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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젠도르프 백작(Count Nicolaus Ludwig von Zinenborf)

 

 

<선교사 열전>의 저자루스 터커(Ruth Tucker)는18세기 개신교 선교사역에 큰 공헌을 한 독일의 진젠도르프를 선교역사에 있어서 가장 위대한 선교 지도자 중 한 사람으로 평가했다.

그는 교회연합운동을 시도하였고 모리비아 형제회를 설립하였다.

루스는 진젠도르프가 개신교에 끼친 공헌을 죤 웨슬리(John Wesley)나 죠지 휫트필드(George Whitefield)에 필적한다고 평가했다.

진젠도르프는 1700년 부유한 귀족의 집에서 태어나서 귀족들만이 가질 수 있었던 공직을 수행하기 위해 법률을 공부했다. 그러나 그는 출세와 장래가 보장된 길에서 아루런 만족과 기쁨을 느낄 수 없었다.

그는 목회자가 되기를 원했으나 1719년까지 결단을 내리기 못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그가 여행 중 한 미술품 전시회에서 도메니코 펫(Domenico Fet)의 작품인 ‘이 사람을 보라’를 보게 되었다. 이 그림은 그의 인생의 항로를 바꿔놓았다.

그는 그림 속의 그리스도께서 마치 “이 모든 고통을 나는 너를 위하여 겪는데, 이제 너는 나를 위해 무엇을 주느냐?”고 물으시는 것 같은 영감을 느끼게 되었다. 그 순간부터 그는 백작으로 호화롭게 사는 것으로 만족할 수 없었다.

그는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구세주께 대한 마음의 빚을 갚아야만 했던 것이다.

 

1722년 그는 가족의 반대를 무릅쓰고 그의 영지 헤린후트(Herrnhut)에 기독교 피난자들을 받아들인 것으로 인해 모라비안 운동을 시작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많은 종교적 피난자들은 계속 몰려와 그의 영지는 집과 상점들이 건축되어 번영하게 되었다. 5년이 지난 1727년 이 공동체에 놀라운 영적 부흥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 영적 부흥은 모든 사람들에게 선교에 대한 헌신의 마음을 가져다 주게 되었고 그것이 모라비안 선교운동으로 발전되었다.

그들의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신뢰와 끊임없는 기도운동은 100년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감리교의 창설자 죤 웨슬리(John Wesley)가 모라비안들의 영성과 기도생활에 영향을 받았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웨슬리는 1738년 직접 헤린후트를 방문하였고, 그 후 모라비안들이 영국에서 모라비안 운동을 시작하도록 도왔다.

진젠도르프는 일선 선교사라기 보다는 훌륭한 선교 지도자로 헌신한 것은 사실이 있지만 그 자신도 선교 현장을 방문하여 현지 선교사들과 함께 선교 사역에 동참하였다.

그는 선교회 지도자로서 현지 선교사들의 사역을 살피고 후원하기 위해 33년간을 해외에서 보냈다고 한다.

진젠도르프는 그의 아내 에르무트(Erdmuth)와 아이들을 남겨두고 유럽이나 해외로 자주 여행하였으며 그 기간이 때로는 10년이 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그들 부부는 서로간에 가까운 사이가 아니었고 결혼생활 마지막 15년 동안에는 이름만의 부부생활을 했다는 것은 널리 알려져 있다.

그의 아내가 죽었을 때 진젠도르프는 매우 비통해 했으며, 선교로 인해 가정을 소홀히한 것에 대해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고 한다. 에르무트에 대한 슬픔이 가시자 그는 농부 출신인 안나 니취만(Anna Nitchman)과 결혼했는데

그녀는진젠도르프의 선교여행에 동행하였다고 한다.

안나는 비록 신분이 낮은 여자였지만 매우 헌신적인 성도로서 진젠도르프에게 영적인 신비주의를 추구하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

이러한 신비주의는 나중에 선교사역에 많은 문제를 야기시켰다.

백작과 모리비안 교회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지나치게 강조하였고, 모라비안 성도들은 자신들이 형편없는 존재라고 비하했다.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적 죽음에 대한 모라비안인들의 유별난 집착은 복음적인 기독교의 전통에 벗어나게 되었고

선교에 악영향을 미쳤다. 그들은 신비적인 체험을 강조하고 신앙의 실제적인 역할을 무시하였던 것이다.

이로인해 모라비안의 선교활동은 몰락 직전까지 가게 되었는데 다행히도 백작이 정상적인 상태를 회복했다.

백작은 영적 상태가 심히 어둡게 된 것을 인정하고 이에 대처했다. 이런 점에서 그는 훌륭한 지도자라고 인정받을 수 있을 것이다.

