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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이슬람화

 

유럽의 전철을 밟는 한국

한국은 저출산과 고령화로 전체인구의 약14%(643만명)의 인력을 수입해야 하는데

이로 인해 매년 30만 명의 이민자가 들어오는 나라가 됐다.

영국은 2000년대 매년 약 10만 명의 이민자가 들어왔음에도 이슬람 인구가 500만이 넘게 증가했다.

한국의 현재 무슬림 인구는 20만이다. 그러나 한국도 유럽이 밟은 전철을

빠른 속도로 따라가고 있기 때문에 영국과 같이 언제 무슬림이 500만으로 늘어날지 모른다

 

한국을 노리는 이슬람

우리가 전도의 대상으로만 여겼던 무슬림들이 반대로 한국을 전략적 전도지로 정하고

'이슬람 비전 2020' 을 선포했다.

아랍의 모 일간지 기사내용

'수십 년 안에 한국에서는 이슬람 세력이 기독교보다 많을 것이다.

오늘날 가장 적합한 이슬람 선교지는 한국이다.'

 

이슬람 연맹의 '한국선교전략'

이슬람 문화센터 건립 아랍어, 이슬람교리, 벨리댄스 강습 등을 통해 이슬람 문화를

뿌리내리게 한다

사원(모스크)건립 11개의 이슬람 사원, 4개의 이슬람 센터, 60여개의 예배소가 있으며

현재 송도에 2만평 170억 규모의 모스크가 건립중.(?)

국내 대학 공략 대학 교수와 학생들에게 대해 많는 재정 후원을 한다.

결혼 및 출산 전략 한국 여자와 결혼하여 많은 자녀들을 낳는다.

기혼자도 결혼한다(일부다처제)

한국유학생 이슬람권유치 우수한 한국인 유학생을 적극 유치하여

이슬람 우호세력 및 무슬림을 양성한다.

꾸란 번역 현대국어로 완역, 보급하여 이슬람 전파를 가속화한다.

이슬람대학 건립 현재 건립 중이며 각종 특혜 등을 통해 이슬람식으로 교육,

사회 모든 분야에 침투시킨다.

 

한국 여성 피해

 

이슬람에서는 원칙적으로 이교도와의 결혼을 금한다. 결혼하는 부부 중에 한명이

무슬림이 아니면 이슬람법에 따라 반드시 무슬림으로 입교하거나 개종해야 한다(꾸란2221).

개종하지 않으면 자녀를 볼모로 개종을 강요당하기도 한다.

 

한국 여성과의 결혼 전략

무슬림 남성은 한국국적 취득수단으로 한국여성과 결혼하려 한다.

본국에 부인이나 자녀들이 있더라도 결혼 전에 절대 밝히지 않는다.

귀국할때 버리고 가도 전혀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다.

결혼전에는 개종을 이야기하거 강요하지 않는다.

주요 공략대상은 같은 회사 근로자, 이혼자, 기독교여성

장애인, 노처녀, 다방여성, 정신지체자 등이다

첫번째 사례

학원 강사 K는 파키스탄인 A와 결혼 후 개종을 강요당하며 폭행을 당해왔으며 딸의 생명을

위협(2살 난 잠자는 아이를 옥상에서 떨어뜨리겠다고 협박)받았다.

그녀는 아이를 데리고 탈출했다.

 

두번째 사례

한국여성 S는 파키스탄인 M과 결혼했다.

M聖戰을 위해 돈을 벌어야 한다며 S에게 불법판매를 강요하다 경찰조사가 시작되자

파키스탄으로 도피했으나 또 한명의 한국인 부인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어떻게 대처해야 하나

2020년도까지 한국을 이슬람화하고 한국의 기독교를 파괴하며 우리의 안방을 점령하려고 하는

가장 경계해야 할 이단중의 이단, 이스람에 대해 우리는 너무나 모르고 완전히 무방비 상태에 있습니다.

이슬람은 수많은 영혼을 지옥으로 데려가려는 사악한 사탄마귀를 믿는 종교입니다.

저들의 계획대로 한국에 이슬람이 뿌리내리고 우리가 깨어 이슬람에 대한 대응을 제대로 하지 않는다면

5, 10년 후에는 유럽의 경우와 같이 때늦은 후회를 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슬람의 실체에 대해서보다 정확히 알고 우리 주위에서 이슬람의 유혹에 피해를 입는 일이 없도록

많은 교육과 정보 공유가 필요하다 하겠습니다.

수많은 영혼들을 미혹하는 이슬람으로부터 한국을 지키고 영원한 생명이시며 구원이신 하나님과 예수님을 믿는 신앙으로 승리하시길 기도합니다.

 

* 이슬람 주요 테러조직 *

IS (이슬람국가) : 최근 (2014)에 설립되어 이라크와 시리아를 거점으로 가장 활발하게 활동,

돈을 미키로 SNS를 통해 세계 각국에서 대원을 모집하고 있다. (한국 10대 소년도 지원)

탈레반 : 극단주의 테러의 원조로 파키스탄을 거점으로 활동한다

알카에다 : IS의 원조로 911테러의 배후

보코하람 : 나이지리아를 거점으로 마을을 습격, 2,000명을 학살하는 잔인함을 보임

알샤밥 : 소말리아를 장악하고 활동 중

* 급증하는 테러 건수와 사망자 수 *

 

2011: 2,010, 9,084

2012: 2,554, 11,539

2013: 2,836, 17,750

2014: 3,000, 32,004

2013년에는 세계 55개국에서 테러발생

2010년 전에는 거점 주위에서 소규모로 테러했으나 최근에는 전 세계로 전선을 확대하고 있음

 

(일본인 인질 살해 등)

한국인대상 테러:2006년 이후 총 66건으로 12명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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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이슬람화 그리고 한국 미래

 

 

유럽 이슬람화의 중심으로 전락한 , 그 전철 밟는

 

FIM국제선교회(대표 유해석 선교사) 창립 18주년 기념 크리스천을 위한 이슬람 세미나28일 신반포중앙교회에서 개최됐다.

 

FIM은 영국에 본부를 둔, 이슬람권에 선교사를 파송하고 무슬림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단체다. 초교파적으로 준비된 선교사들을 발굴하여 교육할 뿐 아니라, 한국에서 급속히 성장하고 있는 이슬람에 대하여 한국교회가 바른 이해를 가질 수 있도록 연구하고 있다.

   

이날 행사는 1FIM 창립기념예배, 2부 선교사 파송식, 3부 세미나로 진행됐다. 3부 이슬람 세미나에서는 유해석 선교사가 영국의 이슬람화 과정이 한국에 주는 교훈’, 소윤정 교수(아세아연합신학대학교)이슬람과 한국 여성’, 김성봉 목사(신반포중앙교회 담임)이슬람에 대한 종교개혁자 불링거의 견해를 주제로 각각 발표했다.

 

첫 번째 발표에 나선 유해석 선교사는 영국 이슬람 연구는 한국의 미래 이슬람의 성장을 알 수 있는 척도가 된다과거 영국은 청교도 혁명이 일어나고 기독교가 꽃을 피워 전 세계에 선교사를 파송하는 중심지였지만, 오늘날은 유럽 이슬람화의 중심지가 되고 있다고 진단했다.

 

유 선교사는 영국의 이슬람 성장 원인으로 이민·다산·결혼·개종을 꼽았다.

 

먼저 이민을 보면, 영국에는 1997년부터 2010년 사이에 약 550만명의 외국인이 들어왔는데, 이 중 2/3 이상이 비유럽연합 출신 이민자들이었다. 유 선교사는 영국 내 무슬림의 68%는 남아시아 출신들이라며 전체 무슬림 중 파키스탄인이 43%, 방글라데시인이 17%, 그리고 인도인들이 8%”라고 소개했다.

  

다산의 경우 영국인은 평균 1.6명을, 영국에 사는 무슬림 여성은 평균 6~7명을 낳는다. 결혼 문제도 심각하다. 무슬림 여성은 무조건 무슬림 남성과 결혼을 해야 하지만, 남성은 다르다. 무슬림 남성은 무슬림 여성, 유대인 여성, 기독교인 여성과도 결혼할 수 있다(꾸란 5:5). 무슬림 아버지와 비무슬림 어머니 사이에 자녀가 태어나면 아버지의 종교를 따르게 하는 이슬람법에 의해, 이슬람 인구는 세대가 갈수록 늘어간다.

 

개종의 경우 영국 무슬림의 12%가 백인 개종자들이다. 영국은 매년 1만명에서 5만명이 이슬람으로 개종해, 2020년이 되면 이슬람의 모스크 출석자가 기독교의 교회 출석자에 비해 월등히 많을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흑인들의 이슬람화도 이슬람의 번성에 한몫했다. 영국 흑인들의 9%는 무슬림으로, 충격적인 사실은 그들이 대부분 이전엔 기독교인이었다는 것이다. 1960년대 초반 인구조사통계에 따르면, 카브리해에서 온 흑인들 가운데 60%는 자메이카 출신이었다. 자메이카는 개신교인이 61%.

 

영국에 도착한 기독교인들은 영국교회에서 헌신하기 원했지만, 영국교회는 인종차별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 여기에 영국교회가 노예 역사에 대해 무관심했고, 노예제도 문제나 그로 인하여 형성된 인종 문제, 그리고 구조적인 불평등 구조를 해결하려고 하지 않았는데, 이슬람에서는 이를 교회 비판 기회로 활용해 많은 흑인들이 교회를 떠나 이슬람으로 개종했다.

