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의 한국 침투전략

 
1955년, 한국에 이슬람이 들어온 것은 6.25 동란 때 우리나라를 도우러 왔던 연합군에 합류해 한국 땅을 밟은 터키 군대에 의해서였다. 이슬람이 한국 땅에 발을 붙인 지 벌써 50년이 넘었다. 이슬람 쪽의 주장에 의하면 한국에 무슬림 숫자가 현재 15만 명이라고 한다. 그들은 한국을 무슬림국가로 만들기 위해서 열심히 선교활동을 벌이고 있다.

그들은 서울 한남동에 있는 이슬람 중앙 성원을 비롯해서 부산, 전주, 인천, 광주, 안양, 파주, 부평, 등지에 대규모 성원을 건축하고 포교활동을 하고 있다. 그리고 4개의 이슬람 센터와 50여개의 이슬람 예배처소가 있다.

 

                                    ( 한국에 있는 이태원 이슬람 사원 )


한국 정부의 이슬람 지원

 

한국정부는 일체 종교문제에 대해서는 중립을 지켜야 하는데도  대부분 엄청난 석유를 생산해 내는 중동의 이슬람국가들에게 약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박정희 대통령 때는 한국 이슬람 중앙 성원을 짓는데 한남동의 시유지 1,500평을 희사했다. 그리고 잠시 대통령직을 감당했던 최규하 대통령은 80년 5월 사우디아라비아를 공식 방문했을 때 한국에 이슬람 대학을 건립하는데 적극 지원해 주겠다고 약속하고는 2개월 뒤 한국 정부의 이름으로 용인에 있는 국유지 43만 평방미터(약 13만평)를 이슬람 대학 부지로 헌납했다. 한국의 이슬람은 규모는 작지만 산유국들의 막강한 외교력을 배경으로 다른 종교에서는 꿈도 못 꾸는 일들인 국유지를 무료로 받는 혜택을 누리고 있는 것이다. 


이슬람의 선교전략

 

아랍국가들은 외국어 교육 붐이 일고 있는 한국의 현상을 잘 이용하여 산유국들의 장점을 선전하며 아랍어를 가르치고자 한다.  아랍어는 코란의 언어이기 때문에 아랍어를 배우려면 자연히 이슬람 강의를 들어야 한다. 배우는 사람들은 선생과 제자사이로 선생님이 시키는 대로 해야 할 의무가 있기 때문에 가장 효과적인 선교전략 중의 하나로 꼽히고 있다. 그래서 2002년부터 중고등학교에서 아랍어를 제 2 외국어로 선택 할 수 있도록 한국의 교육법이 바뀌었다. 물론 이 법을 제정하기 위해서 무슬림들이 얼마나 노력 했는지는 묻지 않아도 짐작이 간다.

지금은 아랍어를 배우고자 하는 사람들이 별로 없을지 모른다. 그러나 무슬림 남성들이 한국 여성들과 결혼해서 자녀들을 낳으면 그들은 그들의 자녀들이 중고등학교에 진학 할 때를 기다릴 것이다. 그리고 그 자녀들이 중학교에 들어가게 되면 한국의 교육법에 주어진 혜택을 누리게 해 달라며 강력하게 아랍어 선생 채용을 주장할 것이다.

 

언론사와 매스컴 이용


 

이들은 매스컴의 힘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언론사 종교 담당 기자단을 초청하여 특별 강연을 2006년 한국 이슬람 선교위원회 사업계획으로 잡았다. 또한 이들은 2004년에 한국의 교육방송(EBS)과 긴밀한 연관을 가지고 이슬람 13부작이라는 작품을 만들어 이슬람국가 15개국을 순회하면서 촬영 편집한 동영상을 13회에 걸쳐 방송 했다. 이것은 국민의 교육세를 받아 운영하는 공영방송을 이용하여 이슬람이라는 특정 종교를 홍보하는 멋진(?) 작품이었다. 이 이슬람 13부작은 2005년에 방송 프로듀서 작품상을 받기도했다.

 

역사를 가르치는 중 고교 교사들을 초청하여 이슬람을 교육


 

1989년 9월 제1회 이슬람 역사 바로 잡기의 일환으로 서울 지역 중 고교 역사 담당 교사들을 초청하여 이슬람 강연회를 개최하였다. 그 후 해마다 1-2회씩 이러한 행사들을 하고 있다. 2006년에도 두 번 중고교 교사들을 초청하여 이슬람 강연회를 가졌으며 8월 2일에는 이화여대 부설 중등교육원 공통사회 부전공 연수교사 37명이 서울 이슬람 중앙 성원을 방문하여 황의갑 박사(한국이슬람교 중앙회 사무총장)의 ‘이슬람 문화 이해’라는 주제강의를 1시간여에 걸쳐 듣고 질의응답시간을 갖는 등 이슬람 문화 이해를 돕기 위한  자리를 가졌다.

 

주한 이슬람 공관장 자문 위원회


 

1998년 4월 27일 주한 이슬람 공관장 자문 위원회가 발족되었다. 이는 한국에 있는 이슬람 국가의 대사들로 구성되는 모임인데 한국에서 어떻게 하면 이슬람을 빠르게 확산시킬 수 있을 것인가를 논의하고 공관장으로서 그들이 정치적으로 어떻게 도울 수 있는지를 구체적으로 의논하여 한국의 이슬람화를 지원하는 모임이다.

 


한국을 이렇게 이슬람화 할 것이다.

 

그럼 그들이 어떻게 한국을 이슬람화하려 하는가? 2005년도에 발간된 한국 이슬람 연맹에서 출판한 한국이슬람 50년사에 이들이 발표한 미래의 선교계획이라는 부분을 보면 알 수 있다.

 

1) 마스지드 건립


 

이슬람 사원을 아랍어로 마스지드라고 한다. 현재 한국에 있는 서울 중앙 성원을 비롯해 9개의 이슬람 성원이 있으며 4개의 이슬람 센터와 50여개의 임시 예배소가 있고 국내외 약 15만 명의 무슬림들이 예배와 종교적 의무를 실천하고 있다. 매년 늘어나고 있는 무슬림들을 위한 새로운 성원의 건립을 추진하고 있다.

 

2) 국제 이슬람 학교 설립


 

무슬림 자녀들을 양육하기 위한 교육시설이라는 명목으로 영어로 가르치는 초등학교 유치원 및 어린이집을 만들어 어려서부터 이슬람 교육을 받으며 자랄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한다. 오일 달러를 받아서 최고의 시설을 갖추고 다른 유치원들의 거의 절반 값으로 이런 학교들을 운영한다면 많은 한국인 엄마들이 자녀들을 그 곳으로 보내고 싶어 할 것이다.

 

3) 이슬람 문화센터 건립


 

이슬람 문화센터를 다와센터(Da’wah Center)라고 부른다. 이는 선교센터라는 말이다. 한국 이슬람 전래 반세기의 역사를 가지고 있으면서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이슬람 종교 사회 문화를 알리고 교류할 선교 및 문화 공간을 가지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하면서 이슬람 문화센터를 서울에 개원할 계획을 가지고 있다. 거기서는 많은 이슬람국가들의 언어교육부터 시작하여 상설 이슬람 교리강좌 등을 통해서 한국 사회에 이슬람을 뿌리내리는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될 것이 예상된다.

 

4) 꾸란 번역 위원회


 

지금 한국어로 번역되어 있는 꾸란들의 번역이 매끄럽지 못하여 이해가 어렵고 내용상의 오류가 많은 것을 스스로 인정하면서  새로운 꾸란을 한글로 번역하기 위해서 매주 토요일에 꾸란 번역위원들의 정기 모임을 가지고 있으며 비정기적으로 연구 토론 모임을 가지고 있다.

 

5) 이슬람 대학 건립


 

1970년대 말부터 구체화되기 시작한 사업이다. 1977년에 쿠웨이트 사업가 쉐이크 압둘라 알리 알무타와가 한국 이슬람 중앙회를 방문하여 제안한 이슬람 대학 설립 계획은 1980년 7월 최규하 대통령이 이슬람 대학부지 43만 평방미터를 기증함으로 구체화 되어 지금 추진 중에 있다.

아마 이 대학이 건립되면 완공식에 이슬람국가 원수들 혹은 장관들이나 왕자들이 참석하여 각종 특혜와 전액 장학금, 진학에 따른 학위 보장 및 취업보장들을 약속할 것이다. 그러면 한국의 머리 좋은 수재들이 밀려들어갈 것이다.

한국 이슬람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최고급 무슬림들이 쏟아져 나올 것이며 이들은 삽시간에 한국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교육 등 모든 분야들을 장악하게 될 것이 예상 된다.

 


천년 사원 이집트 카이로의 옛 시가지에 자리한 알아즈하르 사원.

서기 971년 파티마 왕조가 건립한 이 사원을 모태로 태어난

알아즈하르대학은 전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이자,

이슬람 전통에 바탕한 최고의 고등교육기관으로 꼽힌다.

 

6) 이슬람 관련 서적 출판 위원회


 

지금까지 많은 이슬람 서적들이 나와 있다. 이들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더 많은 책들과 인쇄물들을 만들어 홍보하고자 한다. 그들이 이렇게 문서 선교에 힘쓰는 이유는 한국에는 문맹자가 거의 없다는 것이다. 이슬람에 대한 자료들을 읽을 수 있도록 만들어 놓으면 누구든지 읽어서 스스로 터득한다는 것이다.

 

7) 한국 여성들과 결혼 및 출산 전략

 


이슬람권에서 한국에 근로자로 들어 온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주로 불법체류자들이 많은데 이들이 합법적인 체류 자격을 획득하기 위해서 취하는 가장 손쉬운 방법이 한국 여성과 결혼하는 방법이다. 한국 정부는 아내가 한국인이고 남편이 외국인이면 남편에게 체류허가를 발급해 준다. 그동안 불법체류를 한 사람일지라도 합법 체류자의 자격을 얻게 된다.

무슬림권의 결혼제도는 모두가 알고 있듯이 일부 다처제도이다. 그래서 자기 나라에서 결혼을 하고 가족들이 있는 사람도 체류자격을 얻기 위해서 또 한 사람의 부인을 얻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그래서 가능하면 많은 자녀들을 낳아서 무슬림들의 숫자를 늘려가는 것이다.

