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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 종려주일설교 : 예루살렘으로 향하시는 예수

 

 

 

제목 : 예루살렘으로 향하시는 예수

말씀 : 누가복음 18:31~34

 

3월에는 고난 주간에 이어 부활주일이 함께 있는 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느 때와는 달리 좀더 특별한 자세를 가지고 이 한 달을 생각하게 됩니다.

당시 초대교회에서는 부활주일을 앞에 두고 2~3일 동안 금식했다고 합니다. 이기간 동안 하루 한끼, 혹은 온종일 금식하면서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고 감사하며 경배했다고 합니다. 주후 4세기 경쯤 교회가 굉장히 부흥하고, 교회 제도가 제도화되면서 '사순절'이라는 것을 만들었습니다. 사순절은 예수님의 부활 직전 40일 동안을 특별한 방법으로 금식하는 절기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고난을 기념하기 위해 하루 한끼나  각자 정한 대로 40일 동안 금식하면서 그분의 고난을 묵상하고 기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중세기 종교개혁이 일어나면서 잃어버린 복음을 다시 찾고 교회가 새로운 모습으로 단장하기 시작하면서, 사실상 사순절이라는 구교의 형식적인 행사를 따르지 않게 되었습니다. 오늘날의 교회도 사순절이라 하여 특별한 행사를 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 반드시 기억해야 될 것은,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신 고난주간을 앞두고 우리의 삶이 좀더 경건하고 거룩해져야 겠다는 것입니다. 할 수만 있으면 욕심을 절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묵상하면서 그분의 은혜에 감사하는 계획을 세우고 생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오늘 말씀을 보면서 다시 한번 우리가 어떤 자세를 갖고 이번 한 달을 살아야 할 것인가를 성령께서 이끄시는 대로 생각하고 마음에 담을 수 있길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보아라, 우리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동안 예루살렘을 몇 차례 오르내리셨지만 이번 행차는 단순한 방문이 아님을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거기에 올라가면 선지자들이 이미 구약에서 예언하고 기록한 대로 인자가 이방인들, 즉 로마인들에게 넘기워져 희롱과 능욕과 침 뱉음, 그리고 채찍질을 당한 다음 결국 십자가에 죽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을 예언하십니다.

 

구약성경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가 어떻게 세상을 떠나실 것인가를 세세하게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시편 22편에서, 예수님은 사람과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당하여 사람들의 훼방거리와 백성들의 조롱거리가 될 것이고, 십자가에 매달려 수족이 못 박힌 채 죽게 될 것이며, 그분의 겉옷과 속옷을 제비를 뽑히게 될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사야 53장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허물과 죄 때문에 상하고 찔릴 것이며, 우리의 모든 죄악을 홀로 담당하게 될 것이라고 예언한 바 있습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가면 그 예언대로 십자가의 고난을 당한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 사건은 피할 수 없는 사건이거나 돌발적으로 일어날 사건이 아닙니다. 이는 수백 년 전부터 선지자들이 예언했던 각본대로 일어날 사건입니다. 곧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예수님이 하나님께서 정해놓으신 길을 따라 가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런 사실들을 제자들에게 미리 말씀하신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당시 제자들은 손에 칼을 들고 이스라엘을 로마의 압제에서 해방시켜 줄 메시야에 대한 환상을 갖고 있었습니다. 유대 나라에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파라다이스를 세울 수 있는 메시야를 꿈꾸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야 말로 그렇게 하고도 남음이 있는 능력자라고 믿고 따라 다녔습니다. 예수님께서 초자연적으로 역사하면, 로마로부터 이스라엘을 해방시킬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가신다고 하자 '지금이야 말로 그때가 왔구나!' 하고 마음으로 반겼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나는 예루살렘에 가면 이방인에게 넘겨져서 능욕과 침 뱉음과 모욕을 당하고 채찍질을 맞아 죽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따라서 칼을 손에 든 메시야를 꿈꾸던 제자들의 마음에 십자가를 등에 짊어지고 죽으시는 메시야란 도무지 받아 들일 수 없는 이야기인 것입니다. 이렇듯 자기들이 듣고 싶었던 이야기가 아니었기에 그 말씀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듣고 싶은 설교는 귀에 잘 들리지만, 듣고 싶지 않은 말씀은 아무리 큰 소리로 전해도 다 옆으로 새고 맙니다. 손에 칼을 든 정복자 메시야를 꿈꾸고 있는 사람에게 십자가에서 죽는 메시야에 대한 이야기가 들릴 리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제자들이 이것을 하나도 깨닫지 못하였으니'라고 말씀합니다.(34절)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미리 말씀하신 이유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아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자신이 십자가에 죽음으로 세상을 구원하는 일이었습니다. 십자가의 길 외에 세상을 구원하는 길이 없음을 예수님은 아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절대 복종하기로 각오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세상을 위해 생명을 내어 놓기로 작정하시고, 예루살렘을 향해 발을 옮기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10장 18절에 있는 말씀대로 예수님은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 스스로 십자가에 자기 몸을 맡기셨습니다.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그래서 예수님은 지금 예루살렘을 향해 올라가고 계신 것입니다.

 

마가복음을 보면 예루살렘을 향해 올라가시는 예수님과 제자들의 모습이 퍽 침울하게 그려져 있습니다. 예수님은 묵묵히 죽음의 길을 가십니다. 이어서 제자들이, 그들로부터 조금 떨어져 무리들이 따라 갑니다. 그런데 하나같이 그 뒤를 따라가면서 심히 두렵고 무서워했다고 말합니다.(막10:32) 여기에서 우리는 어둡고 가라앉은 분위기를 금새 느낄 수 있습니다. 앞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고 당하는 사람과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고 당하는 사람과는 천지 차이입니다.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를 세밀하게 내다보고 그것을 당하는 자는 그 비극을 겪기 전에 이미 2번, 3번 죽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바로 그런 분이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향해 한걸음씩 발을 옮겨놓고 계십니다. 십자가에 죽으시기 위하여 예루살렘을 향해 가시는 예수님을 보면서 무엇을 느끼십니까? 저는 먼저 '내가 큰 죄인이구나.' 하는 사실을 느낍니다. 예수님은 세상 죄를 지고 예루살렘으로 가십니다. 나의 죄를 짊어지고 예루살렘으로 가십니다. 그러므로 나는 죄 없는 예수를 죽인 죄인인 것입니다. 구약 시대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의 죄를 용서받기 위해 어린양에게 자신의 죄를 전가시키는 절차가 있었습니다. 먼저 제사장에게 어린양을 끌고 와서 그 위에 자기 손을 얹고는 자신의 모든 죄를 고백하는 기도가 끝나면 그 어린양을 제사장에 맡겼습니다. 그러면 이 어린양은 주인의 죄를 모두 짊어지고 제단에서 죽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속죄의 어린양이 되셔서 예루살렘을 향해 발걸음을 옮겨놓고 계십니다. 나의 검은 손을 그분의 머리 위에 얹고 내 모든 죄를 그분에게 뒤집어 씌우고는 내 대신 죽도록 예루살렘을 향해 밀어 내는 것이 우리의 입장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얼마나 큰 죄인입니까? 죄 있는 나를 대신하여 죄 없는 예수님을 죽음의 형틀에 밀어 넣는 우리 자신이 얼마나 큰 죄인입니까? 그러므로 저는 예루살렘을 향해 묵묵히 가시는 주님을 보면서, '내가 얼마나 큰 죄인인가? 죄인 중의 괴수구나. 정말 이것은 살 가치가 없는 무서운 죄인이구나.' 하고 느끼는 것입니다.

 

흔히 교회 안에서 보면, '죄' 또는 '죄인'이라는 말을 듣는 것을 거북하게 생각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죄라는 말을 듣는 것은 마치 죽음이라는 말을 듣는 것처럼 매우 불쾌하게 생각하고 우울한 반응을 보입니다. 교회를 다니는 분들 중 상당수가 '죄'나 '죄인'이라는 말을 교회에서 사용하는 상투적인 단어쯤으로 생각하고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립니다.

이 말은 고귀하고 품위 있는 모임이나 기쁨의 축제인 예배에서는 되도록 언급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세상에서 받은 상처로 하나님의 위로를 특별히 기대하면서 예배 드리는 사람들에게 죄, 죄인이라는 어두운 말을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게 여기는 목사님들이나 교인들도 많습니다. 사랑의교회와 같이 복음주의 입장에 굳건히 서있고, 양질의 성도들이 모이는 교회임에도 불구하고 아직 이런 말을 새겨 듣지 못하는 분들이 이따금씩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평생 가슴 아프도록 느껴보지 못한 채 예배를 드리는 분들이 계십니다.

 

이런 분들은 죄, 죄인이라는 말을 가급적이면 듣지 않길 원하고,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쉽게 인정하지도 못합니다. 뿐만 아니라 무슨 가책을 받을 만한 일을 했다 할지라도 그것을 자기 탓으로 돌리지 않고, 할 수 있으면 다른 사람이나 환경 탓으로 돌리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이런 사람들은 항상 자기가 다른 사람들에 비해서 선하다는 교만한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의 기준은 하나님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기준으로 삼아 내가 선하지 악한지를 판단해야 합니다. 그런데 자기 주변에 있는 사람과 비교하는 데서 우월감을 가지려는 태도는 출발부터 잘못된 것입니다.