  

무슬림 증가에 따른 다양한 문제 발생

 

영국정부는 노동력 부족과 저출산·고령화를 막기 위해 다문화정책을 시행했다. 하지만 무슬림의 테러리즘, 성폭력, 각종 폭력적인 범죄와 마약 등이 사회 문제로 번지며, 다문화 정책의 실패를 공언했다.

 

또한 무슬림 증가로 이슬람의 선교가 가속화되고, 근친결혼이 성행하며, 샤리아법이 다스리는 지역 증가, 영국 내 모스크의 증가, 이민자로 인해 영국을 떠나는 백인 증가 등의 부작용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한국의 현실을 돌아보면 영국의 경험과 비슷하다. 노동력 부족으로 인한 외국인 유입, 저출산·고령화 사회는 영국과 정확히 같은 길을 걷고 있다. 한국에는 현재 약 23만명의 무슬림이 존재한다. 20세기 말 사무엘 헌팅턴은 이슬람세계가 그 폭력성과 인구폭발로 서구문명과 충돌을 일으킬 것이라는 예측을 했는데, 오늘날 서구에서 그 현상이 나타나고 있고, 한국에서도 마찬가지가 될 가능성이 크다.

 

유 선교사는 한국의 이슬람화를 우려하며 값싼 노동력에는 대가가 있다고 경고했다. 또한 이질적인 문화는 반드시 충돌을 낳는다영국에서 있었던 7.7테러의 주범들은, 모두 영국에서 태어난 무슬림들이었다고 소개했다.

 

유 선교사는 각 나라는 이민자를 선별하여 받을 수 있다캐나다는 1/5이 외국인노동자지만 매우 까다로운 절차를 통해서 이민자를 선발하는데, 100점 만점에 교육 정도(25), 언어 실력(2), 직업에 따른 경험(21), 나이(10), 직업의 숙련도(10), 또한 재정, 건강, 범죄 경험 유무 등을 확인받아야 한다고 설명했다.

 

한국교회에 대한 제언으로는 교회가 건강해야 하고, 다문화 시대에 맞게 문을 활짝 열어야 한다며 영국교회가 인종차별로 인해 실패한 사례를 상기시키는 동시에 한국사회에는 그보다 더 심한 차별이 존재함을 지적했다. 이 외에도 이슬람은 신앙전승률이 100%라며 신앙의 전승률을 높여야 한다고 했다.

 

유 선교사는 이슬람으로 인하여 꾸란을 연구하고 종교개혁을 가속화시켰던 마틴 루터의 말을 인용, “이슬람에 대항하여 싸우지 말자는 것이 아니라, 그 전에 하나님 앞에 우리 자신을 더 개선하자며 한국교회가 회개하고 원시 복음으로 돌아가면 이슬람의 증가는 하나님께서 막으실 것이라고 한 뒤 강연을 마쳤다.

 

이에 앞서 창립기념예배에서 김지호 목사(칼빈대학교 대학원장)세계선교의 실행위원, 기도라는 제목의 설교에서 기도는 성도가 세계선교의 실행위원으로 연합해, 선교의 주체이신 하나님께 간구하는 일이라고 했다.

  

김 목사는 선교에서 가장 중요한 두 가지는 하나님의 역사하심에 의존하는 것과, 성도의 기도 후원에 의존하는 것이라며 선교지에서 사탄의 아들들이 선교사들을 두렵고 떨리는 자리로 몰고 갈 것이지만, 여러분들이 선교사들을 위해 뜨겁게 기도한다는 소식이 선교사들에게 전해지고 그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된다는 것을 믿으면, 선교사들은 담대함을 얻을 것이라고 말했다.

2부 파송식에서는 제럴드 알렉산더(Gerald Alexander)·신상희·김동우·김선화·정혜란 선교사가 인도네시아 등 이슬람 국가들로 파송됐다.

하 석수 기자 ssha@chtoday.co.kr (크리스천투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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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한국 이슬람의 어제와 오늘

 

- Islam in Korea in the 21st Century ; The Past and Present’  

저자 : 이정순 | 출판사 : 도서출판 대서 

발행일 : 2012-11-15 | (152*225)mm 280p | 978-89-92619-73-8

 

머리말

   

한국사회는 전 세계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고령화하고 있어 2045년에는 세계 최고령 국가가 될 것이란 전망이 나왔다. 2012619일 국제금융센터에 따르면, 영국투자은행인 로열뱅크 오브 스코틀랜드(RBS: The Royal Bank of Scotland )인구 고령화가 한국경제에 미치는 영향이라는 보고서를 통해 한국인의 평균나이가 2045년에는 50세로 세계에서 가장 높을 것으로 전망했다. 인구 고령화로 한국의 노동인구는 2016년부터 감소하기 시작해 2020년부터는 유럽과 일본의 노동인구 감소 속도보다 빨라질 것으로 예상했다. 이러한 전망에 따라 한국은 앞으로 이주노동자를 더 필요로 하게 될 것이라는 전망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이주 무슬림 노동자들이 현재보다도 더 많이 한국에 유입될 가능성이 높음을 시사한다. 이에 우리는 한국 이슬람이 어디까지 와 있는가를 올바로 인식할 필요가 있다.

 

이슬람은 아라비아 반도의 사막에서 발흥되어 지난 1400여년 동안 전 세계적으로 확산하며 발전되었다. 오늘날 우리는 무슬림을 중동뿐만 아니라 아프리카, 남미, 유럽과 북미, 아시아등 전 세계어디서든지 쉽게 만날 수 있다. 이슬람은 각 나라의 문화와 접촉해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 내며 그들 나름대로 정체성을 형성하며 그 뿌리를 내리고 있다. 따라서 21세기 이슬람 문화는 과거의 전통과 현대의 문명이 혼합된 특유한 문화이다. 현재 전 세계 무슬림 인구는 약 16억 명이며, 세계 인구의 4분의 1이다. 유엔은 이와 같은 추세라면 2200년이면 이슬람이 세계 최대의 종교가 될 것이라고 예측하기도 했다.

 

오늘날 한국을 비롯하여 비이슬람 국가에서 무슬림들의 수적 증가율이 높아지고 있다. 15만 명에 이르는 무슬림들을 한국의 전역에서 발견할 수 있다. 무슬림은 이제 더 이상 먼 나라 사람들이 아니라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이웃으로 살아가고 있다. 이슬람은 다양한 모습으로 한국인들에게 다가오고 있다. 한국에서 이슬람은 이슬람은 평화라는 태도를 내세우며 다가오므로 공격적인 모습은 아닐지라도 분명한 것은 파장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21세기에 들어와 한국은 더 이상 단일 문화국가가 아닌 다문화국가로 급격하게 변화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한국에서 무슬림의 증가가 단일문화의 한국사회를 다문화사회로 점차 변화시키기 시작하는 계기가 되고 있다. 무슬림들이 더 이상 한국에 소수로 자리 잡고 살아가는 것이 아님을 의미한다. 그들은 한국사회에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다수로서의 정체성과 문화를 형성해가고 있다. 따라서 무슬림에 대한 한국사회의 관심과 이해가 더욱 깊이 있게 요구되고 있다.

   

2001년도 한국이슬람중앙회측은 한국인 무슬림이 34천여명이라고 발표하였다. 한겨레신문2011517-20일까지 한국의 무슬림이라는 주제 하에 4일간 연속기사를 내보냈다. 517일자 한겨레신문1면에는 한국에 13~14만 명의 무슬림이 살고 있으며, 이 가운데 적어도 45천여 명은 한국인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이러한 통계에 의하면, 한국인 무슬림은 지난 10년 동안 32.3%의 성장률을 보이고 있다.

 

역사적으로 이슬람과 한국과의 문화적 교류는 신라시대부터 시작되었다. 근대에 와서는 1950년대 한국전쟁에 유엔군으로 참전한 터키 군인들이 이슬람을 전파했지만 1960년대까지 그 활동은 매우 미약했다. 1970-80년대 중동에 진출한 한국인 건설근로자들 중에 일부가 무슬림이 되었다. 1980-90년대 이슬람권 국가에 유학한 한국인들이 유학 중에 무슬림이 되어 귀국 후에 책출판과 대중 매체를 통하여 이슬람을 적극적으로 소개하였다. 또한 노동인력으로 한국에 온 외국인 무슬림들과 접촉한 한국인들 중 일부가 무슬림이 되기도 하였다.

   

이슬람은 막강한 오일머니를 통해 국내 곳곳에 모스크를 세우고 성인들뿐만 아니라 어린아이들까지 포교 대상으로 삼고 있다. 19765월 서울 용산구 한남동에서 한국 역사상 최초로 중앙모스크가 개원했다. 그 이후 20128월 현재 국내에 모스크가 17(11개의 모스크와 모스크 역할을 하는 6개의 문화센터)이다. 모스크로의 발전을 기다리고 있는 이슬람 임시 예배소는 서울 지역 5개를 비롯하여 광주, 인천, 대구, 부산, 대전 등 전국에 60여개소가 있다. 20111216일자 한국이슬람교의주간무슬림에는 남이섬에 관광휴양지내에 있는 종합음식상가(밥플렉스) 건물 2층에 무슬림 관광객들을 위한 예배실과 우두실이 마련되었다고 안내하고 있다.

