러나 이들은 더 이상 암살을 자행하지 않으며 주로 사업에 종사하여 상당한 성공을 거두어서 다른 무슬림의 부러움을 받고 있다.


6. 알라위파(󰡐Alawis)와 드루즈파(Druzes)

 


이스마일파 선교활동의 영향으로 다른 유사한 종파가 많이 생겨났다. 이러한 류의 종파는 비이슬람적 요소를 너무 많이 받아들였기 때문에 종종 다른 종교로까지 분류된다. 이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것이 알라위파와 드루즈파이다. 알라위파(Alawis,알리의 숭배자들)는 시아파의 알리에 대한 숭배를 극단화시켜 그를 신격화했고 또 이스마일파의 대중을 위한 단순한 신앙과 정밀한 종교의례의 이분법을 더욱 극단화시킨 것이다. 이 파는 무함마드 이븐 누사이르(Muhammad ibn Nusayr)가 9세기 말에 창시했기 때문에 그의 이름에서 일명 누사이리파라고도 한다. 알라위파는 고대중근동의 여러 이교도적 의례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그 예로는 성스런 나무숲을 숭배하고 기독교의 의례도 받아들여 심지어 부활절과 크리스마스도 축하하는 것이다. 그들은 영혼의 전생을 믿어서 영혼이 지상의 굴레를 벗어나려면 일곱 번의 화신을 해야 한다고 보았다.

 


오늘날 알라위파의 주된 주거지는 시리아이며 그곳 총인구의 약 1%를 점유하고 있다. 주로 시리아 해안지역에 있는 자발 알라위지역에 집결되어 살고 있다. 터키에서는 알레비라고 한다. 그들은 오랜 기간 박해당해 온 소수파여서 씨족의 결집, 불만 및 반란이 그들의 대명사가 되고 있다. 그러나 제2차대전 후 시리아 육군사관학교가 모든 시리아인에게 문호개방을 했을 때 알라위파의 청년들이 이 기회를 이용하여 대거 입학했다. 1971년에 이들 가운데서 장군으로 승진한 하피즈 알 아사드가 첫 알라위파로 비순니무슬림 가운데서는 시리아 역사상 처음으로 대통령이 되었다. 알라위파의 믿음에 영향을 받은 터키계 부족의 종파는 키질바쉬(Kizilbashi, 붉은 두건을 쓴 사람들)로 알려져 있다.


드루즈파의 기원은 11세기의 이스마일파 포교자였던 다라지(Darazi)에게 거슬러 올라간다. 그의 추종자는 파띠마조의 칼리파 하킴(Hakim)을 <숨은 이맘> 이라고 주장했다. 괴짜이었던 칼리파는 1021년의 어느 날 저녁 카이로 근처에서 사라졌는데, 살해당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드루즈파는 그들의 신앙생활을 지키고 안전하게 살기 위해서 남부레바논의 산악지대에 그 피난처를 발견했고 후에는 남부시리아의 고원지대인 자발 드루즈지역에서 그 주거를 찾아냈다. 그들은 비밀 엄수라는 물신숭배를 가졌는데 심지어 그 추종자들에게도 그들의 성서를 감추고 또 새로운 개종자를 받아들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 추종자의 배교행위까지 허용한는 것이다. 박해를 피하기 위해서 그들은 자신의 신앙을 부정하고 그들 통치자의 종교 주로 순니이슬람과 레바논의 기독교 종파인 마론파(Maron)의 추종자인 것처럼 가장도 하는 것이다. 그들의 존재가 서방세계에 알려진 것은 1830년대였는데 그때 레바논의 통치권이 오스만 터키에서 무함마드 알리의 이집트에게 몇년간 넘어갔으므로 이 기회를 이용하여 서구학자들이 그들의 성서를 연구할 기회를 가졌기 때문이다.

 


드루즈파는 그들이 일신론자인 것을 자랑하고 있는데 그것은 곧 칼리파 하킴을 일종의 신의 화신인 우주적 존재의 현시로써 간주하기 때문이다. 여하튼 그들은 그들의 <숨은 이맘>과 절대신 사이의 일치성보다 이스마일파의 이스마일이나 시아파의 알리와의 일치성보다 더 완벽하다고 주장한다. 드루즈파의 교의와 종교적 관행의 자세한 내역을 보면 무슬림의 기준과는 매우 다르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드루즈파에서는 일부다처제가 금지되어 있고 여성들의 지위는 남성들과 대등하게 취급되고 영혼이 전생한다는 믿음은 널리 보급되어 있다.