 

어떤 목사님이 자신의 어렸을 때 경험을 이야기한 글을 소개합니다. 그 목사님이 어렸을 때 조금 개구쟁이였는지 자기 방 청소를 잘 하지 않았습니다. 아침마다 어머니가 들어와서는 눈을 부릅뜨고 화를 냅니다. "너 어떻게 방을 이 모양으로 정리하니? 침대는 이게 뭐니? 양말은 양말대로, 옷은 옷대로 어떻게 이런 식으로 정리하면 되겠어?" 하고 나무랐다고 합니다. 그러면 그 때마다 이 목사님은 주저하지 않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그래도 엄마, 내가 형보다는 나아요. 형 방에 한번 가보세요." 사실 형 방은 자기 방보다 훨씬 더 지저분합니다. 그래서 형과 비교하면 자기 방은 깨끗하다는 것입니다. 그 말을 듣고 어머니는 두말하지 않고, 아이의 팔을 끌고는 아래층에 있는 엄마 방으로 내려간답니다. 엄마 방에 가보면 침대가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습니다. 화장실도 깨끗하게 청소되어 있습니다. 무엇 하나 흐트러진 것이라고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리고는 엄마가 큰 소리로 "내가 네 방을 깨끗이 치우라는 것은 바로 이렇게 치우라는 거야. 네 형처럼 하라는 것 아니야. 이 방처럼 치우라는 거야." 하고 호통쳤다고 합니다. 그 목사님의 어린시절 경험에 비추어, 우리가 죄인이라고 말할 때 하나님의 기준에 맞추지 않고 날마다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의 기준을 맞추어 '나는 그래도 좀 선하다.'고 생각한다면 철없는 어린 애와 똑같다는 것 입니다.

 

하나님은 의로우십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십니다. 하나님은 거룩하고 의로우신 자기 자신의 기준에 맞추어 우리도 그만큼 의롭고 선하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의 기준에 맞추어 인정 받을 만한 선이라곤 하나도 없습니다. 똑 같은 사람들끼리 비교하기 때문에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깊이 인식하지 못할 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비교해야 됩니다. 하나님의 기준으로 볼 때 우리는 형편없는 죄인입니다. 죄 없으신 예수를 십자가에 밀어 넣고,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만큼 우리는 악한 죄인들입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깊이 인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자리에 계시는 많은 성도들 가운데 근본적인 변화를 경험해야 될 분들이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근본적인 변화란 철저한 죄인 의식을 갖는 것입니다. 이러한 철저한 변화를 위해선 십자가 앞으로 나아가야 됩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 앞에서 이 예수를 내가 죽였다고 고백하는 자리까지 가야 합니다. 그럴 때 나는 철저한 죄인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영적인 체험을 근본적으로 바로 할 때 비로소 그 믿음이 바로 서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성도들을 보면 이런 철저한 변화, 근본적인 변화를 체험하지 못한 채 교회 다니는 분들이 많습니다. 오늘 이 시간 성령께서 오셔서 우리의 마음을 감동해주시길 바랍니다. 예루살렘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시는 예수님을 보십시오.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나의 죄를 짊어지고 자기 몸을 십자가에 못박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묵묵히 향하시는 예수님을 보십시오. 그분을 거기에 가도록 한 자가 누구입니까? 바로 나입니다. 그러므로 나만큼 큰 죄인이 없다는 의식을 가질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네덜란드의 화가 램브란트(Rembrandt)를 기억할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장면을 화폭에 담았습니다. 그는 먼저 예수님을 그린 다음 그 주변에 예수님을 죽이라고 소리치며 그분을 십자가에 못 박는데 동조하는 군중들을 그렸습니다. 그런데 그 군중들 가운데 한 사람을 자기 얼굴로 그렸습니다. '이 군중 가운데 내가 있다. 내가 바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인 장본인이다.'라는 것을 그림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께 무릎 꿇고 기도했다고 합니다. '하나님이여,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못 박았습니다. 내가 예수를 못 박는 이 무리들과 한패가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나는 겉잡을 수 없는 슬픔을 가지고 대성통곡을 했노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도 이와 같은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나야 합니다. 내가 예수를 오래 믿었든, 늦게 믿었든 상관없습니다. 내가 얼마나 큰 죄인인지 한두 번쯤은 깊이 실존적으로 인식하고, 그것 때문에 괴로워하며, 그것 때문에 눈물을 흘리고, 그것 때문에 십자가를 부둥켜 안는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나야 됩니다. 이런 변화를 전혀 모른 채 신앙생활 하는 것은 십자가를 우롱하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성령께서 이 시간 우리 모두의 마음을 움직여 주시길 바랍니다. 그래서 '내가 얼마나 큰 죄인인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밀어 넣은 죄인이 아닌가? 죄인 중에 괴수가 아닌가?' 하고 깊이 인식하는 마음이 있을 때 은혜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으로 묵묵히 발걸음을 옮기시는 예수님을 보면서 또 무엇을 느끼십니까? 저는 하나님의 말로 다할 수 없는 은혜를 느낍니다. 너무나 크고 풍성하신 은혜, 내 입으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은혜를 느낍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면서 하신 일이 있습니다. 내 죄를 예수님께서 짊어진 대신 자기의 의를 나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 없는 예수님은 죄인이 되고, 죄 있는 나는 의인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신분이 이렇게 바뀌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의를 들고 서있는 우리를 하나님께서는 자기 아들로 영접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의만 가지고 있으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다고 인정하시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3장 18절에도 이러한 내용이 나옵니다. '그리스도께서 한번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우리를 불의한 자임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의인으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기 위해서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의로우신 분이기 때문에 그의 마음에 흡족한 의가 있는 자만을 받아들이십니다. 따라서 우리의 의로서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습니다. 오직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에게서 그 의를 얻을 때 가능합니다. 예수님의 의만 가지면 하나님께서는 만족하시고 우리를 받으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값없이 그 의를 주신 것입니다. 이 얼마나 큰 은혜인지 모릅니다.

 

맥스 루카도(Max Lucado) 목사님은 자신이 경험했던 작은 에피소드를 통해 예수님께서 주신 이 의의 은혜를 설명했습니다. 크리스마스를 맞아 교회 직원들과 함께 쿠키 파티를 하기로 했다고 합니다. 이 파티에 참석할 수 있는 자격은 각자 자기가 만든 쿠키 한 접시를 가지고 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누가 만든 쿠키든지 간에 마음대로 먹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목사님은 쿠키를 만들 줄 몰랐습니다. 그래서 고민 끝에 교회 직원들에게 이메일을 통해 하소연했다고 합니다. "나는 쿠키를 만들지 못합니다. 누구든지 나를 위해서 쿠키 한 접시만 만들어 주십시오. 그러면 내가 이 파티에 기꺼이 참석할 수 있게 됩니다. 저를 도와주세요." 그러자 교회 직원 중 한 자매가 정성껏 쿠키 한 접시를 만들어서 목사님에게 드렸습니다. 목사님은 그 쿠키 한 접시를 들고는 파티에 참석했습니다. 그리고는 파티석상에 놓여진 다른 사람들이 만들어 온 다양한 쿠키들을 마음껏 먹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나라에 파티를 열어놓고 계십니다. 그것은 쿠키 파티가 아닙니다. 그것은 의의 파티입니다. 누구든지 하나님께서 인정하는 의를 가지고 오면 하나님께선 무조건 받아 주시고, 하늘 나라에 있는 모든 행복과 기쁨을 누리도록 만들어 주십니다. 뿐만 아니라 영원히 영생할 수 있는 축복을 선물로 주십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하나님나라의 파티에 들고 갈 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인정하는 의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또한 이것은 세상에서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오직 십자가 밑에서 나대신 죄인이 되신 예수님, 그리고 자기의 의를 나에게 넘겨 주신 예수님, 자기는 죄인이 되고 우리는 의인으로 만드신 이 예수님의 은혜 때문에 우리는 이 의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의를 들고 하나님 앞에 당당히 나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손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보시고 과거를 묻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빈부귀천을 따지지 않으십니다. 예수를 오래 믿었느냐, 늦게 믿었느냐를 따지지 않으십니다. 무조건 우리를 받아 들이시는 것입니다.

 

하늘 나라의 파티에 참석하는 사람들에게 요구되는 자격은 오직 예수님께서 주시는 의의 소유 여부에 있습니다. 다른 모든 것은 소용없습니다. 오직 예수님의 의를 내가 가지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의 의를 다 소유한 것으로 믿습니다. 그런데 이 의를 소유하고 있지만 이것이 얼마나 큰 은혜인가를 깨닫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는 것 같습니다. 머리 속에 남아 있는 상식일 뿐, 가슴으로 그 은혜에 감격하는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예루살렘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가시는 주님, 머지 않아 십자가 형틀에 그 발을 올려 놓으실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이 그렇게 비참한 죽음을 당하시는 이유는 나를 의인 만들어 하나님나라의 파티에 참석할 수 있도록 자격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주님의 사랑 때문에 가슴 속에 눈물이 솟고 흥분할 정도로 그 은혜에 깊이 감격하고 있습니까?