 

200811국민일보가 글로벌리서치에 의뢰해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 응답자의 87.2%이슬람의 내용이나 특징에 대해 모른다고 답했다. 무슬림이 점진적으로 증가하는 것에 대해서도 크게 개의치 않는 것으로 조사됐다. 20081210일 명동 청어람에서 열린 이슬람포비아(Islamophobia: 이슬람 혐오증ㆍ공포증) 실체를 진단한다의 주제 포럼에서 중동지역 K선교사는 현재 이슬람의 포교활동에 관련된 보도 내용 중 상당수가 근거가 불충분하거나 사실이 아닌 경우가 많다라고 지적했다. 또한 2009418일 한국선교신학회 이슬람선교포럼에서 K교수는 이슬람포비아는 타당성이 결여된 음모이론에 가까운 일방적인 주장이라고 단언하며 이런 위기감으로 인해 보수ㆍ근본적 선교사역자들이 음모론을 확산시켰다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K선교사와 K교수의 주장이 실린 기사가 한국인 무슬림의 홈페이지에 올려져 있어 오히려 이슬람 측에서 역으로 이용하고 있다.

 

현재 이슬람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매우 편식되어 있다. 한국 선교단체 간의 이슬람에 대한 인식이 다르고, 이슬람에 대하여 강의하는 강사들끼리도 의견이 다르다. 그동안 이슬람 포용론경계론으로 양분화 되어 있었다. 이로 말미암아 이슬람에 대하여 잘 모르는 성도들만 혼란이 더 가증되고 있다. 또한 선교현장에서 사역하는 선교사들에게도 혼란을 주고 있다. 이슬람에 대한 더욱 올바른 이해와 무슬림을 향한 사역에 전략적인 관심이 모아져야 할 때이다.

  

이슬람을 올바로 알려고 할 때 이슬람 국가별로 서로 다른 양상이 있음을 알고 그것에 맞는 이해와 연구를 해야할 것이다. 이슬람권지역에서 사역하는 사역자라도 자신의 지역에 대해서만 잘 아는 것이지 다른 모든 이슬람권지역의 사역을 깊이 연구하지 않고 다 아는 것처럼 이야기한다면 분명 실제 상황과는 다른 큰 차이를 가져오게 될 것이다. 610년에 발흥하여 21세기까지이어져 오는 약 1400년의 역사를 가진 이슬람을 오늘의 시각만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 그 시대별 특징과 이슬람이 전파된 나라마다 다른 환경에서 변형된 이슬람인 것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꾸란이 쓰인 7세기 이슬람과 21세기의 이슬람은 공통점이 있지만 다른 면이 매우 많다.

   

한국 이슬람이 출판한 책들 중에는 한국인들이 이슬람에 대해 서구적 관점으로 인한 편견을 갖지 않도록 하기 위한다고 하면서 객관성 보다는 이슬람을 다양하게 포장하고 있는 것들이 많다. 이런 정보는 한국사회에 또 다른 편견을 갖게 한다.

   

필자는 1980년부터 12월 말레이시아를 처음 방문하여 큰 충격을 받았다. 특히 금으로 된 원형 모스크와 더운 날씨에 베일을 착용하고 길거리에 다니는 여성들과 여중생들도 교복으로 베일용 스카프를 착용하고 다니는 모습 등이 이슬람에 관심을 갖게 하였다. 그 후 2012년 겨울 쿠웨이트를 방문하기 까지, 필자는 지난 32년 동안 이슬람에 관심을 가지고 중동과 북 아프리카의 이슬람 국가를 포함하여 유럽과 북미, 남미, 동ㆍ서남아시아, 중앙아시아, 아프리카 등을 방문하여 현장조사와 학문적 연구를 하였다. 학문적 연구를 더 깊이하기 위하여 2004-2012년 겨울, 봄 학기 시작 전에 영국 옥스퍼드 대학교(Oxford University)의 첫 학기 동안 방문연구원(Visiting Fellow)으로 네 번과 여름에 한 번, 모두 다섯 번 방문하였다.

 

2006219일 필자는 영국 옥스퍼드대학교에서 방문연구를 한 후 귀국길에 카타르 항공에 탑승했다. 카타르에서 한국에 오는 중간에 북경에서 한 번 더 탑승객을 내려주고 마지막 기착지로 인천에 들어오는 여정이었다. 북경에서 많은 승객이 내리고 나니 비행기가 텅 빈 것처럼 몇 십 명 안남었는데 비행기 중간에 무슬림 소녀가 혼자 앉아있기에 그쪽으로 다가가서 영어로 말을 걸었다. 인사를 나누다 보니, 무슬림 소녀가 저 한국 사람이 예요라고 말을 하기에 깜짝 놀랐다. ’아마 부모님 중에 한명이 외국인인가 보다하고 질문하니 부모님이 모두 한국인이라고 했다. 다만 부모가 무슬림들이기 때문에 아랍어를 공부하러 무슬림 소녀(K)가 아프리카 수단에 갔다가 방학을 맞이하여 한국에 입국하면서 평상복이 아닌 무슬림 여성들의 의상을 착용하고 비행기를 탄 것이었다. 이 일을 계기로 필자는 한국인 무슬림들에 대하여 더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이에 필자는 평소에 관심을 가지고 수집하여 온 한국인 무슬림에 대한 자료를 정리하여 한국인 이슬람 개종 요인을 연구하여 학회지에 발표하였다. 그리고 전에 발표한 모스크의 역할과 상징성은 책으로 엮고자 약간의 수정과 편집을 하였다. 이 책에서 무슬림 여성의 베일외에는 무슬림 여성의 삶과 문화에 대하여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필자의 다른 책 이슬람 문화와 여성에 구체적으로 쓰여 있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한국 이슬람의 역사는 이미 역사를 연구한 분들의 책을 주로 인용하였다. 그러나 한국인의 이슬람 개종 사례는 이에 대한 공신력과 객관성을 높이기 위하여 추측성의 보도가 아닌 필자가 오랫동안 수집한 한국의 주요 신문의 기사들과 한국이슬람중앙회의 자료 등을 인용하였다. 이것은 한국 이슬람에 대하여 막연한 추측이나 소문이 아닌 구체적인 실체에 근거해 현실을 직시하기 위해서이다. 신문 기사에 난 사람들의 이름은 약자로 처리하였다.

이 책은 이슬람과 기독교의 신학적인 논쟁이나 이슬람포비아를 부추기는 것이 아니며,

한국사회와 한국교회가 한국인 무슬림의 증가 현상을 올바로 인식하여 이해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또한 신학적인 것보다는 우리가 이슬람에 대하여 이해하기 위하여 필요한 일반적인 이슬람의 역사, 종교, 문화ㆍ사회적 관점과 무슬림들의 신앙과 행위에 대하여 서술하였다.

특히 한국사회와 교회가 무슬림을 단순히 비방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실상과 확산에 대한 좀 더 바른 이해를 갖도록 하려는 데에 있다.

 

이 책이 독자들에게 21세기 한국 이슬람을 이해하는데 유용성을 제공하며 올바른 안목을 기르는데 실제적인 도움이 되기를 기대한다. 이 책을 출판하는데 수고를 아끼지 않은 도서출판 대서에 진심으로 감사한다. (이정순. 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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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일스에서 온 편지] 이슬람이 성장하게 된 원인

 

유해석 선교사(FIM선교회 대표)

 

제가 1990년 처음 영국에 공부하러 왔을 때, 영국 무슬림 인구는 110만 명이었습니다. 2001년 인구조사에서 종교를 쓰도록 했는데 무슬림 인구는 150만 명이었습니다. 그런데 2011년에 280만 명으로 늘었습니다. 10년 사이에 이슬람 인구는 130만 명이 늘었습니다. 인구조사에 응한 사람들은 합법적인 시민들입니다. 불법체류자를 포함하면 약 5백만 명으로 추산됩니다.

 

이슬람이 성장하게 된 원인은

 

첫째, 이민입니다.

 

2000년에 들어서서 평균 매년 10만 명 이상이 이민왔습니다. 이민자 가운데 무슬림 인구 비율이 높았습니다.

 

둘째, 다산입니다.

 

영국에서 무슬림은 평균 6-7명의 자녀를 낳습니다. 무함마드가 마지막 설교에서 자녀를 많이 낳아 이슬람을 번성케 하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셋째, 결혼입니다.

 

쿠란에 의하면 무슬림 여성은 무슬림 남성과 결혼해야 하지만, 무슬림 남성은 유대인·기독교인·무슬림 여성과 결혼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자녀를 낳으면 이슬람법에 의하여 아버지의 종교를 따릅니다.

 

넷째, 개종입니다.

 

유럽과 미국에서 이슬람으로 개종하는 사람들의 80% 이상이 기독교인이었던 사람들입니다. 테러가 증가한다는 것은 이슬람 인구가 늘어가면서 생기는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이슬람의 세계관에 의하면 평화의 집(Dar al-Salam)과 전쟁의 집(Dar al-Harb)이 있는데, 이슬람을 믿는 사람은 평화의 집에 살고 믿지 않는 사람은 전쟁의 집에 살기 때문에 전쟁의 대상이 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슬람 인구가 늘어나는 곳마다 테러가 일어납니다.