 

이는 대단히 느린 방법인 것 같지만 이미 유럽은 이 방법이 성공을 거두고 있다. 미국 프린스턴대의 중동 전문가 버나드 루이스 교수는 “이번 세기가 끝날 때면 유럽에선 무슬림이 비(非)무슬림을 추월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프랑스에서는 국민의 10% 정도인 600만 명의 무슬림이 있지만 신생아 4명 중의 한명은 무슬림 자녀라고 하니 25%의 신생아들이 무슬림이라는 말이다. 이대로 가면 유럽의 무슬림 숫자는 2025년에 이르면 지금의 두 배가 될 것이며 독일은 이대로 가면 2041년에 무슬림 인구가 독일 원주민들 숫자를 추월할 것이라고 한다. 한국도 예외는 아니다.  출산 전략은 이렇게 무서운 것이다. 

 


언젠가 사우디아라비아의 한 기자가 쓴 칼럼에 [한국은 곧 이슬람 국가가 될 것이다. 한국을 이슬람화 하면 동남아와 극동을 이슬람화 하기에 쉬울 것]이라고 했다. 한국은 이슬람 국가가 되기에 적합한 모든 조건을 다 갖춘 나라다. 

한국의 정부는 다른 모든 종교보다 이슬람에 특혜를 주고 있다. 어떤 이슬람 국가에도 선교의 자유가 보장된 나라가 없지만 한국에는 완벽한 종교의 자유가 있다. 아무도 이슬람의 선교를 방해할 자가 없다.

 

그리고 한국 국민들은 범사에 종교성이 많아서 어떤 이단들도 쉽게 발을 붙일 수가 있다. 특히 이슬람에서는 자녀 교육문제를 파고들어 교육법을 바꾸어 놓았고 중고등학교 교과서 편찬위원회에 이슬람 박사를 집어넣어 한국의 중고등학교 교과서에 이슬람에 대한 혐오스런 부분들을 모두 바꾸어 놓았다. 그들 입장에서 보면 준비가 완료된 상태라 할 수 있다. 이제 이슬람 대학이 건립되면 본격적으로 드러내 놓고 공격적 선교로 나올 것이 빤하다.

기독교의 복음의 진리를 사수하기 위해서뿐만 아니라 거짓 영에 속고 있는 무슬림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합심기도하며 철저한 선교대책을 세워야 할 때이다.(장재언) 
 
출처 http://blog.cgntv.net/blog/blog_main.asp?no=613234&id=pem0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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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국가별] '알라신'만 같을뿐 문화-사고방식 다양

 

이슬람 세계는 알라신을 신봉하고 마호메트의 예언을 실천한다는 점에서 공통적이지만 속을 들여다 보면 다원적이고 복잡하다. 5대륙의 상이한 문화와 인종 수만큼 다양한 종교적·문화적 스펙트럼을 갖고 있다. 현대 무슬림들의 서방에 대한 증오는 19세기 서구 열강의 식민지 지배에서부터 비롯된 것이긴 하지만 이것도 일반화하기는 어렵다.

 

다양한 이슬람

 

7세기 아라비아 반도에서 발원한 이슬람은 13세기가 지난 후 중동은 물론, 북아프리카, 중앙·남아시아, 유럽에까지 진출해 있다. 정통 이슬람 국가가 중동에 많다면, 북아프리카의 이집트, 리비아 등은 중동에 비해 서구화, 개방화돼 있다.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는 정교일치의 전통을 거의 상실, ‘세속화한 이슬람 국가가 돼 있다.

 

같은 중동 국가들이라도 페르시아인의 이란과, 아랍인의 사우디아라비아는 인종간 경쟁의식을 갖고 있다. 사우디나 쿠웨이트 같은 친미 국가도 있고, 이라크나 리비아처럼 미국과 원수지간인 나라도 있다.

 

이슬람 내부 갈등

 

종파적·문화적 차이로 이슬람은 내부 갈등을 겪는다. 여기에 정치적 이해관계가 개입돼 갈등의 양상은 한층 복잡해진다. 2차 대전후 아랍권내 주도권을 놓고 이집트와 이란, 이라크, 사우디아라비아간 경쟁이 치열했다.

 

이스라엘 문제를 놓고도 아랍권은 강·온파로 나뉘어 있다. 수니파 왕국 사우디는 이란의 시아파 정권을 싫어하고, 이란은 시아파를 탄압하는 이라크의 수니파 정권에 적대적이다.

 

리비아와 시리아는 아랍권의 여론과 달리 독자적 노선을 고수하고 있고, 아랍의 가운데에 위치한 요르단은 동서를 넘나드는 외교력으로 주목 받았다. 또 사우디나 요르단 등 왕국은 이집트 등 공화제 국가와는 거리감을 느낀다.

 

서구 지배가 남긴 유럽 문화와 근대화를 수용한 나라와, 정통 이슬람을 고집하는 나라 사이의 갈등도 잠복해 있다. 정통 이슬람문화와 서구문화는 국가내에서도 충돌하고 있다. 이 때문에 미국의 침공에 맞서 아랍권이 단결하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서구에 대한 불신·증오의 뿌리

 

이슬람이 갖는 서구에 대한 증오와 반감은 19세기 열강의 식민지가 되면서 시작됐다고 학자들은 지적한다. 영국·프랑스 등 열강은 중동의 지정학적·경제적 중요성 때문에 서구 열강은 이슬람 세계를 수탈했고, 독립 움직임을 탄압했다.

 

하지만 무슬림들은 정치와 종교가 일치되는 공동체의 부활을 줄기차게 추구했고, 일부는 급진주의, 과격행동으로 나타났다. 이런 개혁 성향의 이슬람 부흥운동을 서구인들은 이슬람 원리주의라고 불렀다.

 

2차 대전후 아랍권은 옛 영토을 회복하면서 독립했다. 독립후 석유를 무기화한 아랍권의 자원 민족주의는 서구 열강에 대한 보복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영국, 프랑스가 물러난 자리에 미국이 대신 들어섰고, 이슬람의 눈에는 미국의 정책 역시 국익 우선으로 비쳤다. 반서방은 반미로 이어졌다. 그러나 나라마다 미국을 대하는 입장은 제각각이었다.

 

이슬람은 원래 관용의 종교, 평화를 사랑하는 종교였다는 지적은 그래서 아이러니다. 마호메트의 출현 이후 불과 100년만에 아라비아 반도는 물론, 북아프리카, 중앙아시아, 인도, 중국에까지 전파될 수 있었던 것도 이 아닌 이민족·이문화에 대한 관용 때문이었다고 학자들은 지적한다.

 

이슬람 혁명과 탈냉전의 충격

 

1960~70년대 아랍권은 주도권 싸움과 친미·친소 국가간 대립이 있었지만 대 이스라엘 전쟁에서는 단결하고 협조했다. 그러나 1979년 이란 팔레비 왕조를 무너뜨린 이슬람 시아파 혁명, 8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사회주의권 붕괴를 계기로 중동 정세는 극도로 불안해졌다.

 

이란-이라크 전쟁(1981~88), 걸프전쟁(1991)은 권력 공백 상태에서 발생한 아랍권 내부의 충돌이었다. 아랍권은 분열됐고, 이들 전쟁에서 보여준 미국의 힘과 이중성은 아랍인에게 또 다른 불신과 상처를 남겼다는 지적이 많다.

 

1990년대 들어와 이슬람 과격단체들은 이런 미국을 상대로 폭탄테러 활동을 증가시켰다. 하지만 이들도 이슬람의 전체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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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 선교 현상과 접근 전략                                    
 

▲저는 대학교 다닐 때부터 이슬람 선교에 헌신했고, 이슬람 중동 연구를 했습니다.

거의 40년째 이슬람을 연구하고 있는데, 특별히 저희 단체 인터콥은 이슬람을 선교하는 단체입니다.

 

저희 선교사가 1,050명 정도 나가 계신데, 거의 다 이슬람권이죠.

그것도 중동 중심의 프런티어(최전방) 이슬람 선교를 하고 있는데요,

 

저희는 처음부터 청년들을 내보냈습니다. 왜냐면 언어가 안 되면, 아무 것도 안 되니까요.

우리 한국에 들어온 언더우드, 토마스, 아펜젤러 등의 선교사들도 다 20대 청년들이었습니다.

 

저희들이 이제 아무래도 프론티어 선교니까, 청년들을 보내서, 언어가 되어야 뭘 하죠.

그래서 신학적인 소양이 필요하면, 5년 선교한 다음에 불러들여서, 신학공부를 일부 시킵니다.

 

저희들은 신학공부를 다 한 후에 선교하기 보다는, 역순으로 먼저 선교지로 보냅니다.

왜냐면 그동안 교회에서 잘 양육 받았고, 성경공부 하면서 훈련받은 게 있으니까요,

또한 이슬람 선교지 현장은 ‘목회’라기보다 ‘전도’니까요.

 

그렇게 하다보니까 저희들도, 정보가, 아무래도 바닥 현장 정보가 저희에게 좀 많은 편입니다.

그래서 오늘 제가 이슬람에 대해 좀 나눌 때,

기존의 여러분의 생각과 혹시 다른 점이 일부 있더라도, 이해하고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우리 1천여 명의 선교사들이 보내오는 생생한 현장 정보가 있으니까요.

 

 

◑이슬람을 우리가 생각하고 접근할 때는, 일단 몇 가지 고려해야 될 사항이 있습니다.

  <이슬람의 독특성>을 알아야 됩니다.

 

▲1. 이슬람은 <배교자를 살해>합니다.

배교자를 살해하는 종교는, 세상에 이슬람 말고는 없습니다.

불교, 기독교, 심지어 사이비들도 배교했다고 일률적으로 처단하는, 참수하는 종교는 세상에 없습니다.

교리에 위배된다고, 그렇게 참수를 명하지는 않습니다.

 

또 이슬람교의 설립자 무함마드를 비난해도 살해합니다.

풍자하는 만화만 게제해도 폭탄 던지는 데는, 다른 종교에는 없습니다.

 

예수님이나 석가모니 비난한다고 죽입니까? 그렇지 않죠.

또 경전 코란을 비난하면, 목을 쳐서 죽입니다.

 

그래서 배교자 살해, 그리고 설립자 비난하면 죽이고, 자기들의 경전을 모욕하면 죽이고..

정말 세계가 감당할 수 없는 컨텐츠를 가지고 있는 이런 종교가,

지금 세계 최대의 종교가 되었다는 것은, 정말 우려할만한 일입니다.

 

지금 이슬람은 자기들이 20억이라 그러는데, 저희들이 봐도 16~17억은 됩니다.