 

제가 좋아하는 찬송 중에 이런 가사가 있습니다. "나를 위해 십자가에 오르신 그 발, 흘린 피로 나의 죄를 대속하셨네." 자신이 흘린 피로 우리에게 의를 주시고, 우리를 의인으로 만드신 예수 그리스도. 이 은혜 앞에 울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가슴은 반석일 것입니다. 이 은혜 앞에 무릎을 꿇지 못하면 그 무릎은 굳은 무릎일 것입니다. 이 은혜 앞에 가슴 속에서 우러나는 뜨거운 사랑을 바치지 못한다면 그 사람은 중생 받은 자의 가슴이 아닐 것입니다.

이 은혜를 아십니까? 의가 없는데도 나를 의인 만드신 은혜를 아십니까? 하나님 앞에 당당하게 나갈 수 있는 이 축복을 주신 은혜를 얼마나 느끼십니까? 성령께서 우리 마음을 터치하셔서 식어버린 이 은혜의 마음을 다시 한번 뜨겁게 해 주시길 바랍니다. 잊어버렸던 이 은혜를 다시 회상할 수 있길 바랍니다.

최근 어느 검사로부터 들은 말입니다. 그 검사가 이렇게 질문 했습니다 "형무소에서 가장 기뻐하는 자가 누군지 아십니까?" 언뜻 답이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형무소 시설이 좋다고 해도 거기서 기뻐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자 그 분이 대답했습니다. "우리 생각에는 형을 3개월 받고 들어온 사람이 이제 나갈 일이 가까이 왔으므로 제일 기뻐할 것 같죠? 그런데 그렇지 않습니다. 진짜 형무소에서 기뻐하는 사람은 사형수로 있다가 무기수로 감형된 사람입니다." 언제 죽을지 몰라 조마조마한 가슴을 안고 사형 집행 날을 기다리던 사람에게, 사형 집행이 중지되고 비록 감옥에서나마 종신 살 수 있는 무기형이 선고되면 너무 기뻐서 소리지르며 돌아다닌다는 것입니다. "나 이제 살게 됐어요. 나 이제 살게 됐어요." 하면서 말입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공감이 갔습니다. 생명이란 소중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나 대신 십자가에 죽으시고 나를 의인으로 만드셨기 때문에 주님이 주신 그 의를 들고 하나님나라에 가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종신형에서 무기형으로 감형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우리에게 완전한 자유를 주셔서 하나님과 더불어 영원토록 하늘에 있는 모든 축복과 행복을 누리도록 허락하셨으니 어찌 큰 은혜가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이런 은혜를 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앞으로 한달 동안 예루살렘을 향해 발걸음을 옮겨 놓으시는 예수님, 그리고 그곳에 가셔서 십자가에 발을 올려놓으시고 우리를 위해 자기 생명을 바치시는 예수님을 묵상하면서 내가 얼마나 큰 죄인인가를 자주 고백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나에게 주신 이 놀라운 의의 은혜를 깊이 묵상하면서 주님께 내 마음을 드릴 수 있는 한 달이 되길 바랍니다. 주님 앞에 내 정성과 사랑을 고백할 수 있는 한 달이 되길 바랍니다.

 

다같이 기도합시다.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 아버지, 나 같은 죄인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시고, 예수 그리스도가 나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내가 하나님 앞에 영원한 의인이 되어 주님 앞에 받아 누릴 수 있는 모든 축복과 행복을 받아 누리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하나님, 우리 성도들이 이번 고난 주간을 앞두고, 죄 없는 하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큰 죄인이라는 사실을 깊이 깨닫는 은혜가 있게 해 주시길 바랍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이 죄인이 되심으로 내가 의인이 된 이 놀라운 은혜 앞에 감격하여 하나님 앞에 눈물로 기도하고 찬송할 수 있는 성도들 될 수 있게 해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예수님 외에는 우리가 자랑할 분이 없고, 예수님 외에는 우리가 찬양할 분이 없음을 믿고 주님을 높이 받들며 사는 귀한 하루가 될 수 있도록 축복해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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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설교 : 은혜충만한 인생

 

 


제목 : 만선(滿船) 인생

말씀 : 요21:1-6

1.깨달음과 행동이 있어야 합니다.

중국의 고대문헌인 벽암록(碧巖錄)에 「줄탁동기(啐啄同機)」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 말은 啐 떠들 줄, 啄 쫄 탁, 同 같을 동, 機 기회 기자를 쓰는데 계란이 부화하여 병아리가 되어 나올 때를 비유하여 나온 말로 때를 알고 거기에 맞는 행동을 해야 좋은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즉 병아리는 때가 되면 밖으로 나가야 된다는 것을 깨닫고 껍질을 톡톡 두드려 어미 닭에게 껍질을 깨트려 달라고 신호를 보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게 줄(啐)입니다. 그러면 어미 닭은 이 신호를 듣고 병아리가 나올 때가 되었으니 도와달라는 신호인 줄 깨닫고 거기에 응답해서 껍질을 톡톡 쪼아 깨트려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게 탁(啄)입니다.

이와같이 병아리는 병아리대로 어미닭은 어미 닭대로 깨닫고 행동하는 것이 같은 시기에 이루어져야하는데 이게 동기(同機同)입니다. 그러면 건강한 생명체가 태어나는 것입니다. 이런 과정에서 어느 한쪽이 깨닫지 못하거나 혹은 깨달아도 행동하지 않으면 안되고, 너무 늦게 행동하면 자칫하면 병아리는 밝은 세상을 보지 못하고 그 안에서 죽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런 원리는 비단 병아리가 부화될 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세상의 모든 것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먼저 깨달음이 있어야 합니다. 깨닫지 못하면 아무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깨닫기만하면 다 되는 것은 아닙니다. 아무리 깨달아도 행동하지 않는다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또한 행동하는 것도 시기가 있습니다. 뒤늦게 깨닫고 행동하고자 해도 때를 놓치면 일을 그르칠 때가 많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먼저 깨달아야 하고 나아가 적절한 시기에 행동으로 응답해야 합니다. 그럴 때 세상의 모든 것들이 아름답게 이루어져 풍요로운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신앙생활도 다르지 않습니다. 줄탁동기가 필요합니다. 우선은 진리를 알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는 생명의 도를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나 깨닫는 것만으로 다 되는 것은 아닙니다. 깨달았으면 믿고 따라가야 합니다. 행동해야 합니다.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면 생명의 은총을 누릴 수 없고, 또한 깨닫기는 깨달아도 거기에 상응하는 행동을 하지 않으면 그 또한 생명의 은총을 누릴 수 없는 것입니다. 깨닫고 그 깨달음을 따라 행동할 때에 비로소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이 진리의 도, 생명의 도를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둠속에서 자기 생각대로 눈에 보이는 것만을 좇아 살아가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예수님 당시 예수님을 따르던 많은 사람들도 그랬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들을 때는 뭔가 좀 알 것 같은 데 조금 지나면 그만 말씀의 의미를 다 까먹고 그저 자신의 생각을 따라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결국 예수님이 나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말씀하고 그 말씀대로 로마병정들에게 붙잡혀 고난을 당하시는 것을 보자 저분에게서는 기대할 것이 없다면서 다 떠나 버리고 말지 않았습니까?

심지어는 제자들도 그랬습니다. 주님께서 그토록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라고, 한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어야만 많은 열매를 맺을 것이라고,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썩지 않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라고 말씀하셨지만 깨닫지 못하고 육신의 떡만을 생각하며, 육신의 떡을 걱정하며 주님을 따라다녔습니다. 그래서 막8:17절에서는 제자들을 향하여 안타까운 마음으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어찌 떡이 없음으로 수군거리느냐? 아직도 알지 못하며,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 마음이 둔하냐?”