 


드루즈파는 비록 순례(Hajj)시기에 축제를 열고 있지만 금식이나 메카순례는 하지 않는다. 그들의 집단예배는 금요일 정오에 열리지 않고 목요일 저녁에 열리며 그 장소도 중심지역의 성원에서가 아니고 산간의 작은 사당에서 여는 것이다. 드루즈공동체는 두 계층으로 나뉘어져 있다. 하나는 덜 비밀스러운 정기 주간예배에만 참석하는 무식자층이고, 다른 한 계층은 현자들로서흰 터반을 머리에 두르고 금욕적이고 모범적인 생활을 이끌어 나가야 한다. 그러나 드루즈파는 아무리 비천한 가문에 태어나도 현자가 될 수 있으나 현재 일부 지주 가문만 이 공동체의 사회적, 정치적 지도층이 되고 있다. 이 공동체의 봉건적 사회구조와 비밀엄수전통으로 비교적 안전하고 또 산악생활의 습성으로 드루즈파는 수세기 이상을 살아남을 수 있었다. 오늘날 드루즈파의 신자수는 약 25만 가량으로 추산되며 주로 레바논과 시리아에 살고 있다. 또 극소수는 이스라엘 통치 아래 있는 하이파(Haifa)근처의 마을과 골란고원에 살고 있다. 이들은 이스라엘 통치하에서 아랍인보다 더 당국에 잘 협조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7. 바비파(Babis)와 바하이

 


인간의 내면적 생활을 비교적으로 파고드는 이스마일파의 교리와 <숨은 이맘>사상에 대한 시아파의 믿음은 근대에 들어와서도 이슬람의 이단적 분파조성에 산모 구실을 하고 있다. 그 대표적인 것이 19세기 중반경에 이란에서 나타난 바비파이다. 이란 중남부의 도시 쉬라즈에서 설득력있는 신학자가 나타나 스스로를 <밥>(아랍어로 문이란 뜻이며 진리의 관문으로도 상징됨)이라고 자처했는데 1000년 전에 시아파 이맘의 이름 높은 제자에게도 이 명칭이 사용된 적이 있었다.

 


마침 1844년은 이슬람력에 의하면 12번째 이맘이 873년 사마라에서 사라진지 천년이 되는 즈음이어서 <밥>의 교의에는 영지주의적 요소도 상당히 포함되어 있는데 예를 들면 <눈으로 볼 수 없는 세계>와 숫자 19의 신성성(神聖性)에 대한 믿음이다. 그래서 <밥>의 달력에 따르면 일년은 19개월이며 매달은 19일로 구성되어 있다. 당시 이란에서 <밥>의 교의는 수많은 개종자를 획득하여 타락된 기존정권의 붕괴와 함께 열두 이맘파 시아의 국교적 지위마저 위협할 지경에 이르렀다. 결국, 정부의 <밥>운동에 대한 진압은 가혹하여 <밥>을 1850년에 사형시키고 그 추종자를 대량 학살했다.


그러나 <밥>의 사상은 그의 죽음과 함께 끝나지 않았다. 살아남은 대부분의 추종자들은 그의 제자 바하울라(Bahaullah, 알라의 광채)를 지도자로 삼았다. 그는 스승으로부터 독립하여 독자적인 교의를 펼치기 시작했다. 즉 구약성서의 예언자 아담, 아브라함뿐만 아니라 다른 지도자들 즉 조로아스터, 예수 및 무함마드 등으로 이루어지는 낡은 예언자의 순환기는 <밥>과 함께 끝났다고 가르쳤다. 따라서 바하울라의 추종자인 바하이(Bahai)들은 그들의 신앙만이 진실로 보편적이어서 낡은 예언자적 종교의 가르침뿐만 아니라 부처와 공자도 존경하여 그들의 가르침도 포괄하였다고 주장했다. 바하이들은 <밥>의 달력을 그대로 받아들여 매달(19일)마다 집단예배를 올리고 무슬림의 라마단달 금식처럼 한달(19일)간의 금식을 행하며 또 하루에 3번씩 몸을 깨끗이 씻은 후 예배를 올린다. 즉 무슬림의 그것과 유사한 반면에 더욱 간결화시킨 감이 있다.

 


바하이교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폭넓은 관용성과 사회개선에 참여하려는 강력한 책임의식이다. 기이하게도 시아파의 초대 이맘 알리의 말을 인용하여 사회개선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즉 사적인 문제는 인간사(human sphere)에 속하나, 사회적 관심사는 모두 신에게 속한다. 바하이들의 <사회적 관심사>라는 말 속에 여성의 평등권, 교육의 기회균등화 및 국제평화의 달성 등이 포함되어 있다. 원칙적으로 바하이는 평화주의자요, 양심적인 거부자 및 절대금주론자이며 육식보다는 채식을 또 금연을 더 선호한다.