기독교는, 가톨릭을 빼고, 몰몬교 같은 이단 다 빼고

순수 복음주의 기독교인은 8.5~9억입니다.

이슬람이 복음주의보다 2배가 많습니다.

 

국가로는 58개가 이슬람 국가입니다. (팔레스타인 포함)

그들 나라가 통째로 다 이슬람입니다.

 

유럽에서도 4~5%, 가톨릭 4%, 복음주의 4%

그러니까, 유럽에서도 이슬람이 최대종교가 된 것입니다.

 

또한 무서운 것은, 이슬람이 지금 무섭게 세계로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2. 이슬람의 두 번째 독특성은 이슬람은 <정교일치 종교>입니다.

지금 세계에서 어설픈 정교일치는 다 없어졌습니다. 바티칸 빼고요,

실질적으로 세계적 종교에서, 정교일치 종교는 없어졌습니다.

 

그런데 이슬람은 정교일치, 국가종교입니다.

그래서 포교를 국가 차원에서, 국가 예산으로 합니다.

모든 이슬람 국가에는 종교성이 있습니다.

거기서 국가 예산으로 포교하기 때문에, 포교활동이 엄청납니다.

 

지금 사우디가 경제가 좀 어려워져서 몇 년동안 헤매고 있습니다만

수년 전만 해도 사우디가 1주일 쓰는 선교비를 다 합하면,

우리 세계 복음주의 교회가 1년 쓰는 예산과 똑같다고 그럽니다.

 

그리고 사우디가 포교에 하루에 쓰는 예산을 합하면,

제일 많이 선교비를 쓰는 미국의 남침례교단의 (1년예산?) 보다 많다고 그럽니다.

 

그러니까 엄청난 물량 예산으로 국가가 포교하니까요. 뭐 그 힘이라는 게 엄청나죠.

그래서 이슬람을 이렇게 국가종교로 봐야지요,

 

그래서 사우디가 너무 포교에 예산을 많이 쓰다가

현재 경제가 어려워진 점도 좀 있습니다.

 

그들이 포교를 열심히 하는 이유는, 리더십 경쟁이라는 이유도 있습니다.

시아파, 수니파, 자기가 리더라고 경쟁하다가 너무 무리해서..

 

어쨌든 이런 국가 종교라는 점.

그래서 사우디나 중동의 어느 국가든지, 해외에 자기 나라 국가가 진출하면,

회사 펀드가 진출하면, 그걸 다 포교로 일부를 쓰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허가를 안 내줍니다.

그러니까 미국에 와 있는 모든 이슬람 펀드들이나, 이슬람 회사들도 전부 수입의 일정 부분을

North American Islamic Society 북미이슬람협회로 기부하게 되어있습니다.

 

우리 개신교는 교단분열, 교회분열로 개체화되어 있는데,

그들은 그쪽으로 모든 예산을 집중해서, 그 예산으로

미디어, 심지어 국가까지 기관에 투자해서 움직입니다.

 

미국은 좀 크니까 자기들이 움직이기가 좀 힘들지요.

한국에 이슬람 비판 안 나옵니다. 아프간 피랍 때 보셨지만,

국민 21명이 한 달 동안 피랍되었는데,

한국의 모든 언론들이 이슬람에 호의적이었습니다.

 

이슬람이 좋은 종교, 평화의 종교라는 프로그램을 계속 방영하고 있었습니다.

왜냐면 펀드 자체가 이런 미디어, TV, 방송, 신문에 주식을 삽니다.

투자를 그 쪽으로 해 버리니까, 메이저 언론 중에 하나가 되버리는 거죠.

 

또 이슬람을 비판해서, 중동에 진출해서 뭘 할 수 있겠어요. 아무 것도 못 하는 거죠.

우리 한국에 최초로 세워진 이태원 이슬람 사원,

한국 정부가 70년 때 중동 진출 할 때, '하나 짓고 오셔야지..'

그래서 국가가 땅을 내서, 지은 겁니다.

 

두 번째 삼성이 진출하려고 하니까, '하나 짓고 오셔야지' 해서,

그때 부산에 두 번째 이슬람 사원을, 삼성이 지은 겁니다.

 

그래서 몇 년 전에 우리나라에 이슬람 금융법을 독특하게 인정받으려고 하다가,

수쿠크 법, 당시 우리 기독교가 쎄게 반대해서 일단 포기되었는데,

그런데 포기하지 않습니다.

 

이번에는 할랄법, 이슬람 음식법을 독특하게 적용받고, 국가 지원을 받기 위해서

지금 엄청난 프로젝트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래서 한국 기독교가 이슬람 선교를 할 때,

우리 정부는 뭐 엄청나게 비판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면 석유가 나는 곳이 주로 이슬람 지역인데,

한국 기독교가 그쪽에 선교하면, 결국 이슬람을 자극함으로써,

한국과 이슬람과 관계가 언젠가는 안 좋아져서,

석유자원 공급에 만약 차질이 생긴다면.. 그러니 이슬람권 선교를 자제하라..는 분위기로 흐르죠.

 

그래서 이슬람 선교를 하던 저희 인터콥은 지난 15년동안 엄청나게..

언론사들 다 움직여서 공격을 받았습니다. '이슬람 선교를 왜 하느냐'는 겁니다.

 

지금 세계가 자원외교, 자원전쟁인데.. 그래서 중국도 아프리카로 몰려가잖아요.

미국이 아직 남겨둔 아프리카 자원을, 차지하기 위해서입니다.

미국에게 중동을 빼앗겼으니, 중국은 아프리카로 엄청나게 진출하고 있습니다.

 

과거 우리 정부도 자원외교가 핵심인데, 정부의 부처도 긴장하게 되죠.

혹시 정부시책에 방해가 될까봐요. 아프간 피랍 사태 때, 왜 그렇게 몰아갔겠어요?

 

‘위험한 데 왜 가느냐?’는 논리로 아예 접근을 못하게 했습니다.

그러니까 제가 그때 한국 청와대에 탄원서를 썼습니다.

폰트 12로 글씨 크게 해서 눈에 잘 보이도록, 3장으로 요약해서 썼습니다. 약 5년 전에 일입니다.

 

‘우리가 이슬람 선교 한다고 해서 자원외교에 장애 받지 않습니다.

장기적으로 대민관계에 오히려 더 좋습니다.’ 그 이유를 하나씩 다 썼습니다.

 

그래서 어느 전문가를 불러서라도, 그 점에 대해서, 우리는 공개 토의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비공개 토론도 괜찮다고 했습니다. 어느 쪽이 옳은지 토의하자고 했습니다.

그 후로부터 조금 공격이 약해졌는데, 여전히 부담스럽죠.

 

우리가 이슬람 선교 열심히 한다고 해서,

그게 자원외교나 국가관계에 장애가 되지 않습니다.

이슬람 교리적으로, 이슬람 율법적으로도요.

 

또 이슬람 사람들이 생각하는 세계관, 이 모든 것을 가지고 얘기했죠.

그런데 상식적으로는 ‘한국 기독교가 이슬람에서 설치고 다니면, 당연히 안 좋지 않냐?’

그건 상식(사회적 통념)이죠.

그러나 이슬람을 깊이 알면, 절대 그렇게 말 안 합니다.

 

그러니까 사회 통념 말고, 이슬람의 세계관을 깊이 알면, 달라집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슬람을 접근할 때는,

그 독특성 속에서 이슬람의 세계관과 메카니즘을 생각해야지,

일반 상식으로 접근하면 절대 되지 않습니다.

 

예를 들면, 저희들이 2004년에 팔레스타인에서 2천5백명이 모인 공개집회를 했습니다.

또 2000년에 카자흐스탄에서 이슬람 국가 최초로 공개집회를 해서 2만5천명이 모였습니다.

또 아프간에서 했는데, 우리 정부가 너무 걱정해서, 그때 논란이 많았죠.

 

어떤 사람이 제게 ‘아니 어떻게 팔레스타인에서, 카자흐스탄에서 공개집회를 합니까?’

제가 ‘그 나라 정부의 장관도 참석하는 행사입니다.’

 

‘당신들이 기독교인이 아니라고 속였지요?’

‘아닙니다. 우리는 기독교인이라고 말하고 시작합니다.

 

그런데 팔레스타인, 카자흐스탄에서, 아프간 카불 공설운동장에서 집회했습니다.

우리는 기독교인입니다. 알리고 그 나라 장관들과 다 협의합니다. 프로그램을요.’

 

이슬람 선교는 열심히 하지만, 이슬람 연구 분석은 안 합니다.

선교사역에 헌신하다 보면, 시간이 없어서 연구를 못 합니다.

그러니까 이슬람을 알아야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슬람은 우리가 선교할 때는, 이슬람에 대해서 깊게 안 알아도 됩니다.

복음이 능력이니까요. 그러나 정책을 장기적으로 수립할 때는, 이슬람을 알아야 됩니다.

 

 

▲3. 이슬람의 또 하나의 독특성은, <이슬람 해외 이주>가 엄청납니다. 아시죠?

지금 세계 자체가 글로벌 유동성이 엄청 심화되어서,

세계가 시장이 지배하는 세계 체제, 원 글로벌 마케팅이 되면서, 이주 현상이 보편화 되어 있습니다.

 

글로벌 커뮤니티가 된 거죠. 그러다 보니까 특별히 이슬람 인구가 폭증하니까,

이슬람에는 젊은이가 많으니까요.

 

한국, 일본은 고령화되니까, 많이 이주 못 합니다. 점점 육아도 줄잖아요.

그런데 이슬람은 젊은이 인구가 폭증하니까, 막 이주자들이 전 세계로 몰려가는 거죠.

 

그리고 금요일 이슬람 예배는, 당당하게 이슬람 성직자들이 포교설교를 합니다.

‘당신들은 전 세계로 나가라.’

 

그래서 아이를 엄청나게 많이 낳습니다. 그리고 이슬람 청년 중동 멋있잖아요.

덩치 크고 약간 까무잡잡하고, 또 엄청하게 육체적인 힘이 강해요.

그래서 한국 자매들도, 무슬림 선교사들과 수 천 명 (추산) 엄청나게 결혼했습니다.

 

그 무슬림 청년에게 ‘당신 예수 믿냐?’

‘아, 당연히 믿죠.’

 

뭘로 믿느냐고 물어야죠. '선지자냐, 메시아냐?'로 물어야지요.

그러나 믿음이 훈련이 안 된 자매들은, 그런 거 잘 모르죠.

 

또 무슬림 청년이 찬양도 따라 부릅니다. 아, 예수 찬양하죠, 왜 못해요?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 대목만 없으면, 안심하고 찬양하죠.