어찌해서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그동안 그만큼 너희들과 함께 하며 너희에게 말한 것을 깨닫지 못하느냐? 그만큼 병든 자를 고치고, 죽은 자를 살리고, 바람과 파도를 명령하여 잔잔케하고. 오병이어의 기적을 통하여 내가 생명의 주임을 너희에게 분명히 보여주었건만 아직도 깨닫지를 못하고 먹을 것 때문에 걱정을 하고 있느냐고 하시면서 영적인 감각이 둔하여 깨닫지 못하고 있는 제자들을 책망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우선은 주님의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주님과 나 사이에 줄탁동기가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 찾아오셔서 우리 심령의 문을 톡톡 두리면서 잽싸게 응답하여 그 말씀대로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고,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임으로 정말 주님과 주님의 뜻과 주님안에 있는 그 생명의 은총을 바르게 깨닫고 이해함으로 주님을 온전히 따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먼저 주님을 바르게 알고, 나아가서는 그 아는 지식을 따라서 살아갈 때에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삶이 하나 되고, 믿음과 행동이 하나 되고, 신앙과 삶이 조화를 이루저 진정한 생명의 기쁨과 은혜와 능력을 마음껏 누리며 살아가는 복된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자기 생각대로 행동했을 때 실패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오늘 본문 말씀에 보면 안타깝게도 주님의 뜻을 바르게 깨닫지 못하고 자기마음대로 엉뚱한 일을 하다가 참혹한 실패를 당했던 제자들의 모습이 나타납니다. 오늘 3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니 그들이 우리도 함께 가겠다 하고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 그 날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더니...” 그러니까 어부출신으로 갈릴리 바닷가에 잔뼈가 굵은 베드로를 비롯해서 다른 여러 명의 제자들이 갈릴리 바닷가로 나가 밤새도록 고기를 잡았는데 피라미 한마디로 잡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사건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셨다가 사흘 만에 살아나신 후 여러번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뒤에 있었던 일입니다. 먼저 막달라 마리아게 나타나셨고,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며 문을 닫고 숨어 있는 방에 찾아오셔서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영으로 생각하고 두려워하자 나를 만져보라고 하셨습니다. 도마에게 나타나셔서 손의 못자국을 만져보고, 옆구리의 창자국에 손을 넣어보라고 하시며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과 함께 식사를 하시면서 당신의 부활이 얼마나 확실한 것인가를 분명히 보여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지금 이 시간 그들이 해야 할 일은 무엇이겠습니까? 주님께서 이들이 지금 무엇을 하기를 원하셨겠습니까? 두말할 나위도 없이 예수님의 부활의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먼저 모든 제자들을 불러 모아 제자들부터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확실한 믿음을 가져야 했습니다. 사람을 낚는 어부로서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하여 기도하고 예배드리고 성령의 능력을 덧입어야 했습니다. 부흥집회를 열든지 성경사경회를 하든지 간절히 주님 앞에 엎드려 주님의 능력을 받아야 했습니다. 열두제자 뿐 아니라 그동안 예수님을 따르던 무리들을 모아 그들에게 부활의 주님을 분명히 알려주고 예수님께서 하셨던 말씀들을 상기시켜 주며 이 분이 진정 메시아요, 생명의 주님이셨음을 선포해야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수제자격이었던 베드로가 먼저 고기 잡으러 가겠다고 하니까 다른 제자들도 따라갔던 것입니다. 그래서 밤새도록 열심히 고기를 잡았으나 피라미 한 마리도 잡지 못했던 것입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부활의 증인이 되어야 할 때에, 기도해야 할 때에, 주님의 말씀을 상기하고 사명을 감당해야 할 때에 엉뚱하게 고기를 잡고 있었던 것입니다.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물고기를 잡으며 생계를 유지하던 과거의 삶으로 돌아가 버린 것입니다. 그 때 그 결과는 처참한 실패뿐이었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안 잡혀도 그렇게 안 잡힐 수가 있는지 일부러 안 잡으려고 기를 쓰고 그물을 던져도 밤새도록 던지면 다만 피라미 몇마리라도 잡힐 법한데 단 한 마리도 안 잡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베드로로 말하면 갈릴리 바다에서 잔뼈가 굵어 고기잡이로 살아온 사람입니다. 갈릴리 바다라면 손바닥 보듯이 훤히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다른 것은 몰라도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잡는 일만큼은 둘째가라면 서러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밤새도록 그물질 했지만 헛 그물질이었습니다. 피라미새끼 한 마리 잡지 못했습니다. 고생만 실컷하고 그의 손에 쥐어진 것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빈털터리였습니다.

이것은 다름이 아니라 주님의 뜻을 깨닫지 못하는 인생, 주님을 떠난 인생이 바로 이와같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뜻을 버리고 자기 맘대로 사는 인생에게 얼마나 쓰라린 실패가 있는지를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뜻을 저버리고 자기 맘대로 살아갈 때는 제 아무리 발버둥쳐도 결국 남는 것은 처절한 실패뿐이요, 빈손 뿐이요, 빈 그물 뿐이요, 빈 배 뿐이라는 사실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안 그렇습니까? 주님없는 인생에게 무엇이 남겠습니까? 혹시 잠시 무엇인가를 얻는 것처럼 보인다해도 무엇이 자신과 영원히 함께 하겠습니까? 돈이 남겠습니까? 권세가 남겠습니까? 건강이 남겠습니까? 아무것도 남지 않습니다. 남는 것이라곤 공허뿐이요,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뿐인 것입니다.

그래서 렘2:13절에서는 말씀합니다.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 내 백성이 두가지 악을 행하였는데 그게 뭐냐 하나님을 버린 것과 제 맘대로 간 것이라는 것입니다. 모든 생명과 축복과 평강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버리고 자기 마음대로 자기 생각대로 살았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고기만 많이 잡으면 거기 행복이 있고, 거기 풍성한 삶이 있는 줄 알고 죽자사자 세상의 고기만 잡으러 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건 터진 웅덩이에 물을 채우는 일이요, 밑 빠진 독에 물을 채우는 일과 같아서 결국 남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결코 그런 어리석은 인생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물론 세상의 고기도 잡아야 합니다. 그러나 세상의 고기를 잡기 전에 주님께서 어떻게 살기를 원하는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내 영혼을 풍성케하고 주님의 뜻을 이루는 일에 힘쓰며 나와 내 가정과 교회와 이 땅위에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가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정말 하나님 안에 있는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마음껏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고 믿음의 사람들도 조차도 자꾸만 세상의 고기만 잡는 일에 열중을 하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온전히 구별해서 하나님께 드려야 할 주일에도 세상의 고기를 잡으러 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신의 모든 정열을 세상의 고기를 잡는 일에만 쏟아붓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세상에 이처럼 어리석은 일이 없습니다.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남는 것은 빈배요, 고통과 상처뿐이요, 하나님의 진노뿐인 참으로 가려한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정말 나를 향한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정말로 내 생명을 풍요롭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바르게 깨닫고 온전히 주님의 말씀을 따라 주님과 동행할 때에 생명의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주님 말씀따라 행동했을 때 성공하였습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주님의 뜻을 무시하고 자기 맘대로 했을 때는 실패뿐이요, 반면에 주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주님의 뜻대로 행할 때에 확실한 성공이 보장됩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바로 이러한 사실을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6절 보겠습니다. “이르시되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잡으리라 하시니 이에 던졌더니 물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더라.” 여러분, 정말 놀라운 일입니까? 밤새도록 피라미 한 마리 못 잡았는데 주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순종하니까 그물이 찢어질 만큼 엄청난 물고기가 잡혔던 것입니다. 그렇다고 어디 다른 바다로 이동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멀리 간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저 주님 말씀을 듣고 그대로 한 것 뿐이었습니다.

여러분, 여기서 사실 왼편이냐 오른편이냐는 별 의미가 없습니다. 솔직히 그들이 밤새도록 고기를 잡으며 설마하니 왼편에만 계속 그물을 던졌겠습니까? 설령 왼편에만 던졌다해도 왼편이나 오른편이 다른 게 무엇이 있겠습니까? 배 밑에는 왼편이나 오른 편이나 서로 가까이서 통해져 있습니다. 그것도 무슨 커다한 항공모함도 아닌 조그만 배에서 왼편 오른편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자기들의 의지를 따라 던졌을 때는 밤새도록 잡았지만 한마리도 못잡았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을 따라 던졌을 때는 그물이 찢어지도록 잡혔던 것입니다.

앞의 3절 말씀과 정 반대입니다. 주님을 떠나 자기 소견대로 밤새도록 그물질을 했을 때는 철저하게 실패했습니다. 피라미새끼 한 마리 잡지 못했습니다. 밤새도록 헛고생 했습니다. 헛그물질을 했습니다. 고생만 죽도록 하고 소득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허탈과와 낙심과 절망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던졌을 때는 그물이 찢어지도록 잡혔습니다.

여러분, 이게 무슨 말씀입니까? 주님의 말씀을 따르라는 것입니다.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결코 네 생각, 네 지식, 네 경험속에 성공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기서는 다른 어떤 것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위치나 시간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기술이나 사람의 문제도 아니었습니다. 문제는 주님의 말씀이었습니다. 문제는 무엇에 의지해서 그물을 던졌느냐 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지혜와 능력과 이성과 경험에 의지했을 때는 한 마리도 못 잡았습니다. 밤새도록 헛수고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에 의지해서 주님의 지시를 따라서 주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그물을 던졌을 때는 그물이 찢어지도록 잡혔던 것입니다.

여러분, 이게 바로 성공의 비결입니다. 말씀따라 가는 것입니다. 말씀에 의지해서 인생의 발걸음을 옮겨 놓는 것입니다. 어디 멀리가야 성공이 있는 게 아닙니다. 대통령을 해야 성공하는 것이 아닙니다. 장사를 해서 돈을 많이 벌어야 성공하는 것이 아닙니다. 열심히 공부해서 높은 자리에 올라가야 성공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높은 자리도 올라가야 합니다. 기왕이면 명예와 권세도 얻어야 합니다. 우리 믿음의 사람들이 더 잘되어야 합니다. 세상적으로도 앞서 가야 합니다.