 

저는 지난 318일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 ‘한국 주요 이단 및 이슬람 대책 세미나에서 논문 발표를 했습니다.

이 자리에서 저는 앞으로 10년 안에 한국 무슬림 인구는 약 100만 명에 육박할 것이라고 발표했습니다.

 

10년 전에(2003) “우리 곁에 다가온 이슬람이라는 책을 처음 출판했습니다.

그 서문에 우리 주변 사람들이 이슬람으로 개종했다는 이야기를 듣기 전에 이슬람에 대하여 알아야 한다고 썼습니다.

더블어 앞으로 10년 안에 한국 무슬림 인구는 약 20만 명이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10년이 지난 2013년 말 통계에 의하면, 한국에 거주하는 이슬람 인구는 약 23만 명입니다.

영국에 2000년대에 매년 약 10만 명의 이민자가 들어왔는데 이슬람이 이렇게 급증했습니다.

 

한국은 지금 저출산과 고령화로 인하여 경쟁력을 유지하기 위하여

전체 인구의 약 14%(643만 명)를 수입해야 한다는 예측으로 인하여,

매년 약 30만 명의 이민자가 들어오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따라서 한국의 이슬람화는 가속화될 가능성이 큽니다.

 

이제는 기독교인들이 이슬람에 대하여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슬람은 기독교 이단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저의 생각이 아니라 마틴 루터, 츠빙글리, 그리고 존 칼빈 등 종교개혁자들의 견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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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이슬람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전망

 

 들어가는 말

 

최근 세계통계보고서에 의하면 전 세계 인구는 72억 명이 넘었다. 그 가운데 23% , 16억의 무슬림이 살고 있다. 전 세계 인구 다섯 명 가운데 한명이 이슬람 종교를 가진 무슬림(Muslim)이다. 지난 14세기 동안에 서구와 이슬람은 경쟁과 긴장을 동반한 대결의 역사였다. 그러나 한국역사를 돌아보면 이슬람은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좋은 관계로 발전되어 왔다. 최근에는 다문화와 함께 이슬람은 더욱 알려지고 있다.

 

이와 더불어 얼마 전 정부가 추진하려 했던 이슬람 금융을 통해서 우리는 이슬람에 대해 조금 더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슬람은 전통적으로 우리에게 생소한 종교이다. 한국에게 이처럼 이슬람이 생소했던 이유는 아마도 지리적 위치와 획일적인 문화 때문일 것이다. 이슬람이 발흥했던 아라비아 반도는 지금도 한국에서 항공편으로 약10시간 정도가 소요될 정도의 거리이다. 그렇기에 과거 아라비아 반도에서 한국까지 이슬람이 영향을 미치기에는 교통편이 발달되지 않아 어려움이 있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획일적인 한국 정서에 외래 종교나 문화가 비집고 들어설 틈은 거의 없었을 것이다. 이런 이유들로 지금까지는 한국에서 이슬람을 찾아보기란 매우 어려웠다.

 

한국과 이슬람의 관계는 한국의 고대 문헌 등에서 교류했던 흔적들을 찾아볼 수 있다. 한국역사에서 이슬람 종교를 가지고 있었던 아랍인들을 만나게 된 문헌의 기록은 신라 시대부터이다. 하지만 당시에는 그 세력이 미미하였고, 따라서 우리에게 이슬람은 낯선 존재였다. 그 당시 무슬림들은 이슬람이라는 종교를 전파하기 위하여 한국에 왔다기보다는 교역이 더 큰 목적이었겠지만, 한국과의 접촉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최근 들어 외국인의 유입증가와 함께 이슬람은 한국에서 급격하게 성장하고 있다. 또한 이슬람은 수쿠크(Sukuk) 법에 대한 논쟁과 더불어 사회 전면에서 두각을 드러내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이슬람이 한국에 어떻게 처음 접촉했는지, 한국역사 속에서 어떤 과정이 있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더 나아가 국내 이슬람의 현황을 파악해서 우리 곁에 얼마나 성큼 다가와 있는지를 알아보고, 급격하게 성장하고 있는 이슬람에 대한 대안을 세워보고자 한다.

 

. 한국이슬람의 어제

 

1. 통일 신라에서 18세기 말엽까지

 

1) 신라시대와 이슬람

 

한국과 중세 아랍인과의 접촉은 아랍 고전의 여러 문헌들에서 소개되고 있는데, 최초로 아랍 사회에서 한국이 언급된 나라는 신라였다. -아랍어에서 신라를 뜻하는 이름은 ‘al-Shila’인데, ‘al’은 관사로 사용되기 때문에 ‘Sila’라는 음역은 신라라고 올바르게 사용되었다.- 중세 아랍인들의 문헌에는 신라의 모습이 여러 차례 등장하고 있는데, 그 중에서 몇 가지만 소개한다면 다음과 같다.

 

9세기 중엽에 술라이만(al-Sulaiman)이라는 아랍상인이 살았는데, 그는 중국과 인도의 소식(Akhbar al-Sin wal-Hind, A.D. 851)'에서 신라의 지정학적 위치를 중국의 동쪽 바다에 자리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를 통해서 신라의 존재가 이미 아랍인들에게 알려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술라이만이 밝힌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중국의) 해안에 신라라는 섬들이 있다. 그곳의 주민들은 피부가 희다 그들은 중국 황제에게 선물을 보내고 있다. 만약에 그렇게 하지 않으면 하늘은 그들에게 비를 내려주지 않을 것이라고 그들은 말한다. 우리 동료들 가운데 아무도 그곳에 가보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에 관한 소식을 들을 수 없었다. 그들은 또한 흰 매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페르시아 우편 관리인이었던 이븐 후르다드비(Ibn Khurdadbid)는 자신의 저서 도로들 및 왕국들 안내서에서 신라를 묘사하고 있는데, 그는 신라의 지정학적 위치뿐만 아니라 신라에는 이슬람교도들이 거주하고 있다고도 밝혔다. 그리고 그들은 신라의 아름다움에 빠져서 영구히 정착하고 싶어 한다고 밝혔다.

 

중국의 맨 끝에 신라라는 나라가 있는데, 금이 풍부하다. 이슬람이 이 나라에 상륙하면 그곳의 아름다움에 끌려서 영구히 정착하고 떠나려 하지 않는다.

 

중세의 지리학자인 이드리시(al-Idrisi)먼 나라를 종횡할 꿈을 가진 자들의 산보(Nuahat al-mushtaq fiikhtiraq al-afaq)'에서 신라를 소개하고 있으며, 세계지도에 신라를 섬나라로 표시하였다. 그리고 이 지도는 서양에서 한국을 처음으로 등장시킨 벨호(B.Velho)의 세계지도보다 408년이나 앞선 것이다. 이를 통해 볼 때, 아랍이 서양보다 먼저 신라와 접촉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곳(신라)을 방문한 사람은 누구나 정착하여 나오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그곳이 매우 풍족하고 이로운 것이 많은데 있다. 그 가운데서도 금은 너무나 흔해 그곳 주민들은 개의 사슬이나 원숭이의 목테도 금으로 만든다.

 

이처럼 중세의 아랍인들에게 있어서 신라는 매우 아름다우며, 금이 많은 나라로 인식되어 있었다. 또한 아랍인들은 신라에 오면 정착하여 떠나기를 싫어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중세의 기록들을 통해서 우리는 신라시대에 이미 아랍 사회가 한국과 접촉하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신라시대에 이슬람과 교류가 있었다는 것을 역사적 자료들을 통해 찾아볼 수가 있다. 아랍 지역에서 신라로 무역을 하기 위해 왔을 뿐 아니라, 신라에서도 아랍 지역으로 갔던 내용이 문헌에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문헌 이외에도 경주에 있는 무인석상은 신라시대에 아랍과 교류가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경주시 외동면 괘릉리에는 원성왕(元聖王, 8C)으로 추정되는 괘릉이 있는데, 그 옆에 무인석상이 하나 서 있다. 보물1427로 지정되어 있는 이 무인석상은 신장이 약 2m 50cm쯤 되며, 곱슬 수염과 곱슬 머리의 늠름한 무인의 모습을 하고 있다. 또 그 머리에는 무슬림의 전통복장인 터번을 쓰고 있다. 이들은 무장을 하지 않았으며, 그 모습은 아시아 계통이라기보다는 중세 서역인의 모습과 매우 유사하다. 안강의 흥덕왕(興德王, 9C)능에도 이와 비슷한 무인석상이 있는데 그 모습은 괘릉의 무인석상과 매우 유사하다.

 

이러한 무인석상은 당시 중국 매우능묘에 서역 무인들의 모습을 호인용으로 만든 것에 기인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신라 왕릉의 위엄과 수호적인 역할의 기능을 하였다. 이를 토대로 신라 왕조 때 이미 서역인들의 존재가 있었음을 알 수 있고, 이들이 신라의 왕조와 호전적인 관계를 맺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신라의 대표적 향가이자 설화인 처용설화(處容說話)’에 등장하는 처용의 일행은 신라 제 49대 헌강왕(憲康王) 5(879) 3월에 개운포(開雲浦)에 나타났는데 이들의 용모는 아시아 사람들이 아니라 아랍 무슬림으로 묘사되고 있다. 삼국유사에는 처용의 존재를 기록하고 있다. 개운포에 등장하는 처용을 일관(日官)이 호전적으로 묘사함에 따라 헌강왕은 이들을 환영하고 서울에서 집과 벼슬을 주어 살게 하였다.