역대 이란정부는 <밥>의 추종자를 박해한 것처럼 바하이들을 국민단합에 유해한 번역자로 보고 무자비할 정도로 박해하였다. 또 1979년 이슬람혁명 후에도 박해의 고삐는 늦추어지지 않고 있다. 따라서 많은 바하이들은 자신의 신앙을 숨기거나 일부는 이민을 떠나고 있어서 이란 내에서의 그 수를 어림잡기는 힘드나 대체로 50만에서 100만 정도로 추정하고 있다. 그들의 국제적 본부는 이스라엘의 하이파에 있으며 아크레의 근교인 카르멜(Carmel) 산에는 밥의 거대한 무덤이 있으며 바하울라는 망명생활을 하다 1960년대에 죽었다. 오늘날 전세계에 138개의 바하이공동체가 있으며 미국에는 바하울라의 아들이 선교에 나서고 있어서 시카고 근처 윌메트(Wilmette)에는 웅장한 바하이성원을 두고 있다. 한국에도 지식층을 중심으로 건물을 빌려 상당수의 바하이 추종자들끼리 모이고 있다.

 


무함마드가 7세기에 이슬람을 포교할 때의 주장과 바하이들이 20세기에 그들의 신앙을 선교할 때의 공통된 주장은 중근동에서 옜날부터 영혼의 진리임을 자처하고 나온 수많은 종교의 계승자라는 점이다. 이러한 모방성 때문에 무슬림들은 바하이들을 단순한 이단자로서 뿐만 아니라 이슬람과는 전혀 관계없는 거짓종교로서 규탄한다. 그렇지만 바하이교는 이슬람역사상 정통파와 이단파의 갈등과 마찰 속에서 다듬어진 요소가 그 발생의 계기가 된 점은 사실이다. 이러한 요소 가운데 <밥>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것은 수피(굂fi) 사상으로 알려진 신비주의적 믿음과 그 관행의 결합관계이다. 수피주의는 이슬람역사에 있어서 오히려 시아 사상보다 더 큰 비중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한국에는 바하이파 추종자가 2만 5천명이다. 이상과 같은 이슬람의 종파가 주로 산재하는 곳을 살펴보면 와하비파(사우디아라비아, 카타르), 자이드파(예멘), 시아파(이란, 이라크, 레바논 등), 알라위파(시리아, 터키), 드루즈파(레바논, 시리아, 이스라엘)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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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아 이슬람의 종말론-숨은이맘(Mahdism)

숨은 이맘, 알 마흐디

 

시아 이슬람의 큰 특징은 죽음의 종교라는 사실이다. 죽은 이맘들을 숭배하고, 그들의 무덤을 순례하며 추모함으로 자신의 신앙심을 표현한다. 가장 큰 종교적 절기가 후세인의 순교를 애통해 하며 불의에 대한 저항 정신을 기념하는 아슈라라는 절기일 뿐만 아니라, 시아 이슬람(열두 이맘파)의 종주국인 이란의 유명한 모스크는 대부분이 이맘의 무덤이거나 친인척의 무덤과 함께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현재 무슬림들의 정파별 분포도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시아 무슬림들은 이슬람 역사속에서 늘 박해 받는 소수파였다. 그들의 믿음과 종교적 관행들을 마음대로 표현할 수 없었으며 늘 핍박의 개종의 대상이었다. 이들은 자신의 암울한 현실을 극복하는 방법으로 중재자 이맘의 무덤을 다니면서 자신들의 현실적 아픔과 동일한 핍박으로 죽은 예언자 혈통의 이맘의 아픔과 동일시하며 함께 애통해 하고 아파한다. 또한 신과 인간의 중재자인 그들을 섬기며 신성시 하는 것을 통해 신으로부터 복과 함께 새로운 세상으로 변화를 구한다.

 

이 변화의 핵심은 숨겨진 마지막 12번째 이맘인 마흐디의 재출현이다. 이 재림 사상은 시아 이슬람에서 종말론적 세계관의 핵심이다. 인도자라 불리는 무함마드 알-문타자르 (-마흐디)에 대한 역사는 신비롭고 기적적인 모습을 띤다. A.D 868년에 태어난 알-마흐디는 아버지이자 11대 이맘인 하산 알-아스카리가 자신이 7살 되던 해(A.D 874)에 죽으면서 12대 이맘으로 등극하고, 바로 그의 모습이 사라졌다고 전해진다.

 

시아 무슬림들은 그가 현재 이라크 사마라에 있는 모스크 아래의 동굴에 스스로 숨었으며, 이 동굴은 밥 알-가이바 혹은 "은폐의 문"으로 불리는 문에 의해 봉인 되었다고 믿고 있다. 이런 이유로 이곳 사마라의 모스크는 시아 무슬림들에게 가장 성스러운 장소 중에 한곳이며, 지금도 신실한 무슬림들은 여기에 모여서 12번째 이맘이 속히 나타나기를 기다리며 기도한다.