그러나 그에 앞서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뜻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방법대로 하나님의 허락하심 가운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뜻을 바르게 이해하고, 주님의 말씀대로, 주님의 방법대로 행하는 인생이라야 진정한 성공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디에 있든 있는 곳 그 곳에서 주님의 뜻을 발견하고 그 뜻대로 그물을 던지는 것입니다. 농사를 짓든 직장생활을 하든 사업을 하든 높은 벼슬을 하든 내 방식대로 내 의지가 아니라 주님의 방법대로 주님의 말씀대로 하는 삶에 반드시 성공이 있고, 반드시 풍성함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28:2절에는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이르리니...” 그러면 나가도 복을 받고 들어가도 복을 받고, 자녀가 복을 받고, 떡반죽 그릇이 복을 받고, 성읍에서도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한마디로 영육간에 온전한 복을 받는 성공자가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정말 오늘 말씀을 깊이 묵상하며 세상의 어떤 것보다도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바르게 깨달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성과 경험과 지식과 능력을 의지하지 말고 주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주님을 바르게 알고 주님의 말씀대로 인생을 영위하시기 바랍니다. 나 혼자 내 힘과 지혜대로 내 마음대로 헛 그물질 하지 말고, 주님께서 던지라는 곳에 그물을 던지고, 주님께서 거두라는 곳에서 거두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진정 영육간에 생명의 풍성한 은혜를 마음껏 누리며 살아가는 진정한 성공자가 되시기를 간절히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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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예배설교] 빌라도의 선택  Pilate's Choice,Lent Preaching      


 


 


제목 : 빌라도의 선택

말씀 : 마27:15-26

 


어떤 사람들은 사도신경의 내용 중에 나오는 빌라도라는 사람은 좀 억울하지 않느냐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즉 그는 나름대로 예수님을 석방하려고 애쓴 사람인데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라고 하면서 저주받은 사람의 대표격으로 말하기는 좀 그렇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사실 어떻게 보면 좀 그런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분명 성경에 보면 그는 예수님이 죄가 없다는 것을 알고 나름대로는 예수님을 석방하려고 애쓴 흔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그는 왜 사도신경에서 대대로 저주받은 이름으로 오르내리게 되었을까요? 저는 오늘 사순절 다섯 번째 주일을 맞으며 이 문제를 생각해 보며 사순절의 의미를 되새겨 보고자 합니다.

1.빌라도는 정의를 끝까지 지키지 못했습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성경을 보면 분명히 빌라도는 예수님의 문제에 대하여 공정하게 처리하려고 애썼던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였노라.”라고 하면서 나름대로 예수님을 석방시키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빌라도는 당시 예수님과 관련된 사건을 군중들의 요구대로 처리하지 않고 정당한 방법으로 처리를 하려고 노력하고 있는 것입니다.

게다가 24절에서 빌라도가 군중들 앞에서 손을 씻으며 나는 이 사람의 죄에 대하여 무죄하다고 말했다는 것은 그는 어느 정도 종교성도 가지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죄없는 사람을 죽이면 윤리적으로 옳지 않은 일일뿐 아니라 하늘의 진노를 사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어쨌든 빌라도는 예수님의 사건에 대하여 공정성을 기하고 정의에 입각하여 처리하려고 애썼습니다. 여기까지는 그런대로 긍정적으로 봐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빌라도가 억울하다고 할 수는 물론 없습니다.

왜냐하면 저와 여러분이 이미 잘 알고 있듯이 빌라도는 그러한 공정성을 끝까지 지키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당시 유대 나라는 로마의 식민지하에 있으므로 중대 사안에 대한 법적인 결정은 로마 총독의 재가를 받아야만 했습니다. 특히 사형집행에 관해서는 로마 정부 즉 로마에서 파송된 총독에게 권한이 주어져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빌라도는 예수님과 관련된 사건에 대하여 공정하게 판단하여 최종결정을 해야할 위치에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사형시켜야 한다고 고소하고 있는데 만약 사형을 받을 만한 죄가 있다면 사형언도를 해야 하고, 죄가 없다면 무죄를 선언하고 석방을 시켜야 할 위치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에게는 죄가 없었습니다. 그것은 빌라도 자신의 말이기도 했습니다. 오늘 23절에 보면 “어찜이뇨?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고 말하고 있고 또 요18:38절에서는 “이 사람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였노라.”(요18:38)고 하였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자기 권한을 올바르게 행사하여 무죄를 선언하고 석방을 시켜야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빌라도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십자가의 처형이라는 최악의 결정을 내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죄없으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죄인중의 죄인이 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니 설령 예수님을 석방시키려고 조금 애를 썼다고해서 억울하다고 하소연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여기서 이 점을 명심해야 합니다. 우리는 마지막까지 옳은 선택, 옳은 결정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상황 때문에, 환경 때문에 혹은 이해득실 때문에 마지막에 가서 옳지 않은 결정을 해서는 곤란하다는 것입니다. 상황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비 진리편에 설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은 받아들여 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이런 빌라도의 이 옳지 않은 결정을 보면서, 그래서 대대로 저주받은 이름으로 오르내리는 모습을 보면서 언제 어떤 상황가운데서라도 마음뿐만 아니라 행동으로 옳은 선택, 옳은 결정을 하여 우리의 삶을 더욱 빛나게 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빌라도는 명예를 위하여 정의를 팔아먹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빌라도가 그런 잘못된 결정을 내린 것은 자신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였을 것입니다. 성난 군중들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자신의 권력과 부귀영화를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만 정의대신 타협을 선택한 것입니다.

성난 군중들은 빌라도를 향하여 아우성을 칩니다.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이 예수는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고 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만약 이런 반역자를 살려두면 당신은 로마의 충신이 아닙니다. 그러니 어서 이 사람을 십자가에서 처형하라고 명령을 내리십시오.” 이렇게 소리를 치고 있습니다.

그 소리가 얼마나 큰지 빌라도는 그 소리를 외면할 수가 없었습니다. 자칫하면 무슨 큰 폭동이라도 일어날 태세였습니다. 그러면 치안상태가 어려워지고 그렇게 되면 자신에게 그 책임이 돌아올 것입니다. 로마 황제에게 무능한 총독이라는 소리를 듣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자신의 자리가 위태로워 질 것이었습니다. 출세길에 막대한 지장이 있을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마 빌라도는 고민에 빠졌을 것입니다. 내가 보기에는 저 예수라는 사람에게는 죄가 없다. 그렇지만 저 무지몽매한 백성들이 저렇게 아우성을 치고 있다. 저 성난 군중들의 아우성을 무시했다가는 내가 지금까지 쌓아올린 공든 탑이 무너져 내릴지도 모른다. 내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저 나사렛 촌사람 하나 때문에 내 출세 길을 막을 수는 없지 않는가?

이렇게 생각하고 결국 그는 큰 무리의 소리에 굴복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도록 명령을 내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이것이 빌라도의 또 하나의 큰 잘못이었습니다. 자신의 결정이 진리냐, 정의냐, 옳은 것이냐가 아니라 자신의 결정이 얼마나 자신의 명예와 권력과 부를 지키는데 도움이 되느냐하는 것이 판단의 기준이 되어 그릇된 결정을 내렸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여기서 또한 기억해야 합니다. 세상의 소리, 육신의 소리, 유혹의 소리를 뿌리치고 주님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곡된 세상의 소리가 아무리 크더라도 그런 것 다 뿌리쳐 버리고 진리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때로는 어떤 때는 그러면 물질적으로, 명예적으로 손해가 되는 것처럼 보인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옳은 소리, 진리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 그 소리를 따라 살아갈때에 결국은 하나님과 사람앞에 인정받게 되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모두 그런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빌라도는 진리의 소리를 작은 소리라고 무시하며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사실 빌라도는 조금만 귀를 기울였다면 진리의 소리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 소리는 바로 그의 아내를 통해서 들려왔습니다. 그것은 바로 오늘 19절의 말씀에 나타나 있습니다. “총독이 재판 자리에 앉았을 때에 그 아내가 사람을 보내어 가로되 저 옳은 사람에게 아무 상관도 하지 마옵소서. 오늘 꿈에 내가 그 사람을 인하여 애를 많이 썼나이다.”