어차피 예수가 오셔서 심판할 재림자인데, (코란에 예수님이 그런 선지자로 나옵니다.)

 

성령으로 잉태된 예수는 안 믿는 거죠.

 

이슬람에 의하면,

그래서 이번에 지난 라마단 때, 이슬람 IS 사이비 국가지만 창설한 아부 바크르 알 바그다디

소위 캘리프 라고 선언한 사람이, 라마단 특별 메시지를 전 세계에 전파했는데,

그 7~8개 항목 중에,

 

‘우리는 예수의 재림을 믿으며, 그가 심판하실 것을 믿는다.’ 코란 3장55절.

‘알라가 가라사대, 내가 예수를 지극히 영광스럽게 하고, 예수를 따르는 자들을 영화롭게 하리라’

예수를 (선지자로, 사람으로) 따른다니, 크리스천도 미혹되는 거죠.

 

그러니까 이슬람을 모르니, 막 헷갈리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 인터콥이 이슬람에 가면, 가자마자 얘기합니다.

‘나는 크리스천이다.’ 그렇지 않으면 나중에 공격당합니다.

 

처음부터 크리스천이라 말 해야 사는 거죠. 그러면 손 안 대요.

‘말 안 했어? 나중에 알게 되었어? 이 친구 봐라.’ 그래서 문제가 되는 겁니다.

 

자신을 밝혀야 되는 겁니다. 정직하게 해야 됩니다

괜히 작전하다가 자기가 터지는 겁니다.

그렇게 처음에 작전한 이유가, 이슬람을 몰라서 그러는 거죠.

 

제가 터키에서 쫓겨날 때, 그 날 우리 마을 사람들이 막 떼거지로 몰려와서

‘우리가 정부에게 항의하겠다. 우리가 너를 처음부터 아는데, 왜 정부가 너를 쫓아내느냐?’

제가 데모하지 말라고 그랬죠. 그러면 다음 후배들을 어떻게 보내겠습니까.

시끄럽게 신문에 나고 그러면요.

 

그러니까 이슬람을 알아야 되는데, 모르면 복잡해집니다.

그래서 이슬람의 메카니즘을 알아야 되는데, 별로 크게 어려운 것은 아닌데,

아무래도 체계적으로 해야, 핵심을 알게 되잖아요.

 

그냥 교리, 금식, 맨날 종교적 행위 책만 보니까, 그건 사실 몰라도 됩니다.

모든 종교에 있는 종교행위를.. 어차피 모든 종교에 다 있는 것인데요.

 

 

▲4. 그 다음에 <이슬람 글로벌 현상>이 아주 독특합니다.

그래서 이주자들이 가고, 우리 한인들이 여기 미국 땅에 왔습니다.

보세요. 1.5세, 1.7세, 2세 이렇게 나누는데요.

 

우리 한국인은 2세대가 되면 아주 민족성 자체가 바뀌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슬람은 3세대, 5세대가 되어도 안 바뀝니다.

보세요, 뉴욕의 아랍인들, 터키인들. 3세 4세 5세대에 가도 똑 같습니다.

 

그런데 한국인들은 2세만 되어도, 완전 서구화로 개종되어서, 부모와도 대화도 안 됩니다.

급속하게 변화됩니다.

 

한국인은 출세하기 위해서 몸부림 치는 겁니다.

그래서 미국사회에 일찍 동화되려고 합니다.

 

그들 무슬림들은 자기 이슬람 세계관이 지배하기 때문에, 출세하기 위해서 몸부림치지 않습니다.

우리 한국인들은, 막 생존, 2천년 동안 고난 받으며 살다 보니까,

중국과 일본 사이에서, 그냥 생존을 위해서 몸부림치니까,

생존을 위해서 자기자체를 개조시키고 민족성을 바꿔버립니다.

 

미국만 아니라, 옛날 블라디보스톡(연해주), 중앙아시아에 갔던 한인들도

미국 교포들과 비슷한 현상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물론 그 중에는 민족적 정체성을 지키고 있는 사람들도 일부 있지만요.

 

소비에트 150개 국가중에서, 이렇게 개종된 2세 3세 때 종족 자체가 달라져 버린 건

우리 민족이 톡특합니다.

우리 들은 어디 가든지, 쉽게 그 나라에 적응을 잘 합니다.

 

상황화 contextualization 라는 말은, 한국인들에게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건 상황화가 안 되는 사람들에게나 필요한 말인데,

우리는 상황화를 안 가르쳐 줘도, 스스로 알아서 너무 잘 합니다.

어딜 가든지 현지인처럼 금방 동화되어 버립니다.

 

그러나 아랍인들은 절대 바꾸지 않습니다.

오히려 팀을 이뤄서 보이지 않는 가상의 무슬림 공동체를 도시마다 이루어서,

그 나라를 바꾸려 합니다. 절대로 변화되지 않습니다.

 

‘한국으로 엄청나게 몰려오니까, 이주자들 잘 해주자.’ 막 국가가 켐페인을 했습니다.

이슬람을 몰라서 그렇습니다. 아무리 잘 해 주어도, 바뀌지 않습니다.

복음 이외에는 방법이 없습니다. 우리 정책이 잘못된 거죠.

 

아예 노동자를 다른 데서 불러오거나, 캄보디아, 미얀마 등 비이슬람 권에서요.

‘불러다놓고 잘 해주자?’ .. 절대 되지 않습니다.

 

우리 한국인들이 급속 개종되니까, 저네(무슬림)들도 그렇게 될 줄 아는데,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무슬림은 절대로 안 변하는 종족이고,

이 두 가지를 비교연구하면, 거의 박사학위 논문이 나올 것입니다.

 

 

▲5. 글로벌 지하드

와하비 사우디에서 시작했는데,

어쨌든 처음부터 사우디 왕가와 종교와 정치가 통합한 메카니즘에서 시작했습니다.

처음부터 원형이 그렇습니다.

 

그러면서 나중에 서구 식민지 통치를 받다 보니까, 막 서구에 대한 저항의식이 있는데,

열등의식 속에서 헤매다가 1차세계대전이 터지고, 서구가 세계대전을 일으켰습니다.

 

그러면서 서구세계에서 자체 자기반성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지적 사회의 담론을 자기(이슬람 지식층)들이 듣죠.

그러면서 1920년 대에 ‘이제 서구는 안 되겠다’

 

그러다 2차세계대전이 또 터졌습니다.

자신감을 갖고서 이슬람이 더 확신했습니다. ‘이제 서구는 안 된다.’

'힘으로 세계를 지배하면서 권력투쟁하고 헤게모니 투쟁하는 서구는 안 된다.

그 이유는 문명이 다 타락해서 그렇다.'

 

그러면서 <이슬람 형제단>이 등장하는데,

하산 알 바나 Hasan al-Bannā 가 이집트에서 무슬림 형제단을 시작합니다.  주1)

서구문명에 대한 저항운동이 싹트기 시작했죠.

 

그런데 서구의 세계를 민족주의 체제 프로젝트, 민족주의 시대의 도래,

이게 전세계로 퍼져나가다가

아랍세계도 이슬람인데 민족국가, 이집트 민족주의, 터키 민족주의가 막 나온 겁니다.

 

이걸 막 저항하면서, ‘우리는 하나의 이슬람이다. 왜 민족으로 이슬람 세계를 나누느냐’

그러면서 저항운동을 했는데, 팔 바너

그 다음에 싸이드 쿠틉 Sayyid Qutb 이 사람이 미국 버클리에서 공부했는데,   주2)

그때 하필 60년대에 유학왔습니다. 히피들이 난리칠 때,

 

그걸 보면서 타락한 미국이라는 확신을 갖고 돌아가서,

‘이것은 지금 유럽이 아니고, 모든 서구세계가 심각한데,

이들이 세계를 타락시킨다. 그래서 타락한 서구의 리더십을 해체시켜라. 인류 미래를 위하여.’

그러면서 글로벌 지하드를 이론화 시킵니다. 글로벌 지하드!

 

그래서 그들이 글로벌 지하드를 전개하게 된게 2가지 이유입니다.

1) 서구는 힘으로 세계를 지배한다. 문제는 그들은 타락한 인생들이다.

그래서 글로벌 지하드를 해야 한다.

 

이게 나중에 알 카에다, IS로 발전하게 되는데요.

 

제가 1980년대부터 이런 사람들을 만나 보았습니다. 다 똑똑한 사람들입니다.

대학의 젊은 강사로 뛰는 사람들입니다.

동네에서 그냥 사는 무슬림하고는 다릅니다.

 

다 똑똑한 사람들. 알 카에다, IS에 들어와 있잖아요.

유럽, 미국에서 건너간 사람들이 중심멤버 들입니다.

유럽, 영국, 독일, 프랑스, 호주의 시민권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다 대학을 졸업한 이슬람 청년들입니다.

 

무식해서, 종교적으로 세뇌되어서 ‘내 몸 던지고 죽는다’는

그런 사회 부적응자도 IS에 일부 있겠지만,

그들을 움직이는 수뇌부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세계관을 정치화 시켜서, political Islam을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막 정치 투쟁을 합니다.

 

그런데 그 타깃을 보십시오.

911때 세계무역센타와 펜타곤

-세계무역센터는 세계 경제력의 상징입니다.

-펜타곤은 세계 군사력의 상징입니다.

 

서구가 경제력과 군사력으로 세계를 지배하면서, 세계를 타락시킨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 두 심벌을 공격한 것입니다.

공격할 대상이 많은데, 하필 왜 거기를 공격했을까요?

 

제가 1980년대부터 무슬림들을 만날 때마다

‘저항하면 안 됩니다. 물리적 투쟁으로 세계는 절대로 좋게 되지 않습니다’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예수님이 하신 방법, 풀뿌리 운동, 한 사람씩 변해야 한다고 얘길 하죠.

‘그게 더딜 것 같지만, 세계를 바꾸는 방법입니다.

그렇게 투쟁하고 저항한다고 되는 게 아닙니다.’

 

그러면 무슬림들이 뭐라고 그러는가 하면,

‘무슨 얘기를 하시는 것입니까? 당신들 기독교인들은 유럽을 1천~1천5백년 동안 지배해 오면서,

이렇게 타락시켜놓고, 왜 실패한 모델을 얘기하십니까?’

 

당신들에게는 충분한 기회를 주었지만, 다 타락시켰다는 겁니다.

그리고 지금도 타락했다는 겁니다.