 

숨겨진 이맘에 관한 중심 교리는 은폐와 재림의 원리이다. 은폐에 대한 믿음은 신이 무함마드 알-마흐디의 목숨을 보전시키기 위해서 사람들의 눈에서 숨겼다는 것을 믿는 믿음이다. 순니 무슬림의 계속되는 박해와 위협으로부터 보호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으며, 신은 그가 없어진 874년 이후로 그의 생명을 계속 보호하고 있다. 그리고 결국에는 신이 마흐디를 세상에 다시 보낼 것이고, 인간을 생명의 길로 인도하기 위해 재림할 것이라는 믿음이다.

 

은폐는 소은폐기와 대은폐기라는 두 단계로 나뉘어져 있다. 소은폐기 동안은 그의 대리자를 통해서 인간과 지속적인 의사소통을 하였다. 단지 몸만 숨겨진 상태에서 영적인 지도력이나 빛으로 인도하는 리더쉽 등은 그의 대리자들을 통해서 그대로 행사 되었다.이 기간은 4명의 대리자를 거치면서 70여년간 지속 되었다. 그러나 순니무슬림 정권의 위협이 심해지면서, 은폐의 단계는 대은폐기로 들어가고, 지금에 이르고 있다. 대은폐기가 되면서 인간과 직접적인 의사소통은 없어졌지만 여전히 영적 리더로서의 지위를 가진다. 하지만 이 시기는 무슬림들의 입장에서는 영적으로 비극적 시기이다. 12번째 이맘은 세상 빛의 중심이었지만 이 은폐기는 이 불을 가리고 있는 인간에게는 암흑기를 의미한다. 시아의 세계관으로는 비극적인 시기이자이맘을 그리워하는 시기이다. 시아 무슬림들은 이들을 구원으로 인도할 마지막 이맘이 속히 오기를 지속적으로 갈망한다.

 

그러나 숨은 이맘은 결국에 그의 은폐에서 벗어나 세상에 나타날 것으로 믿는다. 그의 나타남은 신실한 신자들에게는 미래에 일어날 가장 중요한 사건이다. 이 귀환은 세상 말기에 마지막 심판이 행해지기 직전에 올 것으로 예상한다. 이 귀환에서 이맘 마흐디는 악을 심판하는 정의의 군대의 선두에 서서, 악에 대한 모든 전쟁에서 승리를 거둘 것이고, 그 후 그는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이슬람 제국을 건설해서 몇 년간 그 나라를 다스릴 것이고 그 후 자연사 한다고 기록되고 있다. 이때 가장 흥미로운 점은 이맘 마흐디가 오기전에 예수 그리스도가 미리 와서 이맘 마흐디를 돕는 다는 이론이다

 

사실 마흐디라는 말은 꾸란에서는 언급도 되지 않았던 말이다. 시아 이슬람에서 쓰는 하디스(무함마드의 언행을 기록함)에도 4번 정도 언급이 되었을 뿐이다. 그럼 어떻게 이런 종말론이 구체화 되었을까? 그것은 이슬람 이전에 아라비아 지역에 있던 유대교와 기독교의 종말론과 메시아관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 많은 학자들의 의견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심판의 사상이 이미 널리 알려져 있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또한 페르시아 지역의 특수성을 생각할 수 있다. 조로아스터교의 종말론과 페르시아 지역에서 번성했던 영지주의의 영향등으로 그들의 종말론을 구체화해 해 갔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시아에서는 A.D 940년 이후 지금까지를 대은폐기로 부르고 있다. ‘대은폐기동안은 직접적으로 마흐디와 의사소통하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이슬람의 가르침을 상세히 알고 있는 한 무리의 고위 성직자들이 지도권을 행사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으로 보고 있다. 이 사상은 후에 이란의 호메이니에 의해 벨리야테 파키(Velayat-e-Faqih)-이슬람 법학자 통치론-로 구체화 되었고, 1979년 혁명을 통해 지금의 이란의 정부 형태인 발전 시켰다.

 

새로운 시대를 열것이라는 희망을 심어 주는 마흐디즘은 또한 많은 나라에서 혁명의 단초를 제공하였다. 이슬람 역사 속에서 순니파에 대항하여 일어났던 많은 반란들은 카르발라 사건의 후세인의 저항 정신과 마지막 이맘의 재림에 대한 이론을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실제 19세기 후반에는 수단에서는 무함마드 아흐마드라는 사람이 구세주 마흐디를 칭하며 반란을 일으킨 적이 있다. 그는 1881년 이집트의 지배에 반항하여 반란을 일으켰고 수차례의 승리를 통해 1898년 까지 실제 마흐디 국가를 수립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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