그러니까 빌라도의 아내가 자신의 꿈 이야기를 하면서 예수님의 일에 관여하지 말라고 충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꿈인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분명히 예수님은 죄가 없는 옳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분을 해롭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꿈에 그분의 고통앞에서 자신도 몹시 괴로움을 당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절대 저 사람들의 잘못된 요구를 들어주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빌라도는 끝내 그러한 아내의 소리를 외면했습니다. 왜 일까요? 아마도 그 소리는 너무나 작은 소리였기 때문에 무시해도 좋다고 여겼기 때문일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까? 아내의 소리는 혼자였습니다. 그래서 너무나 작은 소리였습니다. 그 소리는 너무나 미미한 소리였기 때문에 자신의 권력을 위협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는 소리는 너무나 큰소리였습니다. 아우성으로 들려왔습니다. 수많은 군중들의 소리였습니다. 그래서 그 소리는 자신의 권력을 삼킬 듯한 거대한 소리였습니다. 그래서 결국 그는 옳은 소리였지만 작은 소리에 불과했던 아내의 소리는 무시해 버렸고, 잘못된 소리였지만 큰 소리였던 군중들의 소리를 따라 악을 행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습니까? 사실인즉 우리도 이런 선택의 기로에 선다면 자칫하면 빌라도와 같은 결정을 하기가 쉽습니다. 작고 소수이지만 진리의 소리, 정의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거기에 따라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하는데 옳지 않은 소리임에도 불구하고 큰 소리, 많은 소리에 따라 어떤 결정을 내릴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진리는 항상 요란하고 커다란 소리에 있는 것만은 아니라는 점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진리는 항상 세상 많은 사람들이 가는 곳에 있는 것만은 아니라는 점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오히려 진리는 좁은 길에, 작은 소리에, 잘 들리지 않는 소수의 소리에 있을 때가 더 많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열왕기상 19장에 보면 엘리야가 이세벨의 핍박을 피하여 동굴 속에 숨어 있습니다. 그때 엘리야 앞에 몇 가지 상황이 벌어지는데 먼저는 산을 흔들만한 요란한 바람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러나 거기서 하나님의 음성은 들려오지 않았습니다. 그 다음에 땅을 흔드는 지진이 있었는데 거기서도 역시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오지 않았습니다. 또 지진 후에 불이 일어났으나 거기서도 하나님의 음성은 들려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런 요란한 상황이 지나가고 갑자기 고요해졌습니다. 그러더니 아주 작고 세밀한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귀를 기울여야 겨우 들을만한 가냘픈 소리였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음성이었습니다. 엘리야는 그 작은 소리를 듣고 다시 힘을 얻어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40일 금식 기도하실 때도 그랬습니다. 거기서 예수님께서 40일을 금식하고 힘들어 하실 때 아주 그럴듯한 소리가 들려옵니다. “여기 있는 돌들로 떡을 만들어 먹으라. 그리하여 네 배고픔을 해결하고 군중에게 나누어주라.”는 것이었습니다. 다음에는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라. 기적을 보여주라. 그러면 너는 최고의 인기스타가 될 것이다.”는 것이었습니다. 다음은 “천하만국 권세를 가지라. 너는 최대의 권력자와 성공자가 될 것이다.”는 것이었습니다.

모두가 그럴듯한 소리였습니다. 세상에서 부귀영화와 명예를 누리라는 유혹의 소리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러한 현란하고 요란스런 거짓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그러한 커다란 거짓소리를 물리치시고 조용히 들려오는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 결국 인류구원의 역사를 성취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빌라도는 그렇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인기의 소리에, 명예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작은 소리라고 아내로부터 전달된 진리의 소리를 무시하고 듣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오늘 우리에게까지 저주받은 이름으로 오르내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세상의 요란한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이 아니라 주님의 조용한 음성에 귀를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다수의 큰 소리에 파묻혀 그만 진리의 소리를 놓치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세상에서 누가 어떻게 떠들어대든 주님앞에 조용히 엎드려 세미한 주님의 음성을 듣고 진리의 길, 생명의 길로 달려가시는 저와 여러분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4.빌라도는 사람들의 큰 소리 때문에 양심의 소리를 외면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빌라도는 그 자신이 분명히 말했습니다. 예수, 그에게는 죄가 없다는 것입니다. 나는 그에게서 어떤 죄도 찾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곧 양심의 소리이기도 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죄가 없었고, 죄가 없으니 예수님을 석방하려고 나름대로 애를 썼던 것입니다. 그에게는 죄가 없다. 그에게는 죄가 없다. 그러니 그를 석방하라. 이것이 빌라도의 양심의 소리였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양심의 소리보다는 사람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어쩌면 자신의 지위를 위태롭게 만들지도 모를 사람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임으로 양심속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외면하고 군중들의 소리에 굴복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혹시 당장은 손해가 되는 일처럼 보인다고 할지라도 사실은 그것이 성공의 길이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조카 롯의 경우를 한번 생각해 봅시다. 그들은 함께 살다가 가축이 많아져 갈라서야만 했습니다. 목축업을 생계수단으로 하는 그들에게는 양떼를 방목할 수 있는 풀밭과 물의 근원이 가장 중요한데 유대 땅의 그러한 환경은 제한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종들과 롯의 종들간에 다툼이 벌어집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이제는 롯과 헤어질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고 롯에게 선택권을 주며 떠나라고 합니다.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선택의 우선권을 네게 주니까 네가 먼저 우선권을 결정하라.”(창13:9)

여러분, 이때 롯의 양심의 소리는 무엇이었을까요? 롯은 아버지 어려서 아버지 하란을 잃고 큰아버지 아브라함 밑에서 성장하였습니다. 그러니 지금까지 길러주신 늙은 아브라함에게 이 좋은 것을 다 드리고 젊은 자기는 양떼를 몰고 새로운 개척지를 향해 사막을 떠나는 것이 정상적인 사람의 양심의 소리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롯은 자기 양심에 들리는 소리를 무시하고 좋은 것을 자기가 차지해 버립니다. 그래서 늙은 큰 아버지 아브라함은 좋지 못한 땅으로 떠나게 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양심의 소리를 버리고 좋은 땅으로 갔던 롯은 풍요로운 땅에서 잘먹고 잘살았을까요? 그렇지 못했습니다. 당장은 성공한 것 같이 보였습니다. 그러나 죄악의 땅 소돔과 고모라에서 그들은 큰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그 땅이 불의 심판을 받을 때 그 동안 모아 놓은 재산을 다두고 떠나야 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그의 아내는 그 땅에 미련을 두고 뒤돌아보다가 소금기둥이 되어버리고 맙니다. 나중에는 종족 보존이라는 미명하에 딸들이 아버지를 술취하게 만들고 관계를 맺어 모압과 암몬 족속이 형성됩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께 버림받은 민족이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소리, 양심의 소리를 버리고 당장 눈에 좋게 보이는 것을 좇아 갔던 롯은 재물로, 가문의 체통도, 윤리도, 믿음도, 하나님의 유업도 모두 잃어버리는 비극적 결과를 가져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제 말씀을 정리합니다. 우리는 지금 사순절 다섯 번째 주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사순절을 다른 절기가 아닙니다. 바로 세미한 주님의 소리를 듣는 절기입니다.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떠들어대는 시끄럽고 요란한 소리를 듣는 것이 아니라 세미하게 들려오는 주님의 진리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시간입니다. 무슨 화려한 소리, 대박이 터지는 소리, 출세하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소리, 양심의 소리,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절기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세상의 부귀영화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뜻에 귀를 기울이셨습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래서 인류구속의 대업을 이루셨습니다.

그러나 빌라도는 세상 사람들의 커다란 소리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아내의 꿈을 통해서 보여주신 작은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죄가 없다고 하는 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에 그는 세상의 권력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부귀영화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그렇게 하면 성공한 인생이 될 줄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인생은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그렇게도 지키고 싶었던 권력과 부귀영화도 누리지 못하고 나중에 사마리아인들의 어떤 폭동과 관련되어 총독의 지위도 박탈당하고 로마로 소환되어 갔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그는 세상의 지위도 빼앗기고 영광의 나라의 은총을 누리기는커녕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가장 흉악한 죄인으로 대대로 남은 저주받은 인생이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이 사순절을 보내면서 정말 세상의 크고 시끄러운 소리, 많은 사람들이 떠들어대는 군중의 소리, 부귀영화의 소리, 물질의 소리, 무사안일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아니라 혹시 작은 소리일지라도 주님의 소리, 양심의 소리, 진리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진실로 여러분 모두는 주님을 따라 진리의 길을 달려감으로 진정 하나님과 사람앞에 인정받으며 생명의 은총을 세세토록 누리는 복된 삶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조학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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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기설교]주의 길을 예비하라 (사순절)

 

 

 

제목 :주의 길을 예비하라
말씀 :마 3:1-12

대강절 둘째 주일을 맞아 저는 여러분에게 한편의 드라마를 보여드리겠습니다. 드라마 제목은 "주의 길을 예비하라"입니다. 그리고 대본을 쓴 사람은 마태, 각색은 임영수입니다. 장소는 약 3백명의 관객이 관람할 수 있는 아늑한 분위기의 부채꼴형의 극장입니다. 부채꼴의 중심부에 아름다운 무대가 설치 되어 있습니다. 극장 안에는 관람객들로 가득 차있습니다.

잠시 후에 드라마의 시작을 알리는 시그널 음악이 흘러나오고 나서 무대가 서서히 밝아지기 시작합니다. 무대 배경은 사막입니다. 무대 배경이 드러나면서 고대 사회의 군복을 입은 한 무리의 병사들이 등장합니다. 그들은 어떤 고귀한 신분의 사람이 지나가는 길을 정리하고 있습니다. 그들 가운데 지휘관인 듯한 사람이 이것 저것 명령을 하자 병사들은 일사 불란하게 움직입니다. 드라마의 서막인 이 장면은 거의 무언극으로 진행됩니다.