 

삼국사기에도 처용의 존재에 대해서 서술하고 있다.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의 기술들로 보아서 처용은 개운포를 통해서 신라와 접촉했던 이방인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은 이방에서 동해를 거쳐 신라에 접촉하였으며, 처용의 모습은 무성한 눈썹, 우그러진 귀, 붉은 모양, 우뚝 솟은 코, 밀어나온 턱, 숙어진 어깨로 묘사되고 있다. 이는 처용이 동양 사람이 아니라 아랍인이라는 것을 짐작하게 하는 것이다. 처용설화는 아랍 사회가 신라와 접촉했다는 것을 유추하게 하는 것이다. 신라인도 아랍에 접촉했던 기록이 있다.

 

신라의 대덕고승인 혜초는 한국인으로서 최초로 아랍에 갔던 인물이었다. 인도와 페르시아, 아랍, 중앙아시아에 관한 견문록인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을 작성하였다. 혜초는 아랍국에 대해서 상세하게 묘사하고 있는데, 그가 방문할 당시 아랍 제국은 칼리프 시대(632-661) 후인 우마이야왕조(661-750)시대였다. 우마이야왕조 시대에는 수도를 메디나에서 시리아의 다마스커스로 옮겼는데, 혜초가 묘사한 소불림국(小佛臨國)은 당시 이슬람 제국의 수도였던 다마스커스를 의미한다.

 

혜초는 아랍 사람들이 입고 있는 복장을 묘사하면서 헐렁한 적삼을 입고 한 장의 모직 천을 걸친다.”라고 하였는데, 이는 오늘날의 이슬람의 전통복장과 유사함을 알 수 있다. 또한 혜초는 대식국을 가리켜 불법을 알지 못하는 나라이며, 이슬람 신앙을 가졌기에 알라 외의 다른 누구에게도 절을 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다.

 

신라와 아랍 간에 있었던 문명의 교역에 대한 증거로 이븐 쿠르다지바(Ibn Khurdadhibah)제도로 및 제왕국지(845)’를 들 수 있다. 그는 신라의 지리적 위치를 밝히고 신라와의 무역의 목록들을 나열하고 있다. 비단, , 사향, 침향, 말안장, 초피, 도기, 범포, 육계 등은 신라가 수출한 물품들이었고, 아랍이 신라에게 수출한 물품은 유향과 안식향을 비롯한 아랍산 향료, 신라고분과 사찰에서 출토된 각종 유리기구, 일반서민들도 애용하던 구슬 같은 기호품, 단검이나 토용 등이었다.

 

신라 고분인 금관총, 금령총, 서봉총, 천마총, 황남동 98호 남분 및 북분에서는 20점 가량의 유리기구가 출토되었는데 이는 아랍계 상인들을 통해서 신라에 들어온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이러한 교역 물품을 통해서 아랍과 신라 사이에 문명의 접촉과 교류가 진행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2) 고려시대와 이슬람

 

고려시대에 들어와서는 신라시대 때보다 아랍과의 교류가 보다 원활하게 이루어졌다. 고려 시대 때에는 원제국을 통하여 아랍문명이 한반도에 본격적으로 전파되기 시작하였으며, 처음으로 움마(Ummah, 이슬람공동체)가 부분적으로 형성되었다. 기록상 최초로 한반도에 진출한 무슬림은 고려 현종(顯宗) 15년인 1024년에 등장한다. 고려사 현종 15년의 기록을 보면 이를 알 수 있다.

 

9월 을미일에 김인위(金因渭)를 상서 우복야 참지정사로 임명하였다가 이내 사직케 하였다. 갑인일에 흑수말갈의 아이고(阿里古)가 우리나라에 왔다. 9월 대식국의 열라자(悅羅慈) 1백 명이 와서 토산물을 바쳤다.

 

고려사의 기록을 통해서 고려사회 내에 무슬림 상인들이 무역을 주목적으로 일시에 백 명 이상의 인원으로 구성된 대규모 사절단의 형태로 방한하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이들이 이미 고려와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교역 관계에 있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고려와 아랍간의 교류는 한반도와 중국을 잇는 해상항로를 통해 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아랍 상인들이 대거 고려로 교역 여행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중국의 송나라와 아랍과의 국제무역의 번성과 고려와 송간의 원활했던 교역관계를 기반으로 하는데, 당시 송대는 이슬람 세력 팽창의 시기로서 무슬림 상인그룹에 의한 국제무역의 번성기였다. 따라서 아랍은 송과의 무역뿐만 아니라 고려와도 활발한 교류를 하고 있었다.

 

이러한 문물의 교류는 주로 공()무역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대식 상인들이 고려에 거주하는 동안 특별한 대우를 받게 되는데, 그것은 조정에서 거행된 주요 국가행사에 외국 사절들과 함께 참석할 정도로 환영을 받게 되는 것이었다. 이들은 왕실과의 긴밀한 공()무역관계를 통해서 점차적으로 고려 사회 안에 거주하기 시작하였다.

 

오늘날 우리 주위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성() 중에도 고려시대 때 시작된 성이 있다. 이러한 성()들 가운데에는 당시 무슬림들이 왕으로부터 하사받은 것이 있다. 무슬림들 중에 일부는 고려에 귀화하였는데, 이를 통해 성()을 부여받게 된 것이다.

 

2) 고려시대와 이슬람

 

삼가(三歌) 장순룡(張舜龍)1274년 고려 충렬왕의 몽골비()인 제국공주의 종관으로 고려에 왔는데 그는 투르크계 위그르 출신의 무슬림으로서 한국에 귀화한 최초의 무슬림이었다. 고려사 제 123권을 보면 장순룡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

 

장순룡은 근본이 회회족이며 처음 이름은 삼가이다. 그의 부친 장경은 원나라 세조를 섬겨 필도적 벼슬을 했다. 장순룡은 제국 공주의 겁령구로 와서 낭장 벼슬을 받았고 여러 관직을 거쳐서 장군으로 승진되면서 이 성명을 고쳤다.

 

여기에서 사용된 삼가의 의미는 세 번째 형으로서 투르크계 위구르인을 지칭한다. 장순룡에 대한 이야기는 덕수 장씨 가승보에서도 등장한다. 장순룡은 본래 무슬림으로서 원나라의 관리였으나, 원나라의 공주의 시종관으로 고려에 오게 되었다. 그는 고려 사회에 정착하면서 귀화한 최초의 무슬림이었는데, 고려와 원 사이의 외교조정의 역할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고려의 충렬왕과 원의 세조에게서 신임을 얻어서 두 나라 모두에게서 높은 관직을 받게 되었다. 장순룡의 후손들은 25대에 걸쳐서 고려와 조선조에 관료와 학자, 무관의 관직을 이어갔는데 지금은 경기 중부지방을 중심으로 전국에 분포해 있다.

 

민보(閔甫)라는 인물도 고려 사회 안에 귀화한 무슬림이었는데, 그는 고려사 제31권에서 처음으로 등장한다. 민보는 충렬왕 1294년에 장군의 신분으로 원나라의 조공을 드리러 갔는데 1299년에는 대장군의 신분으로 원나라로 가게 되었고, 1301년과 1303년에는 대호군의 신분으로 원나라에 가게 되었다. 또한 1305년에 상호군의 신분으로 원나라에 가게 되는데 고려사에 나타난 민보는 고려 사회에서 무관을 담당하는 관료로서 원나라의 조공을 드리는 역할을 수행한 것으로 보인다. 민보는 무슬림 사람으로서 고려국으로 귀화함으로서 무관으로서 역할을 하였으며 원나라의 관계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인물이었다.

 

설손(偰遜)은 고려사 제 112권에 등장하는 귀화한 무슬림이다. 설손은 무슬림으로서 원나라의 황제에게 경전을 가르치는 학자였는데 홍건적의 난을 피하여 고려에 와서 귀화하였던 인물이다. 그는 왕의 재정적 지원을 받고 고려 사회에서 거주하게 되었다.

 

고려사 속에서 나타난 장순룡, 민보, 설손과 같은 인물들은 고려 사회 내에서 귀화했던 무슬림들이다. 이들은 조정의 지원을 받으며 고려 사회 내에서 대내외적인 역할을 담당했던 관료였다. 이들이 가지고 있던 무슬림 신앙이 얼마나 존속되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고려 사회에 귀화해서 살았던 이들이 무슬림 신앙과 생활을 추구하지 않았다고는 말할 수 없다.

 

이슬람은 하나의 사회ㆍ경제적 세력으로 고려사회에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이들은 주로 개성과 그 주변에 거주했었는데 이는 고려 시대에 거주했던 무슬림들이 조정과 깊은 연관을 맺고 있었기 때문이다. 고려 사회 내에서 무슬림들은 자신들의 생활방식들을 어느 정도 유지하면서 고려의 조정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3) 조선시대와 이슬람

 

조선시대에 들어서도 고려시대에 이어서 이슬람과의 교류가 계속 되어졌다. 조선시대에는 무슬림들의 종교 행위가 보장되었으며, 이슬람의 과학기술과 공예기술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기 시작했다. 조선왕조실록에도 이슬람과의 문명의 교류에 관련한 서술이 잘 나타나 있다.