그리고 왜 실패한 모델을 거론하느냐는 겁니다.

 

그래서 자기들은, 자기들의 방법 밖에 안 남았다고 합니다.

 

'전 세계가 타락했고, 우리 이슬람권만 남았는데, 여기도 지금 타락해 가고 있다.'

개인주의, 알코올 문화, 성적 타락, 물질주의

돈만 있으면 엄청난 권세를 휘두르고..

돈 없으면 비굴하게 돈 앞에 무릎 꿇고.. 이 돈이 지배하는 사회에 대항해서

계속해서 ‘글로벌 저항운동’을 펼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칼 막스가 ‘사회적 분배 정의 justice’를 내세워서 세계의 반쪽을 지난 1백년간 지배했는데,

지금 이슬람 극단주의는 ‘도덕성 morality’을 들고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방식은, 이슬람 국가의 엄격한 율법을 회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종교가 정치와 통합해서,

이슬람법에 배치되는 사악한 모든 것을 제거하려 드는 것입니다.

 

그 동기 모티베이션은, ‘타락한 서구 문명에 대한 저항의식’입니다.

 

그래서 왜 911사태와 같은 극단적 테러를 저질렀느냐?

세계에 메시지를 주기 위해서랍니다.

‘우리는 타락한 서구 문명에 도전한다. 서구문명의 리더십은 해체되어야 한다. 인류 미래를 위해서!’

 

타락한 서구문명이 세계를 리드하면, 인류 전체가 타락한다는,

자기들만의 편협된 논리를 들고 나오고 있습니다.

그래서 스톱시켜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메시지를 미국도, 유럽도 받지 못했습니다.

한국, 일본도 못 받았습니다.

 

그런데 남미가 받았습니다. 중국, 러시아도 받았다고 봅니다.

그들 국민들 가운데 일부가 빈 라덴을 칭송하고 나섰습니다.

아프리카 국민들 가운데 일부도 빈 라덴을 칭송했습니다.

이슬람국가들의 국민들 중 많은 사람들이 빈 라덴을 지지한 것은, 당연하고요.

 

무슬림들은 ‘너희 기독교인들이 세계를 다 전반적으로 타락시키지 않았느냐’

그때 우리 기독교는 ‘이 땅에 죄가 있어서 그렇다. 우리는 천국을 소망하고 지향한다.

물론 우리가 이 땅을 포기하는 것은 아니다.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되,

그러나 궁극적으로 천국을 소망한다.

우리는 이 세상을 다스리되, 사랑으로, 섬김과 봉사로 다스린다. 군사, 경제적 파워가 아니라!’

 

이것이 바로 천국 복음 kingdom gospel입니다.

이 복음이 땅끝까지 전파될 때, 주님이 다시 오실 것을, 우리는 기다립니다.

 

우리는 social gospel 이 아니라, kingdom gospel입니다.

세상에 social gospel 하는 사람들은 많습니다.

(극단적 이슬람 저항운동도, 이 계열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불 수 있겠죠.)

그런데 kingdom gospel 하는 사람들은 점점 줄고 있습니다.

 

그의 이름으로 회개의 메시지가, 예루살렘으로부터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는

회개의 복음!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

죄로부터 회개가 없는 메시지가 무슨 킹덤 가스펠입니까.

 

911사태는 어떻게 보면, 서구물질 문명과 이슬람 종교문명의 지구적 충돌인데요,

사무엘 헌팅턴은, 세계를 몇 개의 큰 문명권으로 나누고, ‘문명간의 충돌’을 예견했지요.

그러나 더 엄격히 말하면 ‘물질문명’과 ‘정신/종교문명’의 지구적 충돌입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보면 프롤레타리아 운동의 국제화이죠.

 

고통하는 무슬림, 고통하는 세계

심리적 프롤레타리아(빈자들)들을 서구의 지배하에서 해방시키려는

국제적인 운동으로.. 그렇게 이슬람극단주의를 해석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소련이 해체되고 공산주의가 역사에서 막을 내리자

그것의 대안운동이, 이슬람 쪽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그래서 알카에다나 이슬람 극단주의 세력들은,

다 유럽에서 시작했습니다. 중동에서 시작한 게 아니에요.

 

그 원형은 아하비, 중동에서 시작했지만

그게 운동 movement 로 성장해서 발원한 곳은, 유럽입니다.

그게 지금 글로벌 운동으로 퍼지고 있는데, 역시 유럽이 진원지입니다.

 

유럽으로 이민 갔던 무슬림들의 자녀 세대들에게서,

또한 유럽으로 유학갔던 중동 무슬림 청년들에게서,

타락한 서구의 자본주의에 대항하는 운동이, 생기게 된 것이지요.

 

그들이 독일에서 사회주의 철학을 공부하고,

결국은 사회주의 운동을 이론적으로 배우고,

그것을 이슬람 신앙과 접합시켜서, 글로벌 운동으로 확산시켜 나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감당을 못해서 미국 오바마 대통령이

60개국가와 군사동맹을 맺었습니다.

 

저 IS의 핵심멤버들은 2~3만명입니다.

그 2~3만명을 감당 못해서, 60개국과 군사동맹을 맺었습니다.

한국 일본 다 포함해서, 2015년 1월에 결성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보세요, 우리나라 625때

미국이 한국을 돕기 위해서 16개국의 군사동맹을 데리고 왔습니다.

 

그때 소련과 중공이라는 엄청난 대국이 개입했는데, 자유진영에서 고작 16개국 참전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저 IS 2~3만명 감당 못해서, 60개국이 군사동맹을 맺었습니다.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날까요?

영적인 세력이 배후에서 역사하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4천년 전에 시작된, 이삭과 이스마엘의 갈등이

이제 지구적으로 팽창된 거죠.

 

4천년 동안 지속적으로 팽창되어온 구조적 갈등이

이제 지구적으로 세계를 흔들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4천년의 뿌리를 가진 갈등이 지구를 흔드니까,

세계의 국가들이 지금 난리를 치고 있습니다. 이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서요.

 

그런데 쉽게 감당하지 못하리라 내다봅니다.

왜냐하면 단순한 표면적 문제가 아니라, 영적인 문제이니까요.

어떻게 보면, 이것은 세계교회가 감당해야 할 일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책임이고, 우리의 문제입니다.

 

그런데 세계 교회는, 지금 대개 방관하고 있고, 방관하니까

세계 국가들이 이것을 해결하겠다고 난리 치면서

지금 이라크, 시리아에서 지난 수년 동안, 50만 명이 사망했습니다.

 

1100만명의 난민이 발생했습니다.

50만명이나 죽이고, 그 땅에 평화를 갖고 오겠다는 것은..

이건 마귀나 하는 일입니다.

 

우리 세계 교회가 방관하는 사이에, 세계 정부가 문제 해결하겠다고 나서는데,

난장판이 될 가능성도 큽니다.

 

이슬람 극단주의자 1명 죽이면, 자기 집안 친척 중심으로 10명의 테러리스트들이 나올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 중에 또 1명 죽이면, 또 그 주위 가족, 친척 가운데서 테러리스트가 10명이 자원할 것입니다.

그러니까 군사적 해결은, 방법이 되지 못합니다.

 

그러니까 교회가, 우리의 방법으로 기도하고, 복음전하고, 천국 복음을 전해야 하는 겁니다.

 

 

▲그럼 어떻게 복음을 전할까요?

내부자 운동 좋습니다. 잘 지혜롭게 하는 겁니다.

 

또 한 가지는 spiritual innovation

은과 금은 내게 없으나

자기들이 은과 금이 세계를 지배한다고, 거기에 반발하잖아요?

 

그러니 우리는, 은과 금은 내게 없으나,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나아가는 겁니다.

그 외 다른 방법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자꾸 다른 전략 세워봐야, 별로 소용없습니다.

은과 금이 아닌, 나사렛 예수의 이름의 능력으로!

 

그래서 하여간 중동 전체 아랍 세계는 둘로 나눠져 있습니다.

하나는 왕정국가 – 사우디, 쿠웨이트, UAE, 요르단

하나는 대통령제 국가 – 선거를 통해서 대통령을 뽑습니다. 튀니지, 리비아, 이집트, 시리아, 이라크

 

그런데 소위 아랍 민주화 운동이 일어나서, 지금 대통령제 국가들이 다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대신에 왕정 국가들은 다 살아남았습니다.

 

누가 더 독재입니까? 왕정국가 철권 통치가 지배하는 게 더 독재죠.

그런데 어떻게 된 일인지, 민주화 아랍의 봄 운동이 일어나더니,

진짜 독재 왕정국가들은 건재하고, 대통령제 국가들이 다 붕괴되고 말았습니다.

 

시리아 하나 대통령제가 남았는데, 저거 하나 제거하자고 소요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제거한 나라마다 이슬람이 득세하고 있습니다.

(민주화가 된 게 아니고, 극단주의 이슬람으로 돌아가 버렸습니다.)

 

하여간 주님은 그래도 역사하십니다.

IS가 3천개 웹사이트를 만들어서, 전 세계 3천곳에서 리쿠르트를 했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말씀드린 논리를 계속 전개하면서, 서구사회를 비판했습니다.

 

그럼 관심 있는 사람들도 생겨나게 되겠지요.

그러면 파리, 런던, 시드니 이런 곳에서, 접촉자들을 만나서, 시리아로 데리고 갑니다.

 

   그런데 이런 IS의 만행에 대해, 자체적으로 대항하는 세력도 일어났습니다.

   ‘야, 너희들이 참수해서 죽이니까, 세계가 이슬람이 나쁜 종교라고 욕하고 있다.

   왜 그런 짓을 하느냐? 너희는 가짜 이슬람이다.’

   이렇게 순진한 무슬림들이 거기에 댓글을 달아서 비판했습니다.

 

   그런데 IS는 코란의 경전의 근거를 제시합니다. 코란 몇 장 몇 절에

   ‘변절자들은 참수하라고 되어있다.’며 자기들은 코란대로 따른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면 평소에 코란을 전혀 읽지 않던 무슬림들이 혼란에 빠집니다.

   IS의 극단주의 이슬람 운동에 합류할 것인가,

   아니면 ‘이게 이슬람이었어? 세계가 이슬람화 될 때까지 전쟁을 계속 한다고?’

 

   그래서 막 이슬람에서 이탈하는 세력도 생겨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엄청난 이탈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말도 못합니다.

 

제가 최근에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 있는 젊은 목회자를 만났는데,

그 분이 제게 하는 말이 ‘지난 수 년 동안에, 2백만명의 무슬림이 기독교로 돌아왔습니다.'