길 정비가 끝나자 병사들은 퇴장합니다. 그들이 퇴장하자 곧 우렁찬 행진곡이 울리면서 무장한 병사들의 호위에 둘러 싸여 고대 사회의 화려한 복장을 한 왕이 말을 타고 행차합니다. 왕의 모습은 매우 위엄있고 경건해 보이기까지 합니다. 왕의 행차가 지나간 후 폭풍이 지나간 후 처럼 무대에는 불이 꺼지고 정적이 무대를 뒤덮었습니다.

잠시 후 다시 무대 불이 서서히 밝혀지면서 무대 배경이 드러납니다. 무대 배경은 역시 광야입니다. 그러나 왕이 지나가던 광야와는 다릅니다. 광야 한 쪽에는 강이 있고 여기저기 바위와 나무들이 있습니다. 막 뒤에서 나레이터의 낭낭한 목소리가 들립니다.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가 있다.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고,

그의 길을 곧게 하여라"

나레이터의 낭독이 있은 후 낙타 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두룬 매우 야생적인 인상을 풍기는 선지자가 등장합니다. 그가 등장한 후 무대 양편에서 많은 사람들이 나타나 그에게 다가갑니다. 그들의 모습은 이 선지자에게 무엇인가를 기대하는 것 같습니다. 그는 그들에게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고 외침니다. 그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은 그의 앞으로 나와 자신들의 죄를 고백합니다.선지자는 무리들을 강가로 데리고 가서 그들에게 세례를 베풉니다. 그에게 세례를 받은 사람들은 얼굴이 모두 밝아지고 그들의 몸 동작은 가벼워 보입니다. 그들은 오랫동안 어둠의 속박에서 풀려난 사람들 처럼 보입니다.

그 무리들 가운데는 바리새파 사람들과 사두개파 사람들도 끼어 있었습니다. 낙타털 옷을 입은 선지자는 그들을 보자 격렬하게 꾸짓습니다.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에게 닥쳐올 징벌을 피하라고 일러주더냐? 회개에 맞는 열매를 맺어라"

그의 꾸지람을 들은 유대 지도자들은 매우 당혹스러워 하는 표정들이였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죄는 회개하지 않고 단순히 그에게 세례를 받으므로 하나님의 징벌을 면하려고 했습니다. 그들은 세례를 징벌 면제의 표식으로 삼으려고 했습니다. 그러한 잘못된 태도를 본 이 선지자는 그들의 그릇된 태도를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선지자의 설교는 좀더 진지하고 격렬해집니다.

"너희는 속으로 주제넘게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다' 하고 말할 생각을 하지 말아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이 돌들로 아브라함의 자손을 만드실 수 있다. 도끼가 이미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다 찍혀서 불 속에 던져진다."

선지자는 자신이 메시야라 든가 모세와 같은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선지자는 자기 뒤에 오시는 그 어떤 분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선지자는 자신은 그 분의 길을 준비하기 위해 온 드라마의 처음 부분에 등장한 왕의 행차에 앞서 그 왕의 길을 준비하는 병사들과 같다고 말합니다. 선지자는 자기 뒤에 오시는 분이 계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 분은 선지자 자신과는 도저히 비교할 수 없는 존귀하고 고귀한 분이라고 소개합니다.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더 큰 능력을 가지신 분이다 나는 그의 신을 들고 다닐 자격조차 없다."

선지자는 자기는 물로 세례를 주지만 자기 뒤에 오시는 분은 "성령과 물로 세례를 베푸실 것이다"고 말합니다. 선지자가 선포하는 말씀을 들은 무리들은 그들이 오랫동안 기다리던 분이 이제 드디어 오실 것이라는 기대감 가운데서 무대에 모두 무릎을 꿇고 앉아 두 손을 높이 들고 무대 배경으로 되어 있는 광야의 하늘을 쳐다 봅니다. 그들의 얼굴에는 희망, 기대 동시에 두려움의 빛이 감돕니다.

무대가 조용해지며 강림절의 찬송 소리가 울려나오면서 무대 불이 꺼지고 무대의 막이 내립니다. 이 무대에 선지자로 등장한 주인공은 세례자 요한입니다. 그러나 실제 주인공은 요한이 가리킨 '오시는 그 분' 이였습니다.

드라마 첫번 째 장면 고대 왕의 행차는 본문 3절에 인용되어 있는 이사야 40:3-5의 내용입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바벨론 포로 생활에서 해방시켜 고국으로 인도하기 위해서 가까이 임하시는 장면을 상징적으로 묘사한 것입니다. 고대 사회에서는 왕의 행차가 있을 때 그에 앞서서 왕의 도로를 준비했습니다.

예언자 이사야는 이러한 문화적 배경 가운데서 바벨론과 팔레스타인 사이에 있는 시리아 사막에 하나님께서 임하실 길이 준비 되어야 한다고 알림으로서 이스라엘의 해방을 묘사했습니다.

이 드라마의 작가 마태는 예언자 이사야의 이 예언에서 평화의 왕으로 오시는 메시야를 보고 있습니다. 마태는 세례자 요한을 평화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는 길을 준비하는 선지자로 등장시킵니다.

극작가 마태가 쓴 이 드라마는 논픽션입니다. 이 드라마를 통해서 마태가 관객들에게 분명히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있습니다.

먼저는 하나님이 오시고 계신다.

다음은 오시고 있는 하나님을 위해 길을 준비해야 한다.

그 다음 암흑으로 뒤덮혀 있는 역사의 무대에 하나님이 오시는데 그 길을 준비하는 길은 곧 회개이다.

'새 우리들의 선생님' 의 저자 존 스토트 목사는 "새가 우리에게 믿음을 가르칠 수 있다면 회개도 가르칠 수 있을 것이다." 고 했습니다. 스토트 목사의 관찰에 의하면 "가을에 먼 곳으로 날아가는 철새들은 이듬해 봄에 어김 없이 되돌아 온다" 고 했습니다.

스토트 목사는 "일반적으로 거의 50만 마리의 황새가 매년 봄. 가을에 중동 지방 위로 이동하는 것으로 추산된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새들은 갔다가 돌아오는데, 하나님의 백성(인간)의 비극은 하나님을 떠나서 돌아오지 않는 다는데 있다." 고 했습니다.

스토트 목사는, "새가 육적으로 가지고 있는 강한 귀소 본능 만큼 우리 인간도 영적으로 강한 귀소 본능을 가지고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하나님이야 말로 인간의 영이 쉴 수 있는 진정한 집이며 그 분 없이는 우리가 부랑자요, 미아라는 생각이 강해 질 수 록 우리는 하나님과 약간 떨어져 있는 것도 더 빨리 더 고통스럽게 인식하고 더 간절한 마음으로 그분께 돌아가게 될 것이다"고 했습니다.

회개의 반대 말은 죄입니다. 죄의 뜻은 과녘을 맞추지 못하고 빗나가는 것입니다. 사수가 화살을 활시위에 먹여 과녘을 향해 쏘았을 때 과녘에 맞지 않고 빗나간다는 뜻이 죄의 어원입니다. 빗나간다는 것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의미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ㅇ. 무지에서 깨어나지 못하는 것.

ㅇ. 그릇된 생의 길에서 돌이키지 못하는 것.

ㅇ. 나쁜 습관으로 계속 빠져들어 가는 것.

ㅇ. 유혹의 길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

ㅇ. 자기 개선없이 살아가는 삶

ㅇ. 하나님께로부터 계속 멀어지는 것

ㅇ. 죄의 삯은 결국 죽음입니다.

한편 회개의 뜻은 돌이킨다는 것인데, 그 뜻을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의미로 정리해 볼 수 있습니다.

 

ㅇ. 깨어나는 것.

ㅇ. 깨달음.

ㅇ. 판단을 더디하고 이해를 신속히 하는 것.

ㅇ. 위기를 알아차리는 것.

ㅇ.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우리는 것.

ㅇ. 새로운 생의 출발을 하는 것.

ㅇ. 새로운 생명을 얻는 것.

우리가 대강절을 맞이 할 때마다 생각해 볼 문제는 "내가 오시고 계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자리에 있는가?라는 질문을 해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요한은 그 시대 사람들에게 오시고 계시는 그 분을 맞이할 수 있기 위해 "돌이키라"고 했습니다. 어디로 돌이킬 것인가? 그 분을 만날 수 있는 곳으로 입니다. 그 분을 만날 수 있는 곳이 어디인가?

켄 가이어는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분을 만날 수 있는 곳으로 영혼의 창을 제시합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 분의 다가옴은 말씀으로 시작된다. 우리의 다가감은 들음으로 시작 된다. 그분의 찾음은 자신을 보이심으로 시작되고 우리의 찾음은 봄으로 시작된다. 하나님을 찾는 우리와 우리를 찾으시는 하나님은 일상 생활의 창에서 서로 만난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창은 하나님이 자신을 드러내시고 계시하시는 곳입니다. 그 곳이 병상, 고난의 자리, 독서하는 시간, 기도, 깊은 좌절과 실의에 빠져있는 순간, 좋은 영화를 감상하는 시간, 말씀을 묵상하는 시간이 될 수 있습니다.