 

조정에서는 회회인들을 호의적으로 대하고 있었으며, 조선 사회 내에서 가족을 이루고 살도록 하였다. 또한 무슬림 상인뿐 아니라 무슬림 종교 지도자를 거주하도록 하였는데, 이는 이슬람 종교의식을 보장하고 있다는 것을 내포하는 것이다. 이처럼 종교지도자가 거주하였을 정도로 이슬람은 조선시대에 정착될 수 있었다.

 

조정은 이슬람 종교 지도자인 회회 사문들의 생활을 지원을 함으로서, 이들의 복지와 생계를 도왔다. 회회 사문들의 존재는 조선시대 사회 안에 무슬림들이 움마를 이루고 살았다는 것이고, 조정이 이슬람의 종교를 호의적으로 인정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고유한 이슬람 신앙생활을 유지할 수 있도록 지원하였다는 것이다.

 

세종이 즉위했던 원년에 회회인들은 공식적인 조하의 자리에서 불교의 승도와 함께 등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를 통해서 조선의 조정이 불교와 이슬람을 통솔하고 있으며, 이슬람은 이미 조정이 인정하는 하나의 공식적인 종교임을 알 수 있다. 회회인들이 임금을 찬양하는 송축 의식을 하였다는 것은 조정의 공식적인 행사와 의례에서 무슬림들을 포함시켰을 정도로 중요한 집단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세종이 왕세자와 문관과 무관의 신하들과 함께 조정의 조례행사를 실시할 때에 귀화한 회회인들이 조하에 참여하였는데, 이는 고려시대뿐만 아니라 조선 시대에도 회회인들이 귀화했었으며, 이들은 조정의 중요한 행사에 참석할 정도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여러 문물들과 기술들을 교류하는 수준으로서, 고려시대보다 더 활발한 이슬람과의 교류가 이루어졌다. 특별히 이슬람력(Islamic calendar)은 조선의 역법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으며, 이로 인해 칠정산내외편이 만들어지는데 큰 도움을 주게 된다. 또한 조선 세조 때에는 투르크-페르시아계 무슬림 거주 지역에서 수출하는 도자기 안료인 회청이 수입되었다. 이로 인해 청자를 넣은 청화백자가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 청화백자의 등장은 도자기 공예 기술의 혁신적인 발전을 가져오게 하였다.

 

조선시대에 거주하였던 무슬림들은 주로 조정과 상류층 사회와의 교류를 담당하는 역할을 하였는데, 조정 행사에 공식적으로 참석하였을 정도로 이들의 위치는 중요했다. 그러나 이들은 소수였으며 조정과 주로 연관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슬람이 대중 속에 정착되지 못했고 결국 자생력을 갖지 못하게 되었다. 결국 이러한 지배층 중심의 성격은 민중에 깊이 뿌리내리지 못하고 급변하는 대내외적인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2. 19세기 투르크계 무슬림들의 이주

 

이슬람은 신라와 고려, 조선 시대 때까지 한국과 문명을 교류하고 이슬람선교를 시도했다. 15세기 중엽 조선의 세종 이후 약 4세기의 공백기 후에 이슬람 선교는 19세기 말부터 다시 진행되었다. 1898년 러시아의 청조(淸朝)로부터 동청(東靑)철도 부설권을 획득한 계기로 러시아의 투르크계 무슬림들이 중국의 하얼빈(Harbin)을 중심으로 만주 일대에 러시아 전역으로 이주하여 움마를 이루게 되었다.

 

그 후 1915~1920년 사이에 제 1차 세계대전과 볼세비키 혁명을 계기로 투르크계 무슬림들이 국내에 이주하기 시작하였고, 1920~1940년 중반까지 200~250여명의 투르크인들이 한반도 전역으로 이주하여 이슬람공동체를 이루었다.

 

국내에 거주했던 투르크계 무슬림들은 주로 의류 도·소매업을 중심으로 포목점과 양복점을 경영하였는데, 상업과 국제무역을 통해 부를 축적하면서 사회적 기반을 마련하였다. 그들은 서울, 부산, 대구, 인천, 목포, 대전, 평양, 신의주, 청진, 홍남 등 전국에 걸쳐 이슬람공동체를 이루면서 종교적·문화적 활동을 지속해 갔다. 이들은 서울, 부산, 대구 등지에 이슬람 마을(Mahall-i Islamiyeg)이라는 공동체를 형성하였으며, 서울 시내의 중심가에는 이슬람 학교(Mekteb-i Islam)을 통하여 무슬림 자녀들을 교육하기도 하였다.

 

당시 한국은 일본의 지배를 받고 있었는데, 투르크 무슬림들은 조선총독부와 일본 정계인들 및 고위 군부들과 밀접한 협력 관계를 추구하면서 무역과 상업 활동으로 인한 경제적인 부를 축적했다. 이후 2차 세계대전의 발발과 일본의 패망 이후로 불안한 국내 정치상황으로 인하여 투르크 무슬림들은 1940~1950년간에 캐나다, 미국, 호주, 터키 등으로 이주하게 된다.

 

이에 일제 치하를 겪은 우리 민족은 나라의 아픔을 끌어안고 같이 해결하려고 하는 것보다, 자신들의 경제적인 부만을 얻고자 하였던 투르크인들에게 부정적인 시각을 갖기도 하였다. 결국 투르크 무슬림들은 한국에 이슬람을 적극적으로 포교하지 못했고, 한국의 공동체 형성에 특별한 영향력을 끼치지 못했다.

 

3. 6.25 전쟁 이후

 

1950년 한국전쟁 다시 유엔군 소속으로 터키의 군인들이 한국전쟁에 참여하게 되었는데 참전한 병력의 규모는 미국 다음으로 여단 규모의 병력을 파병하였다. 당시 압둘가푸르 카라이스마일오울루(Adulgafur KaraismailogLu)라는 터키 제6여단 사령부의 군 이맘(Imam)은 한국인들을 대상으로 적극적인 선교를 실시하였다.

 

그 결과 압둘라 김유도와 우마르 김진규등이 개종하였고, 이들은 1세대 한국인 무슬림들로 형성되었다. 이후 김유도와 김진규는 1955915한국이슬람협회를 결성함으로서 적극적인 이슬람 선교 활동을 시작하게 된다. 이슬람 선교 활동은 교육에도 이르렀는데, 한국 전쟁 당시 후방에서는 앙카라 학교를 건립하여 전쟁고아의 양육과 교육활동을 하였고, 19564월에는 청진학원설립함으로서 중등교육과 이슬람 교리교육을 무료로 실시하기도 하였다.

 

1956년 주베이르 코치(Zubeyr Koch)2대 이맘으로 부임하면서 입교자는 ‘208에 이르게 되었고, 1959년 이슬람협회 지도자였던 김진규는 서정길과 함께 이슬람 국가를 순방하면서 한국 이슬람의 실정을 알리고 후원을 요청하였으며 1960년에는 한국 무슬림으로는 최초의 성지 순례자들이 되기도 하였다.

 

그 이후 계속되는 지원을 통하여 19654한국 이슬람교 중앙연합회가 조직되었고 1967313재단법인 한국 이슬람교(Korea Islamic Foundation, KIF)’로 종교법인 등록을 하게 되었으며 현재까지 한국 이슬람의 중추적인 의결기구로서 활동하고 있다.

 

19709월에 한국정부는 용산구 한남동의 1,500평의 땅을 이슬람 중앙성원 건립용 부지로 기증하였고, 이후 이슬람 국가들의 재정적 후원으로 1976521일 이슬람 성원의 개원식이 있었다. 이때부터 한국 이슬람은 증가하기 시작하였는데, 1960~1970년대에는 한국 기업들의 중동 국가 진출을 계기로 3,700명이었던 이슬람 인구가 약 두 배로 증가하기도 하였다.

 

1977년에는 한국에 이슬람 대학을 건립하기 위한 목적으로 이슬람 대학 건립 추진 위원회가 결성되었고, 2차 석유파동을 계기로 19805월에는 최규하 전 대통령이 칼리드(Khalid) 사우디아라비아의 왕과 한국 이슬람 대학 설립을 합의하였으며 경기도 용인 13만 평의 이슬람 대학 부지를 기증하였다.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 이슬람 교육 및 연구 활동이 활발하였는데 1997세계 무슬림연맹(Rabita)'한국 이슬람교 중앙회주체로 무슬림 학자 20여명과 100여명의 국내외 이슬람 학자들이 모여 동아시아의 이슬람 역사와 문화적 조화의 주제로 세미나를 개최하였다. 이렇듯 현대에 들어서 이슬람은 활발하게 선교활동을 하고 있으며, 그 결과로 한국 내에 무슬림들은 조금씩 증가하고 있는 추세다.