 

제가 7월에 사우디에 갔는데요, 거기서 목격한 엄청난 변화는 말도 못합니다.

 

지금 이란은요, 1992년에 2천5백명의 크리스천, 지금은 3백만명이 되었습니다.

막 폭발적으로 성장하고 있습니다. 엄청납니다.

 

이런 혼란과 소요 가운데서도 하나님은 역사하시고 계십니다. 관계없습니다.

할렐루야! 

 

..................................

 

주1)  하산 알 반나  Hasan al-Banna  1906∼1949

이집트의 무슬림 형제단의 초대 단장(mur-shid). 나일 델타농촌 출신.

다르 알 울름(‘학문의 집’)에서 학문을 배우고, 도시생활의 허식에 반발해,

1929년 중학교교원으로서 부임한 이스마일리야에서 형제단을 비밀결사로 창설했다.

1940년대에는 이집트 최대의 대중정치단체가 되었다. 그의 성향은 보수적이었다.

그는 이 조직을 신비적 권위로서 통할했다. 팔레스타인 분규 때는 대중을 선동하고,

비밀군사기관에 의한 요인암살 등의 테러를 조직했는데, 역으로 비밀경찰에 의해 암살당했다.

 (이슬람사전, 2002. 11. 15., 학문사)

 

 

주2) 사이드 쿠틉   Sayyid Qutb     1906~1966

그는 이슬람 원리주의 이론과 행동철학을 다듬고 체계화하여

이슬람 원리주의 운동의 새로운 이정표를 제시한

‘이슬람 이데올로기화’와 ‘이슬람 혁명’이론의 주창자이다.

오늘날 이집트를 비롯한 무슬림 세계 전역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슬람 원리주의 운동에 있어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로 평가 받고 있다.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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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적으로 본 이슬람 세계

 

아랍과 이슬람 세계를 지칭하는 용어는 매우 다양하다. 아랍·중동·이슬람 세계는 각기 어떻게 정의될 수 있는가. 아랍세계란 아랍어를 국어로 사용하고, 이슬람을 국교로 정한 나라들의 집합체를 의미한다. 이는 언어적, 정치적 개념의 국가집단이다.

 

아랍세계에 속하는 국가들은 아랍연맹(1942년 결성)에 속해 있는 22개국(3억명)이다. 아랍세계로 분류되는 국가에는 시리아·레바논·요르단·팔레스타인·이라크·사우디아라비아·쿠웨이트·바레인·카타르·아랍에미리트·오만·예멘·(남북예멘1991년 통합이집트·수단·지부티·소말리아·리비아·튀니지·알제리·모로코·모리타니·코모로 등이 포함된다.

 

이들은 서남아시아와 북아프리카 지역에 분포되어 있다. 아랍세계의 중요한 역할은 아시아·유럽·아프리카 대륙을 잇는 교량 역할과 세계문화의 중심부 역할이다. 아랍세계에서 생성된 문명에는 고대 나일 문명과 메소포타미아 문명 그리고 중세 사라센 문명이 있다.

 

중동이란 유럽중심주의 시각에 의한 지정학적 개념이다. 중동은 동양(East)·근동(Near East)·오리엔트(Orient: 라틴어로 동양의 의미레반트(Levant: 동양, 해뜨는 곳) 등으로 불렸다. 13세기 지중해 무역을 장악했던 이탈리아 상인들은 지중해 동부를 레반트라 지칭했다. 그후 16~17세기 서구유럽이 발칸반도 이남의 오스만터키 제국을 동양이라 지칭하였으며, 동시에 극동이라는 용어도 사용했다.

 

19세기 페르시아와 인도에 대한 영국과 프랑스 제국주의의 개입이 증대되면서 오스만터키 지역은 근동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그후 1902년 미 해군 제독 앨프리드 마한이 페르시아만 주변 지역을 처음으로 중동이라 칭했으며, 1930년대 후반 영국 정부가 중동사령부를 설립하면서 중동이라는 용어가 공식화되었다. 이후 영국의 중동지역에 포함되었다.

 

1946년 미국 워싱턴에는 중동연구소가 설립되었으며, 미국도 공식적으로 중동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현재 미 국방부에는 공식 명칭으로 근동과(Near Eastern Affairs)가 존재하나 비공식적으로 중동이라는 용어가 더 선호되고 있다. 영국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중동이라는 용어를 공식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유럽중심주의 시각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이 지역을 서남아시아(Southwest Asia)라고 부르는 학자도 있다. 중동이라는 용어 속에는 아시아·아프리카·유럽 대륙 사이의 중계 역할 개념과 지정학적 중심지 개념 그리고 전략적 요충지 개념이 내포되어 있다.

 

중동에 속하는 국가는 이집트·터키·시리아·레바논·팔레스타인·이스라엘·요르단·이라크·사우디아라비아·이란·쿠웨이트· 바레인· 카타르 ·아랍에미리트 ·오만 ·예멘 ·사이프러스 등이며, 크레시·피셔 같은 학자들은 여기에 아프가니스탄과 리비아를 포함시키기도 한다.

 

이슬람세계란 이슬람을 국교로 정한 나라와 무슬림이 다수파를 형성하고 있는 모든 나라(아랍세계 포함)의 집합을 의미한다. 현재 이슬람세계에는 이슬람 기구(Organization of Islamic Conference: OIC) 소속 56개 국가(13억명)가 포함되어 있다.

 

이슬람세계에는 아랍세계 22개국과 아프가니스탄·알바니아·아제르바이잔·방글라데시·베넹·브루나이·부르키나파소·카메룬·차드·코모로· 가봉· 감비아 ·기니비사우· 기니· 가이아나· 인도네시아 ·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 말레이시아· 몰디브· 말리· 모잠비크· 니제르 ·나이지리아 ·파키스탄 ·세네갈· 시에라리온 ·수리남 ·이란· 타지키스탄 ·터키 투르크메니스탄 ·우간다 ·우즈베키스탄 등이 포함된다.

 

 

이슬람 국가들은 주로 아시아·중동·아프리카 지역에 분포되어 있다. 이슬람 국가들은 경제적으로 일부 산유국을 제외하고 거의 대부분 빈국에 속하며, 정치적으로도 대부분 제3세계 민족주의와 연관되어 있다.

 

13억명, 56개국의 이슬람 세계 분포

 

우리는 흔히 이슬람 하면 아랍을 떠올리게 된다. 아랍이 이슬람의 본산이며, 이슬람교는 아랍인들만 믿는 종교로 생각하기 쉽다. 이러한 선입견은 무슬림(이슬람교 신자)들이 하나님의 마지막 예언자로 보는 무함마드(마호메트의 아랍어에 따른 표기)가 아랍인이기 때문에 비롯된 것으로 생각된다. 물론 아랍이 이슬람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중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랍이 이슬람의 전부는 아니다. 수적으로 보더라도 13억명의 무슬림 중 아랍인들은 3억명에 불과하다.

 

그 예로 현재 지구상에서 가장 큰 이슬람 국가가 어디인가 하는 것을 생각해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지구상에서 가장 큰 이슬람 국가는 바로 인도네시아다. 인도네시아 전체 인구 약22,000만명 중 18,000만 정도가 무슬림이다.그 외에 동남아시아의 말레이시아와 브루나이는 물론이거니와 우리가 불교국가로 여기는 태국의 남부 5개 주도 그 숫자가 무려700만명에 이르는 무슬림 지역이다. 또한 태국 내 30여개 주에 500만명의 무슬림이 고루 분포되어 있다. 최근 서구인 인질 납치로 자주 외신에 오르내리는 필리핀 남부지역 민다나오 등도 이슬람 지역이다.

 

중앙아시아 역시 이슬람지역으로, 요즘 우리가 언론에서 많이 접하는 우즈베키스탄·카자흐스탄·타지키스탄·투르크메니스탄·키르기스스탄·타타르·아제르바이잔 등이 이에 해당하는데, 이 지역들은 특히 옛 소련의 공산주의를 경험하고 나서도 아직까지 이슬람 지역으로 남아 있다. 아프리카에서는 북부아프리카가 전부 이슬람화되었고, 남부아프리카 및 중부아프리카에서는 해안가를 중심으로 대략 반 정도가 이슬람화되어 있다.

 

유럽에서는 서쪽으로 스페인 남부지역이 17세기 초까지 이슬람 지역이었으며 알함브라 궁전과 같은 훌륭한 안달루스 문화를 이룩해 놓았다. 동쪽으로는 요즘 문제가 되고 있는 보스니아와 코소보 주변이 이슬람화되어 있다. 이들 지역도 역시 중앙아시아의 이슬람 국가들처럼 공산주의를 겪고도 아직까지 이슬람 국가로 남아 있으며, 현재 주변 민족들과 심각한 분쟁을 경험하고 있다.

 

또한 교통과 통신의 발전과 더불어 기타 여러 유럽 국가들과 많은 문화 교류가 이루어지면서 이슬람교는 유럽국가들 사이에서도 급속히 번창해 유럽 제2의 종교로 부상하고 있다. 그 실례로 영국의 런던 한곳에만 300여개의 이슬람 성원(모스크 혹은 마스지드로 불림)이 존재한다. 이와 같이 이슬람교는 우리나라를 비롯한 동북아시아의 몇 나라 및 남미쪽에만 낯선 거대한 종교·문화공동체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러한 거대종교 공동체가 형성되었으며 현재 그 분포는 어떤가. 이슬람 세계에 대한 우리의 관심은 바로 이 지점에서 시작한다. 7세기 초엽 예언자 무함마드에 의해 전파된 이슬람교는 100년도 안되는 짧은 시간에 아시아·아프리카·유럽을 잇는 광대한 영역에 뿌리를 내렸다.

무함마드, 새로운 종교를 열다

무함마드는 서기 570년 아라비아의 서부 지역에 위치한 메카라는 도시에서 태어났다. 당시 메카는 종교도시이자 부유한 상업도시였다. 메카에는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을 받아 건설한 카바 신전이 있었지만, 아랍인들 사이에서는 그들의 대상활동의 안녕을 기원하는 우상숭배의 중심지로 자리잡았고, 인도양과 지중해를 연결하는 중개무역의 거점이기도 했다.