켄 가이어는 이렇게 말합니다. "햇빛보다 더 밝은 놀라운 순간, 우리가 평생 그토록 듣고 싶었던 그 말씀, 멀리서 메아리처오는 가느다란 메아리까지 놓치지 않으려 가장 가파른 절벽까지 오를 가치가 있는 너무나 소중한 말씀. 영혼의 창은 바로 그 말씀을 듣는 곳이다. 그리고 거기서 우리의 생의 여정은 새롭게 시작된다. "

"그 창은 단순한 깨달음의 순간일 때이기도 하고 판단을 더디하고 이해를 신속히 해야하는 순간일 수도 있습니다. 간혹 그 창은 우리 존재의 가장 깊은 부분에 들려오는 말씀일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를 잠에서 깨어나 인생의 여정을 준비시키는 말씀, 위기를 알아차리게 하거나, 인식의 장소로 인도하는 말씀일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누구이며 지금 왜 여기에 있으며 인생의 이 여정의 시점에서 우리에게 요구되어지는 것이 무엇인가를 이야기 해주는 말씀일 수도 있습니다"

-켄 가이어-

"한편 영혼의 창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곳이기도 하지만, 하나님에게 소중한 것이 무엇인가를 보게 해주는 지혜의 안목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안목은 세상을 보는 방식으로 모든 대상을 존중하는 마음으로 시작됩니다. 존중하는 마음은 다시 보는 눈을 통해 전해집니다. 눈으로 아니라 마음으로 보는 것입니다. 사건의 이면을 보는 것입니다."

요한은 그 시대 사람들에게 오시고 계시는 그 분을 맞이할 수 있기 위해 "돌이키라"고 했습니다. 어디로 돌이킬 것인가? 그 분을 만날 수 있는 곳으로 입니다. 그 분을 만날 수 있는 곳이 어디인가? 영혼의 창 즉, 그 분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곳, 그리고 하나님에게 소중한 것이 무엇인가를 보게 해주는 지혜의 안목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멀리 떠나 있습니다. 하나님을 멀리 떠나 있을 뿐만 아니라 진정 자기 자신으로부터도 너무 멀리 떠나 있습니다. 이렇게 멀리 떠나 있을 수록 우리의 삶은 더욱더 꼬이고, 뒤틀리게 됩니다. 하나님을 멀리 떠나 있는 사람들이 만들어가는 문화, 정치, 경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의 역사의 무대에서 요한과 같은 역할이 필요한가? 라는 질문을 하게됩니다. 거기에 대한 답변은 '절대 필요하다.' 입니다. 오늘 이 시대 사람들에게 돌이켜 그들에게 말씀으로 다가오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곳으로 안내가 필요합니다. 그 어느 때 보다 더욱 필요합니다. 그러한 책임을 오늘의 교회가 담당해야합니다. 

출처/임영수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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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절기별설교] 사순절의 의미

 

 

 

사순절은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예수님께서 겪으신 고난과 부활을 기억하기 위하여 부활절 전 40일간 경건하게 지내는 기간을 말한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부활절을 앞두고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내어주신 살과 피를 기념하는 성찬식을 준비하면서, 주님의 수난에 동참하는 의미로 금식을 행한 것으로부터 유래하였다. 유대인들은 유월절을 준비하기 위해 유월절 전에 금식을 행했는데, 초대교회 성도들은 신앙의 성장과 회개를 통한 영적 준비라는 차원에서 구약의 유월절 만찬을 새롭게 해석하여, 주님께서 제공하신 성찬식에 앞서 금식을 행했던 것이다. 고난주간을 포함하여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속하기 위해 수난 당하신 사건에 담긴 구속사적 의의를 살펴보면서 회개하고, 각성하며 절제하는 시간을 갖는것이 바로 사순절이다.

-사순절 기간
이는 부활 주일부터 거슬러 올라가 주일을 뺀 40일간, 즉 ‘재의 수요일(Ash Wendsday)'부터 부활절 전야(Easter Eve)까지의 기간이다. 교회 역사 가운데서 시대에 따라 여러 모양으로 이 절기를 지키다가 A.D 325년 니케아 회의(Council of Nicea)에서 40일로 처음 결정되었다. ’40‘이란 수는 예수께서 40일 동안 광야에서 시험 받으심, 40일간 시내 산에서의 모세의 금식, 이스라엘의 40년 간의 광야 생활, 예수의 부활에서 승천까지의 40일 등과 같이 성경에 여러번 고난과 갱신의 상징적 기간으로 등장한다.

-사순절 풍습
사순절은 초기교회 또는 중세기부터 전래된 것으로, 죄를 참회하고 절제하며 자기 훈련을 하였다. ‘재의 수요일’이란 사순절의 첫날로, 옛날에는 이 날에 참회자의 머리 위에 재를 뿌린 습관에서 유래 되었다. 사순절 기간에는 술과 육식을 금하며, 마음과 몸을 깨끗이 하고 그리스도에 대한 묵상을 하면서 지내게 된다.

(1) 성례식
1)성찬식: 사순절에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찢으신 살과 흘리신 피를 기념하는 성찬식을 행하였다.
2)세례식: 사순절이 끝나는 부활절에는 새로 영접되는 성도의 세례식이 있게 되는데, 세례 예비자들은 이때 세례와 입교(入敎)를 받기 위하여 준비기를 두고 금식과 기도로 신령한 훈련에 참여하기도 했다.

(2)금식과 절제
사순절 행사로서의 금식은 수세기 동안 매우 엄격하게 지켜졌다. 저녁전에 한끼 식사만이 허용되었으며, 물고기와 고기등의 육류는 물론 우유와 달걀로 만든 음식까지도 금지 되었다. 그러나 8세기 이후로 가면서 많이 완화되기 시작하여 14세기에는 금식 대신에 절식이 행해졌으며, 15세기에 와서는 정오에 식사하는 것이 일반적인 종교 관습이 되었고, 저녁 시간에도 간단한 식사인 콜레이션(collation)이 허용 되었다. 사순절 기간 동안에 연극, 무용, 연애소설 읽는 것과 같은 오락 행위는 금지 되었으며 화려한 옷을 입는것, 좋은 음식을 먹는것등 호화 생활도 자제 되었다. 대신 예배 참석, 기도등이 권장되었다.

(3)구제와 선행
사순절에는 범죄한 인류를 사랑하셔서 자신을 제물로 내어주신 그리스도의 뜻을 이어받는 의미에서 불우한 이웃을 위한 구제와 자선이 행해졌다. 금식 기도를 통한 고난에의 동참, 회개뿐만 아니라 불우한 이웃의 고통과 가난을 생각하기도 했던 것이다.

(4)성경 읽기.쓰기
예수님의 생애와 고난을 묵상하는 의미에서 성경 읽기 또는 쓰기를 해보는 것도 좋다.

(5)새가족 찾기
사순절 의미와 직접 관련은 없으나, 상대적으로 자기 신앙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사순절 동안 새가족 찾기를 진행할수 있다. 사순절의 시작과 동시에 새가족 찾기 작정식을 가진다음, 사순절 동안 기도와 여러 가지 노력으로 부활절에 열매로 거두도록 한다.
사순절의 가장 중요한 의미는 부활하신 주님을 영접할 준비를 하는 것이라 할수 있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진정 구주로 모셔들였는가 반성하는 기간이 되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구속사역을 기리고 하늘 나라의 백성됨을 감사하면서, 그 백성 된 자로서의 삶의 자세를 돌이키게 하는 사순절은 근신과 절제를 통해 마음 자세를 살피고 주님의 제자로서의 자세를 재정비하는 영적 훈련의 기간으로 삼아야 한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갖은 핍박을 당하면서도 하나님께 감사할수 있었던것은 우리를 향하신 그리스도의 사랑과 피흘리심으로 인해 하늘나라의 소망을 가진 백성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현대의 크리스찬은 절기에 대한 의무를 무심코 흘려 버리거나 무의미하게 보내 버리는 경향이 짙다. 부활절은 성도에게 믿음의 생동력과 승리를 맛보게 하는 환희의 절기이다. 그러나 이러한 준비과정 없이 부활절을 맞는것은 아무 준비없이 결혼식을 맞는 신부와 같다고 할수 있다. 부활절이라 해서 단 하루만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억할것이 아니라 이러한 기간을 통해 영적으로 풍부한 경험을 쌓아서 일상생활 한 가운데서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훈련을 해야 하겠다. 자기 반성에서 얻은 모슨 제거에 인색하지 않아야 하며,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는 주님의 명령을 따르는 기간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나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사랑과 고난을 깊이 묵상하며 믿음을 살피는 기간으로 삼아. 내 믿음이 현재 어디에 서 있는지 점검하며 새로운 결단을 계획하여 실천하는 기간으로 삼는 이번 사순절 기간이 되어야 하겠다.

출처/광명교회 자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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