선교에 대한 진젠도르프의 최대의 공헌은 그가 많은 선교사들이 복음 증거하는 일에 일생을 헌신하도록 도전을 주었다는 것이다.
출처 : 노영환선교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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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신교 선교의 여명: 모라비아 교도의 선교


16세기 카톨릭 교회는 반 종교개혁(Counter Reformation)을 일으키며 해외선교에 박차를 가했지만

개신교는 그렇지 못하였다. 루스는 그의 저서 <선교사 열전>에서 개신교는 로마 카톨릭의 정치적, 군사적, 교리적 공세를 막아내고 유럽에서의 발판을 마련하기에 급급했을 뿐 해외선교에 헌신할 인물도, 시간적 여유도 없었다고 말한다. 게다가 당시 해외 식민지를 가지고 있는 나라들은 대부분 로마 카톨릭 국가였기 때문에 개신교도들은 해외선교의 기회를 갖기도 어려웠고 안전한 여행을 하기도 힘들었다고 한다.

루스는 또한 개신교의 신학적 이론 역시 해외 선교에 커다란 약점이 되었다고 말한다.

그 이유는 마틴 루터(Martin Luther)는 회개의 절박성만을 강조하였고,

칼빈(Calvin)의 신학노선은 구원 받을 사람들에 대한 선택과 예정의 교리에 의하여 해외선교의 중요성은 간과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17세기에 이르러 개신교의 선교활동은 다소 활기를 띄게 되었으나

미국 식민지에서의 선교사역을 제외하고는 큰 결실을 맺지 못하였다.

루스에 의하면 18세기에 이르러서야 개신교의 선교의 문이 활짝열리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그 원동력은 진젠 도르프 백작의 주도하에 일어난 모라비아 형제회(The Morarian Brethern: Unitas Fratrum)의 선교활동이었다.

18세기 동안 모라비안들은 버진제도(Vigin Islands, 1732), 그리인랜드(Greenland, 1733), 북아메리카(1734), 남아메리카(1736), 라브라도(Labrador, 1771) 등에 선교기지들을 구축하였다.

모라비안 교도들의 궁극적인 목표는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는데 이는 평신도들의 선교사에 대한 비율로도 알 수 있다. 이들은 1:60의 비율, 즉 60명의 교인 중 한 사람을 선교사로 파송한 것으로 개신교의 전체 비율이 1:5,000인 것을 생각하면 실로 엄청난 것이 아닐 수 없다.

루스는 모라비안들이 이렇게 높은 비율로 선교사들 파송할 수 있었던 것은 모든 선교사들에게 자급선교(Self-Supporting)를 권장했다는 데 있다고 말한다.

모라비안 중에 기술공들이 많았는데 그들은 해외선교에서 선교사역을 하면서도 자신들의 생업에 종사하며 장사도 하였다고 한다.

그들의 효과적인 방법은 자신의 직업으로 생계를 유지하면서 선교사의 사역을 감당하는 것이었다.

라브라도 선교에 있어서 모라비안 선교사들은 장사를 하여 남긴 돈으로 에스키모인들의 생활 필수품까지 무료로 공급해 줄 수 있었다고 한다. 그들은 에스키모인들에게 복음만 전하였을 뿐 아니라 배와 상점을 소유하고 있으므로 에스키모인들의 생산활동을 적극적으로 후원할 수 있었다.

그들의 경제력은 선교사업의 확장에 큰 도움을 주었으며 그 결과 모라비안들은 18세기의 선교를 주도할 수 있었다.

모라비안들은 지상명령의 비젼을 성실히 이행했을 뿐 아니라

19세기 현대 선교의 위대한 시대가 도래하는 데 지렛대 역활을 하였다고 루스는 말한다.


18세기의 선교를 주도한 모라비안들의 선교방법에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은 주님의 지상명령을 실천하려는 선교에 열정과 소명감을 갖고 있는 기독교인은 누구나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주신 은사와 재능을 가지고 선교에 동참할 수 있다는 것이다. 윌리암 댄커(William Danker)는 모라비안들이 남긴 최대의 공헌은, 모든 기독교인들이 자신들의 직업을 통하여 복음전파를 하고 선교사의 일을 해야만 한다는 교훈을 주었다는 데 있다고 했다. 그는 모라비안의 선교사역을 깊히 연구해 보면 설교자, 교사, 의사뿐 아니라 사업가도 복음을 온 세계에 전파하는 데 큰 역할을 담당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다음 2회에 걸쳐 모라비안 선교사로서 18세기 선교사역에 큰 공헌을 한

독일의 진젠도르프 백작(Count Nicolaus Ludwig von Zinenborf)과

게오르그 슈미트(George Schumidt)의 선교사를 여러분에게 소개하고져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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