 

이는 비잔틴제국과 페르시아 간의 오랜 싸움과 적대 관계로 인해 동서를 잇는 시리아-페르시아 간의 교통로가 거의 폐쇄되자 예멘-아라비아 서부-시리아로 연결되는 동서교역의 새로운 통로가 열렸는데, 메카는 이 통상 교역로의 중간 지점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아랍부족 중 가장 유력하던 꾸라이쉬 족이 메카의 상권을 잡고 있었고 이 메카 상인들은 새 교역로의 개척에 눈부신 활약을 했다. 이러한 메카 꾸라이쉬 족의 한 가난한 집안에서 유복자로 태어난 무함마드는 장성하여 청년시절 부유한 과부 카디자에게 고용돼 대상활동을 하면서 각지로 돌아다녔다.

 

그 후 여주인과 결혼한 그는 종교적 사색과 명상에 잠기곤 했는데, 610년 천사 가브리엘을 통해 하나님의 계시를 받고 유일신 사상을 설파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한결같이 아랍사회의 기존 가치관에 배치되는 것이었다.

 

그는 다신교적 우상숭배를 부정했으며 고리대금이나 도박, 음주, 난잡한 결혼 등 아랍의 고대 악습을 배척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기존의 종교관 및 사회관습에 대한 근본적인 개혁을 요구하는 내용들이었기 때문에 무함마드는 당시 지배층의 강한 반발에 부닥쳐 박해와 수난을 받았다.

 

박해가 심해지는 와중에 그는 622년 하나님(알라)으로부터 이주의 계시를 받고 그를 따르던 이슬람 신자들과 함께 메디나로 이주하였다. 이것을 히즈라라고 부르며, 그때를 이슬람력의 원년으로 삼았다.

 

메디나로 이주한 무함마드는 그곳에서 최초의 이슬람 공동체인 움마를 형성하는데 성공하고 이주 10년 후에는 메카에 무혈입성한다. 이때부터 이슬람 세력은 급속히 팽창했다. 이슬람은 아라비아반도에서 북으로 진출해 7세기 초반에는 고대문명의 발상지인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 지역으로 세력을 확대했다.

 

그 결과 이 두 지역 사이에 있는 팔레스타인과 시리아 지방이 이슬람화되었고, 13세기에는 소아시아반도가 이슬람화되었다.그보다 앞선 7세기 후반에는 동쪽으로 이란고원을 석권했고, 8세기 초에는 중앙아시아와 인도 대륙의 북서부까지 진출했다. 8세기 중엽에는 고구려 유민인 고선지 장군이 이끄는 중국의 당나라 군대를 키르기스스탄의 탈라스에서 격파함으로써 중앙아시아 전역이 이슬람권의 영향 하에 들어오게 되었다.

 

그후 다시 동쪽으로 중국의 수도인 장안(長安) 및 내륙지방은 물론 만주와 한반도에까지 무슬림 상인들이 드나들면서 이슬람이 전파됐다. 한편 해상 실크로드인 뱃길을 통해 남방으로 진출한 무슬림들은 13세기 이후 말레이시아·인도네시아 및 필리핀의 민다나오 섬에까지 그 위력을 떨치게 된 것이다.

 

북아프리카에서 코카서스 지방까지 진출

 

이집트에서 서쪽으로 진출한 이슬람은 7세기 후반 지중해 연안을 따라 리비아·튀니지·알제리 및 모로코에까지 전파됐다. 8세기 초에는 이베리아반도를 정복하여 약 700년 이상이나 그곳에서 권세를 누리다 13세기부터 기독교 세력들의 재정복에 밀렸고, 17세기 초에는 그 흔적만 남기고 사라지게 되었다.

 

북아프리카를 석권한 이슬람은 이 대륙의 해안과 내륙지방으로 진출해 동쪽 해안의 소말리아·에티오피아·케냐·탄자니아·잔지바르·모잠비크·마다가스카르에 이르렀고 서쪽 해안으로 모리타니아·세네갈·감비아·니제르 및 나이제리아로 진출하였으며, 내륙으로는 차드·수단·우간다에도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북아프리카 일대로의 전파는 이슬람 초기에 달성되었으나 동서 해안 지역과 내륙 지방으로의 진출은 14~15세기 이후에 이뤄졌으며 아직 전통적 민속신앙 요소가 많이 섞여 있는 것이 그 특징이다. 15세기 중반, 비잔틴제국을 멸망시킨 오스만터키제국의 이슬람 세력은 발칸반도로 진출하여 루마니아·불가리아·알바니아·옛 유고슬라비아의 남부지역 및 그리스 등에도 무슬림들이 산재하게 됐으며, 코카서스반도로도 뻗어가 옛소련의 아제르바이잔공화국과 코카서스 지방도 이슬람화되었다.

 

주요 이슬람 국가의 무슬림 분포 현황은 앞쪽에 첨부한 지도와 같다(이슬람 국가들의 인구통계치는 정치·문화적 이유로 발표지마다 상당한 차이가 있어 본 통계수치는 필자가 가장 적절하다고 판단한 수치를 사용하였음). 현재 이슬람 세계가 세계 전체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살펴 보면, 전 세계 영토의23%가 이슬람권이며, 전 세계 인구의 약 20%가 무슬림이다.

 

또한 미·소 냉전체제가 종식된 후 문화와 종교를 근거로 한 신냉전체제가 형성되고 있는 시점에서(새뮤얼 헌팅턴 주장) 이슬람의 세계사적 역할은 앞으로 더욱 증대될 것이다. 신냉전 체제의 주체는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서구 기독교 세력과 아랍 이슬람 국가들을 중심으로 한 이슬람 세력이다. 서구 세계에서는 정치와 종교가 분리되어 있지만, 이슬람 세계에서는 정치와 종교가 분리되어 있지 않다. 이런 연유로 이슬람 원리주의의 근본 배경에는 이슬람의 정교일치 사상이 내재되어 있다.

 

미국과 이라크의 갈등, 미국과 이란의 갈등,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갈등, 미국과 리비아의 갈등, 소련과 아프가니스탄의 갈등, 보스니아와 세르비아의 갈등, 소련과 체첸의 갈등, 소말리아 내전, 수단 내전, 레바논 내전, 프랑스와 알제리 이슬람 세력 간의 갈등, 인도와 파키스탄 사이의 카슈미르 갈등의 배경에는 바로 이슬람 세력과 서구 사이의 갈등이 내재되어 있다.

 

이상과 같이 이슬람 국가들이 수많은 나라와 민족, 언어로 나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문화권으로 그 정체성을 유지하는 것은 바로 그들이 믿는 이슬람교 때문이다. 현대 이슬람사회는 급격히 변화하고 있다. 서구 열강의 압제를 경험한 신생 아랍 국가들이 독립후 채택한 사회주의 이념과 경제체제가 더 이상 국제경쟁력을 갖지 못하고 국민의 복지에 큰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자각이 일면서 서구와의 협력관계를 적극 모색하고 있다.

 

친서방 성향의 온건 왕정국가들조차 폐쇄적이고 권위적인 정치에서 서서히 민주주의와 인권의 문제에 보다 전향적인 자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더욱이 요르단과 모로코·바레인에서 젊은 국왕이 연이어 등장하면서 이슬람권 전역에서 세대교체의 분위기가 확산되고 있다.

 

강경한 반미 국가인 리비아도 최근 미국과의 관계개선을 통해 경제제재 조치의 철폐에 주력하고 있고, 이란은 하타미의 개혁정책으로 새로운 돌파구를 마련하고 있다. 무엇보다 하타미 대통령은 이슬람권과 서구의 갈등을 예단한 새뮤얼 헌팅턴의 문명충돌론을 서구의 제3세계 지배 음모론이라며 신랄하게 비판하고, ‘문명간의 대화라는 새로운 담론을 제창해 유엔을 비롯한 국제사회로부터 큰 호응을 얻고 있다. 스스로도 이탈리아와 바티칸 교황청 방문을 시발로 유럽과 서구 국가들과의 관계 증진에 적극적인 자세를 보이고 있다

출처 :  이원삼 선문대 교수/이슬람문화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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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의 어원과 역사

 

이슬람의 어원은 아랍어 어근싸리마인데, 이 말은 특히 평화, 청결, 순종, 복종을 뜻한다. 종교적 의미에서의 이슬람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그분의 법에 복종을 뜻한다. 이 말의 원래 의미와 종교적 의미 사이의 관계는 깊고 명백하다. 오직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그분의 법에 복종하므로써만 진정한 평화를 실현하고 청결을 지속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이슬람에서 알라라는 말은 간단하나 지극히 단호하게, 온 세계의 창조자, 주중의 주, 왕 중의 왕이신 유일무이하고 영원한 하나님을 가리킨다. 이슬람에서 용서받을 수 없는 유일한 죄는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믿는 것이다. 무슬림들이 일상예배에서 가장 많이 쓰는 말을 다음에 들어둔다: “참으로 자비로우시고 참으로 자애로우신 하나님의 이름으로

 

이슬람은 서기 610년 무함맏(마호멧)40세에 최초로 알라(유일신,하나님)의 계시를 받은 이래 약 23년간에 걸쳐 계시 받은 꾸란(코란)이 그 경전이다.

 

초기 이슬람은 무함맏이 그의 출생지이며 최초 계시를 받은 지금의 사우디아라비아의 메카에서 그와 몇몇 소수의 교우들에 의해 포교되기 시작했으나 다신교적 분의기의 지역 부족들이 그들의 정치, 종교, 경제적 기득권 유지를 위해 박해한다.

 

이 박해를 피해 서기 622년 메디나라는 도시로 근거지를 옮기는데 이를 "히즈라" (성천,聖遷)이라고 합니다. 이를 기준으로 이슬람력 (히즈라력)이 생겼습니다.히즈라 이후 메디나에서 교세를 확장한 이슬람은 다시 메카로 진격하고 사우디 반도를 통일한다.

 

무함맏은 그의 나이 63세에 세상을 떠나고 그의 종교적, 정치적 지도자로서의 지위를 계승한 칼리프 (계승자) 시대가 시작된다. 칼리프는 실제로 신정일치의 이슬람 공동체를 이끄는 지도자로 만장일치에 의해 선출되며 세습되지 않았다. 선출에 의한 칼리프가 나라를 다스린 시기를 4대 칼리프 시대라 한다. 이후 칼리프의 구가는 동서 칼리프로 나누어지며 세습에 의한 왕조의 형태로 변질된다.

 

이 시기에 이슬람은 북으로 시리아를, 서로는 마그립(지금의 모로코)까지 진출하며 다시 바다를 건너 스페인으로 영역을 넓힙니다. 동으로는 이라크 지역과 페르시아, 다시 중앙 아시아를 거쳐 동남아시아에 이르는 광대한 영역을 지배하기에 이른다.