 

출처 : FIM선교회 대표 유해석선교사 (전 총신대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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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 결혼 문화가 한국에 퍼지기 시작했다
lms.jpg파키스탄에서 온 M씨는 1999년 국내에 들어와 2002년 한국 여성과 결혼을 해 국적을 취득한 뒤 파키스탄에서 결혼한 처를 국내로 데려왔다가 한국 아내에게 발각되었다고 한다. 아내가 추궁하자 마구 때려 전치 3주의 상처를 입힌 혐의로 구속 기소되었고 이 사건을 맡은 대구지법 서부지원 김00 판사는 징역 1년6월을 선고했다가 아내에게 용서를 받고 부부관계에 충실하기로 약속한 점을 참작하여 보호관찰 및 사회봉사명령을 부과하는 조건으로 집행유예로 풀어주었다고 한다.(2009.2.14 뉴시스)


또한 인천의 신 모 여인은 무슬림이기에 파키스탄 남자의 두 번째 아내임을 알고도 결혼했다고 한다. 그의 첫 번째 아내도 한국 여인이고 그녀는 2남2녀를 데리고 파키스탄으로 무슬림 교육을 받으러 갔다고 한다. 그녀가 정식 아내로 혼인신고되어 있기에 신 씨는 대한민국 법으로는 합법적 부부가 아니지만 이슬람에서는 4명의 아내까지 인정하기에 결혼을 결심했다고 한다. 그들이 돌아올 것이지만 그들은 새로운 가족이라고 생각한다며 만약 이혼을 당한다고 해도 계속 무슬림으로 지낼 것이라고 말한다.(2011.5.16 한겨레)
 
그런데 M이라는 이 파키스탄 남자는 왜 자기가 잘못해놓고 사과는커녕 오히려 아내를 때렸을까? 또한 인천의 신 모라는 이 여인은 어떻게 한 남자의 두 번째 아내임을 알면서도 결혼을 할 수 있었을까? 이 사건을 접하면서 우리의 문화와는 전혀 다른 이슬람의 두 가지 문화 즉 아내 구타 문화와 일부다처 문화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자 한다.
 
무슬림들의 문화는 이슬람의 창시자 무함마드의 행동을 본받는데 기초를 둔다.

이슬람의 제2 경전이라고 하는 무슬림의 하디스(Sahih Muslim)에 보면 무함마드가 제일 사랑했던 아내 아이샤(Aisha)의 이야기가 많이 기록되어 있다. 그녀는 6살 때 50세 된 무함마드의 아내가 되어 9세 때부터 그와 동거하다가 18살 때 남편이 죽어 과부가 되었다. 무함마드의 10명이 넘는 아내 중에서 그녀만 유일하게 처녀 출신이었고 나머지는 모두 전쟁미망인이거나 과부들이었다. 그녀에 대한 무함마드의 사랑은 특심했으며 무함마드는 모든 무슬림들에게 그녀를 ‘어머니(Ummul Mouminin)’라고 부르도록 했다.(꾸란33:6) 그녀는 죽을 때까지 아이를 낳아 본 일이 없었지만 모든 무슬림들은 어린 그녀를 어머니라고 불러야 했다. 그런데 하디스에 보면 그렇게 남편의 사랑을 독차지 했던 그녀가 직접 남편인 무함마드에게 맞았던 경험을 아래와 같이 고백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날은 알라의 메신저께서 나와 함께 밤을 보내실 순번이었다. 그분은 잠옷을 입고 신을 벗고 누워서 내가 잠들었다고 생각될 때까지 누워계셨다. 그리고는 조용히 일어나 옷을 걸치고 살며시 신을 신고 천천히 문을 열고 나가서 가볍게 문을 닫으셨다. 나는 재빨리 일어나 베일을 걸치고 허리띠를 묶고 그분의 뒤를 밟았다. 그분은 바기(Baqi)에 도착해서는 거기서 오랫동안 서 계셨다. 그리고는 세 번 손을 들었다 내리더니 되돌아오시는 것이었다. 나는 헐레벌떡 걸음을 재촉하여 되돌아왔다. 그분이 뛰면 나는 더 빨리 뛰었다. 나는 그분보다 먼저 집에 도착하여 침대에 누워있었다. 그분은 들어오시더니 “오! 아이샤! 왜 그렇게 숨을 가쁘게 쉬는가?”라고 물으셨다. “아무 것도 아닙니다”라고 대답을 드렸더니 “말하라, 그렇지 않으면 신기하게 모든 것을 아시는 분이 내게 알려주실 것이니라.” 나는 놀라서 “우리 부모님의 목숨으로도 속죄할 수 없는 죄를 지었습니다”라고 하면서 사실대로 고했다. “내 앞에서 달리던 그림자가 네 것이었더냐?” “예 그렇습니다.” 그분께서는 내 가슴을 치셨고 나는 통증을 느꼈다. 그분께서는 “알라와 그분의 메신저가 너에게 옳지 못한 짓을 하겠느냐?”고 말씀하셨다.(후략)(Sahih Muslim Hadith Book 4, Number2127)
 
본인이 의심받을 일을 해 놓고도 오히려 사과는커녕 아내를 때렸다는 것이다. 아이샤가 통증을 느꼈다고 고백한 것을 보면 무슬림학자들의 변명처럼 어루만진 것이 아니고 분명히 때렸다고 보는 것이 옳다. 이슬람에서 아내를 때리는 것에 관련된 또 다른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슬람에서 제 2 경전으로 인정하는 하디스들 중 가장 권위 있는 6대 하디스가 있는데 그 중에 아부 다우드(Abu Dawood)의 하디스에 보면 이슬람의 창시자 무함마드가 “남편이 자기 아내를 때릴 때 왜 때리느냐고 물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는 기록이 있다.(Abu Dawood Book 11, Number 2142)
 
한 가지 예를 더 든다면 무함마드가 총애하던 아이샤(Aisha)에게 어떤 여인이 남편에게 맞아 새파랗게 멍든 상처를 보이며 하소연하고 있는데 무함마드가 들어왔다. 그 때 아이샤는 무함마드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무슬림 여성들처럼 고통당하는 여인들을 본 일이 없습니다. 이 여인의 상처를 보세요! 옷 보다 더 짙은 색으로 멍들었어요.”(Sahih Bukhari volume 7, Book 72, Number 715)
 
그러므로 이슬람에서 아내를 때리는 것은 무함마드가 보여준 모범이며 아이샤의 말에 의하면 특히 무슬림 남성들은 자기 아내를 때리는 문화가 있었으며 그가 계시 받았다고 하는 꾸란에도 남편들은 아내가 불순종할 우려가 있을 경우에는 때릴 수 있는 권리를 부여했다.(꾸란4:34) 물론 내 남편을 보니 그건 거짓말이라고 주장하고 싶은 사람도 있겠지만 조금만 관심을 가지고 인터넷을 검색해 보면 아내 구타를 범죄로 여기는 서양문화를 비난하는 이슬람 성직자들의 설교를 얼마든지 찾아서 생생하게 들어볼 수 있다.
 
두 번째로 생각해 보고 싶은 것은 이슬람의 일부다처 문화다. 일부다처에 대한 이슬람의 가르침은 이미 잘 알려진 사항이다. 꾸란에 보면 “아내를 취하려면 둘 혹은 셋 혹은 네 명을 취하되 그들을 공평하게 대할 자신이 없으면 하나만 취하고 그 외에는 네 오른손이 소유한 것(여성 노예 혹은 전쟁포로 여인들)으로 하라. 그러면 부정하게 될 우려가 없느니라(꾸란4:3)”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슬람의 창시자 무함마드는 자신이 만든 종교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최대한의 혜택을 베풀어 주기를 원했을 것이다. 이웃 마을을 점령하기 위하여 지하드에 참여하여 전투하는 병사들은 장기간 아내와 떨어져 있었기에 그들을 위로하기 위해서 무함마드는 점령지의 재산을 빼앗고 여인들을 마음대로 범할 수 있도록 타아루드(Taarrud)라는 명령을 했다. 그들은 조용히 사는 이웃 마을을 급습하여 남자는 무조건 죽이고 재산을 약탈하고 여인들을 강간했다. 하디스에 보면 무함마드가 아내 싸피아(Safiya)를 취할 때의 장면을 아래와 같이 묘사해 놓고 있다.
 
우리는 카이바르(Khaibar)를 점령했고 포로들을 잡았고 전리품들을 모았다. 디흐야(Dihya)가 와서 “오 알라의 선지자여! 포로들 중에서 소녀 하나를 제게 주소서”라고 했더니 선지자께서는 “가서 아무 여자든 취해 가져라”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그는 후야이의 딸 싸피아(Safiya bint Huyai)를 취했다. 그러자 한 사람이 선지자에게 와서 말했다. “오! 알라의 선지자여. 당신께서는 후야이의 딸 싸피아를 디흐야에게 주셨는데 그녀는 꾸라이자(Quraiza)족속과 나디르(An-Nadir)족속의 족장 부인입니다. 그녀에게 맞는 상대는 당신 외에는 없습니다.” 그러자 선지자께서는 “그를 불러 그녀를 데리고 오라고 하라”고 말씀하셨다. 디흐야가 그녀를 데리고 오자 “포로들 중에 이 여자를 제외하고 아무 여자나 취하라”고 말씀하셨다. 선지자께서는 그녀를 노예 신분에서 해방시켜 주시고 그녀와 결혼하셨다.(Sahih Bukhari Hadith, Volume1 Book 8 Number367)
 
이렇게 해서 아내들이 점점 늘어나자 무함마드 자신만은 아내의 숫자에 제한을 두지 않아도 좋다는 특별 계시가 내려왔다고(꾸란33:50)하며 다른 신도들에게는 4명으로 제한했지만 자신은 10명도 넘는 아내를 취하였다. 따라서 무슬림들은 아내를 여러 명 얻는 것은 알라께서 허락하신 자신들의 권리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제 우리는 대한민국의 여성들에게 이슬람의 결혼문화나 가정 윤리는 우리와 다르다는 것을 알려야 한다.

한국 여인이 무슬림과 결혼을 원한다면 최소한 아래와 같은 몇 가지 질문을 해볼 필요가 있다.
 
첫째: 남편이 자기 외에 2~3명의 여인들을 아내로 더 취해도 같이 살 자신이 있는가?(꾸란4:3) 숨겨놓은 아내가 있든지 아니면 앞으로도 언제든지 더 취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둘째: 이혼은 남편의 권리이기에 언제라도 이혼 당할 수 있다는 것을 아는가?(꾸란2:229) 이슬람권에서는 구두로 3번만 이혼을 통보하면 이혼 절차는 끝난다고 한다. 단 결혼 당시 남편이 함부로 이혼 선언을 못하도록 안전장치로 메흐르 혹은 메흐리에를 정하여 공증을 받아 놓는다. 이것을 혼자금(婚資金)이라고 번역하지만 사실은 이혼 위자료와 같은 개념이라고 볼 수 있다. 대한민국에서 이혼위자료를 미리 정해놓고 결혼하는 사람은 없기에 부담 없이 이혼을 선언하고 홀연히 귀국하는 무슬림들을 종종 볼 수 있다. 만일 무슬림과 꼭 결혼하고자 한다면 혼자금이라도 정해 놓아야 졸지에 대책 없이 이혼당하는 피해를 막을 수 있을 것이다.
 
셋째: 아내를 때리는 것은 남편의 권리라는 것을 인정할 수 있는가?(꾸란4:34) 이슬람권에서는 아내를 침대에 묶어놓고 때리는 남편들의 이야기를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다.
 
넷째: 이슬람법에 의하면 이혼 시 자식들은 무조건 남편의 소유라는 것을 인정할 수 있는가?
 
다섯째: 결혼을 위해서 자신의 종교를 버릴 수 있는가?(꾸란2:221) 무슬림 배우자와 결혼하여 자녀를 낳고 외국에서 오래 살던 부부라도 함께 배우자의 조국인 이슬람국가로 갔을 경우 이슬람으로 개종하지 않았다면 이혼은커녕 결혼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다. 비무슬림과의 결혼은 무효라는 것이 이슬람의 율법이기 때문에 거기서 계속 같이 살기를 원한다면 이슬람으로 개종하는 길 외에는 해결책이 없다.
 
무슬림들은 유럽에서 이미 이슬람 율법으로 재판을 받을 수 있는 샤리아 법정을 만드는 데 성공을 해서

여러 명의 아내를 인정받고 있으며 아내 구타에 대해서도 무혐의 판결을 받고 있다고 하여 놀란 적이 있었는데

이제 이런 황당한 무슬림들의 권리가 대한민국에서도 인정받기 시작했다는 것이 확인된 이상

이런 현상은 급속도로 늘어날 것이다.

이것은 무슬림들이 특별히 나쁜 사람들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문화권에서는 그것이 정상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일 뿐이며

그런 행위를 하면서도 전혀 죄의식이 없다는 것이 더 큰 문제다.
 
제발 곱게 자란 한국 여성들의 인생이 이슬람 문화의 피해자가 되었다는 뉴스를 더 이상 듣고 싶지 않거든

이슬람의 결혼문화는 우리와 전혀 다르다는 것을 하루속히 주변 사람들에게 알려 주어야 할 것이다.
출처 : 이 만석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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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후 5-7년 후면 세계1위 종교는 ‘회교’

미주회교도 10만(1970년)에서 900만명(2008년)으로 급증
 
 
미래의 세계는 회교가 지배할 것이라는 추산과 우려가 나왔다. 세계가 온통 바뀌면서 인구학적으로도 변하고 있어 우리의 자녀가 대물림할 시대는 오늘날과는 엄청 다를 것이라는 전제 아래, 이를 산정해 본 스테이시 데임스의 충격적인 분석 평가를 뜯어본다.

한 문화가 25년간 종속하는 데는 적어도 1가족당 2.11명의 자녀가 필요하다는 것이 연구 결과이다. 1.9명으로 문화가 반전/회복된 예가 없고 1.3명으로는 불가능하다.

문화 개조엔 80-100년이 걸린다. 만약 2쌍의 조부모 세대가 각 하나씩의 자녀를 낳아 서로 결혼시킨 차세대가 또 다시 한 자녀만 출산한다면, 손자/손녀세대는 조부모 세대의 4분의1규모로 축소됐다는 뜻이다. 만약 2006년에 1백만 명의 아기가 태어났다면, 2026년에 성인 200만명을 갖기가 힘들다.

 

인구가 줄어들면 문화도 위축된다.

지난 2007년 유럽 각국 출산율은 프랑스 1.8, 영국 1.6, 그리스/독일 1.3, 이탈리아 1.2, 스페인 1.1 등.

유럽연합 31개국들의 평균 출산율은 겨우 1.38이었다.

역사적으로 이 상태로는 반전이 불가능하며, 현재 모습대로의 유럽이 존속할 기간은 불과 6년이다.

그런데도 유럽 인구가 감소하지 않는 이유는 주로 회교계 이민자들 때문이다.

1990년 이래 유럽 인구 증가의 90%는 이들의 몫이었다.

전술한 대로 프랑스 출산율은 (가족당)1.8인데 프랑스 회교이민자들의 출산율은 아이러니하게도 숫자를 뒤집은 8.1이다!

 

세계에서 가장 성당이 많은 곳의 하나였던 남부 프랑스에 이제는 모스크가 더 많다.

이곳 20세 이하 인구중 30%는 회교도이며, 니스/마르세이유/파리 등 대도시에서는 45%이상이다.

2027년에는 프랑스 인구의 5분의1이 무슬림이 된다.

앞으로 39년만 있으면 프랑스는 회교 공화국이 된다!

영국의 회교 인구는 지난 30년간 8만2천에서 250만으로 30배 급증했다.

모스크 수는 약 1천개. 상당수는 옛 교회당들이다.

 

네덜란드의 경우 현재 신생아들의 50%는

무슬림 자녀이며 15년내로 인구 절반은 무슬림이 된다.러시아엔 2천300만 무슬림이 있어 인구 5분의1을 차지한다.

러시아 군대의 40%는 곧 회교도로 구성된다.

 

벨기의 경우, 현 인구 50%, 신생아의 25%가 그 들이다. 불과 17년 후인 2025년까지는 온 유럽 신생아들의 3분의1이 회교 가정에서 태어나게 된다.

최근 독일 발표에 따르면, 독일 (백인)인구 감소율은 멈추지 않고 있어

반전 가능성이 없으며 2050년까지는 회교국이 될 공산이 크다.

 

리비아의 카다피는“알라 신께서는 유럽에서 이슬람에 칼과 총/대포, 정복전 없이 승리를 주실 조짐이 보인다.

우리는 테러리스트들, 자살폭탄도 필요없다.

불과 수십 년 내로 5천만 유럽회교도들이 유럽을 회교대륙으로 만들 것이다”고 말했다.

유럽엔 현재 5200만명의 무슬림들이 있어, 20년내로 1억400만명이 된다.

미대륙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다. 캐나다의 출산율은 프랑스처럼 1.8이다.

2001-2006년 인구 증가는 160만명인데,

그 가운데 120만은 이민자들이다.

미국의 출산율은 1.6이며 현 문화유지에 필요한 최저치인 2.11명을 유지하는 것은 라틴계 때문이다.

1970년에 10만이던 미국 회교도들이 2008년 현재 900만이다.

수년전 시카고에서 20여 회교단체들이 모여 정치/저널리즘/교육을 통한 미국의‘회교복음화’플랜을 상세히 짰다.

그들은“30년내로 미국 무슬림 인구가 5천만이 된다는 현실을 위해 준비해야 한다”고 말했다.
http://christiantoday.us/sub_read.html?uid=20694&section=sc73&section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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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이슬람인구 5년새 177% 증가 했다고 합니다.

 

적그리스도 정부때 한국에서 기독교인 잡아서 테러를 일으키고

살인자들이될 한국의 무슬림들...!!!

뉴월더오더가 밀어주는 이슬람

유럽의교회초토화는 교회의 무관심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교회가 지금 행동하지않으면

한국교회를 이슬람들이사서 모스크로 만들고

교회를 피폐하게 만들겁니다

빨리그들의 실상을 알리는 책자들을 만들어서

교인들과 한국국민들이 피해를 보지않게 하십시오

국회에잇는 기독교인 국회위원들은 출마할땐 교회에들락거리며 그들의도움을 받으면서도

이슬람 문제에 대하여 자신의출세를 위하여 주님을 배도하는일을 서슴치않음을볼때

정치가에 기독교인들이 많아도 아무소용이 없습니다

지금 갑자기 박근혜정부가 이슬람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일하는사태를 미루어볼때

무슬림은행과 자금으로 더욱더

한국은 무슬림의 부흥이 예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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