 

이러한 이슬람의 급격한 확장에 자극받은 중세 유럽은 10961차 십자군 전쟁을 일으킨 이후 1365년까지 아홉 차례, 250년에 걸친 십자군 전쟁을 일으키며 이슬람에 일격을 가한다.

 

이 십자군 전쟁으로 인해 이슬람은 그 확장세가 뚜렷이 둔화됨은 물론 과학과 철학, 동서 교역 등등 찬란히 발달했던 그들의 문화도 사그라진다. 물론 이슬람 문명은 암흑기 중세 유럽에 인본적 사상과 과학문명을 전하여 르네상스를 촉발 시키고 유럽 시민 문화와 산업 발달의 단초를 제공했다.

 

14세기 이후 이슬람 제국은 소아시아(터키) 지역에서 일어난 오스만 제국으로 그 중심이 옮겨간다.

오스만 제국은 비잔틴을 정복하고 그 세력을 확장하여 16세기에는 파키스탄과 이집트까지 확대되어 실질적인 이슬람 제국을 형성한다. 이집트를 근거로 했던 압바스 왕조로부터 칼리프의 칭호를 이양받은 오스만은 모로코를 제외한 북아프리카 전역과 흑해 연안까지 점령하고 지중해 해상권까지도 획득한다.

 

오스만 제국은 17세기를 지나 18세기에 이르러 쇠퇴의 길에 접어드는데 유럽 국가의 남진 정책과 프랑스의 이집트 점령, 아랍 각 지역의 반 오스만 운동과 이슬람 부흥 운동, 이란 페르시아의 새로운 왕조 성립등이 그 이유였다.

 

19세기 영국과 프랑스의 북아프리카, 아라비아 반도 점령과 식민 정책 이후 오스만은 현저히 쇠퇴 하였으며 1914년 세계 1차 대전이 일어나고 오스만은 패전국이 되어 영국과 프랑스의 아랍 지역에 대한 분할 통치가 실시된다.

 

20세기 이슬람은 2차 대전 후 각 아랍국의 독립과 이스라엘의 건국 등으로 아랍.이슬람 세력과 이스라엘.서구의 세력 대결 구도로 편성되었으며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영토 분쟁, 석유 개발에 따른 미국과 유럽, 옛소련의 대결로 세계의 전장이 되었다.

 

이스라엘을 앞세운 미국과 아랍국 간의 수차에 걸친 중동 전쟁, 그로 인한 석유 무기화, 1,2차 석유 파동 등 이슬람 지역은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전쟁 지역이 되고 만다. 결국 석유를 둘러싼 아랍 이슬람 지역에서의 우위 확보를 위해 미국의 대 아랍. 이슬람 정책이 이슬람 세력의 반발을 불러 오면서 미국에 대한 저항의 결과가 과격 테러로 이어지며 걸프 전쟁, 911 테러, 이라크 침공 등 분쟁이 계속되는 결과를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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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16세기의 오스만  제국군

 

13세기 말 몽골에 위협을 피해 소아시아에 정착한 투르코만 족은 오스만 1세가 비잔틴 국경지대의 8개의 성과 에스키세히르, 예니세히르를 점령하면서 오스만 공국을 건국했다. 4차 십자군의 콘스탄티노플 점령, 세르비아, 불가리아, 타타르 족의 침공, 대 카탈로니아 용병단의 반란으로 쇠약해진 비잔틴 제국을 약탈, 점령하면서 성장한 오스만 공국은 바야지드 1세(1389~1402년)가 1389년 세르비아 동맹국을 결정적으로 패배시켜 세르비아와 보스니아를 속국으로 만듦과 동시에 술탄 자리에 올라 제국의 반열에 올라섰다. (이전의 오스만의 군주들은 대공(Emir)의 칭호를 사용했다.) 이후 바야자드 1세 아래서 오스만 투르크 제국은 헝가리와 부르고뉴의 연합군을 제압하고(1396년) 콘스탄티노플 코앞까지 진군했으나, 1402년 14만의 병력을 이끌고 서진해 온 몽골의 후예 티무르에게 바야자드 1세가 이끄는 8만 5천명의 오스만 투르크 군이 앙카라에서 패배하고, 이어 바야자드 1세가 티무르 군에 사로잡혀 오스만 투르크 제국은 혼란기에 빠져들었다.

1413년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혼란을 종식시키고 술탄이 된 마호멧 1세(1413~1421년)는 오스만 투르크 제국을 재건했고 무라드 2세(1421~1451년)는 정복전쟁을 다시 재개해 1444년 코소보에서 그가 이끄는 5~6만 명의 오스만 군이 2만 4천명의 유럽연합군을 철저하게 패배시켜 콘스탄티노플을 고립시켰다. 정복자 메멧 2세(1451~1481년)는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고 비잔틴 제국을 멸망시켜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전성기를 열었다. 이후 오스만 투르크 제국은 1683년 비에나 공성전이 패배로 끝날 때까지 유럽의 최대위협세력으로 남는다.

전성기의 오스만 군대는 둔전병인 지방 기병대 시파히와 예나체리를 포함하는 술탄의 군대 카피쿨루 군단이 핵심을 이루었다. 이 외에 지원병인 아자프가 전쟁 중 보병으로 참전하고, 여러 속국에서 병력을 지원했다. 전통적인 오스만 투르크 군의 전술은 경기병인 아키닉스가 전초부대로써 정찰, 기습, 유인 등의 임무를 맡고, 아자프는 그 뒤에서 화살로 적군을 약화시키는 임무를, 예나체리는 중앙에 배치돼 참호와 목책, 낙타, 포병대의 도움을 받으면서 아군의 중앙과 술탄을 보호하는 임무를, 지방 기병대인 시파히는 양쪽 날개에 배치돼 적군이 아군의 중앙으로 돌파를 시도하면 적군의 측면과 후방을 강습해 적군을 괴멸시키는 역할을 맡았다. 술탄의 친위 기병대인 카푸쿨루 수바릴레이는 시파이의 뒤에 배치돼 필요하면 전장에 투입됐고, 타타르와 세르비아의 기병대를 진영 뒤에 숨겨 갑자기 적군을 기습하는 임무를 맡기기도 했다. 15~16세기의 오스만 투르크 제국은 대부분의 전쟁에는 2만~4만 명의 전투병을, 대규모 원정에는 6~8만 명의 병력을 투입했고, 최대 16만 명 정도의 병력을 전쟁에 동원할 수 있었다.


1.술탄의 군대. 카피쿨루 군단:


원래 술탄의 노예로 이루어진 술탄의 친위대였던 카피쿨루는 보병대인 예나체리를 추가시켜 술탄의 군대로 편성되었다. 카피쿨루 군단은 술탄의 기병대인 카푸쿨루 수바릴레이(Qapukulu Suvarilei, 궁정 기병대)와 정예 보병대인 예나체리를 주력으로 하고, 귀족 및 지방 유력자의 자제들로 구성된 술탄의 호위기병대 무테페리카, 포병대와 공병대가 포함돼 있었다. 15세기 초반까지는 그리스도 교 출신의 전쟁포로들이 카피쿨루의 핵심을 이루었지만 1438년부터는 그리스도 교인의 자식들을 강제징집하는 데브시르메 제도가 정착됐다. 데브시르베 제도는 그리스도 교 40가구 중 1명의 아이를 강제 징집시켜 1년에 1000~3000명을 뽑았는데 주로 농촌지역의 그리스도 교 가정에서 8~15세의 아이들이 징집됐으며, 도시지역이나 해안가, 아들이 1명만 있는 가정, 유태인, 광부, 전략적 요충지의 주민 등은 강제 징집대상에서 제외됐다. 14~18세기 동안 술탄들은 지방군을 견제하기 위해서 점차 카피쿨루 군단의 병력을 늘였다. 메멧 2세(1451~1481년) 치하에서는 카피쿨루 군단 내의 예나체리 병력을 1만 2천명 선으로 늘리고(메멧 2세 초기에는 3000명의 카푸쿨루 슈발레이와 6000명의 예나체리가 존재) 술래이만 1세(1520~1566년)은 카피쿨루 군단의 병력을 4만 8천명으로 증가시켰다. 16세기 중반에 이르면 술탄은 광대해진 제국을 통제하기 위해 예나체리를 주요지역에 주둔시켰는데, 지방에 정착한 예나체리들은 술탄에게 충성을 바치는 대신 그 지방의 유지들과 유착하게 되는 폐해를 낳게 된다.


가. 술탄의 엘리트 기병대. 카푸쿨루 수바릴레이(Qapukulu Suvarilei, 궁정기병대)

카푸쿨루 수바릴레이는 술탄의 친위 기병대로 중무장을 한 기병대였다. 카푸쿨루 수바릴레이는 술탄의 보병대인 예나체리 보다 군사적으로 더 중요한 위치를 담당했으며, 예나체리보다 높은 대우를 받았다.

강제 징집된 그리스도 교 아이들 중 재능이 뛰어난 이들은 시동(ic oglani)으로 뽑혀 토프카프 궁전에서 교육을 받게 하고 나머지는 시파히(지방 기병대)의 집으로 보내져 터키어와 이슬람교를 배우면서 예나체리로 키워졌다. 시동으로 뽑힌 아이들은 궁전학교에서 2~7년 동안 백인 환관장(Kapi Agasi)의 관할 하에 엄격한 교육을 받았다. 궁전학교에 들어온 시동은 먼저 이슬람교에 관해 배우고 교수(Hocas) 아래서 일반교육을 받았다. 이들은 재능에 따라서 정치, 종교, 혹은 군사에 대해 교육받았다. 이들은 터키어, 페르시아어, 아랍문학, 마상술, 창술, 궁술, 레슬링, 체육, 음악 등을 배웠다. 궁전학교에서는 시동들을 정직하고 충성스럽고, 예절이 바르며, 자기 자신을 제어할 수 있는 인재로 키웠다. 교육이 끝나면 시험을 쳐 시동들 중 가장 재능이 있는 사람들은 술탄의 궁전에 들어가 관리로써의 길을 걷고 나머지는 카푸쿨루 수바릴레이의 장교나 일반기병이 됐다.

카푸쿨루 수바릴레이는 6개의 연대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가장 먼저 창설된 연대는 좌 용병연대(Ulufeciyan-i yesar), 우 용병연대(Ulifeciyan-i yemin), 좌 외인연대(Guerba-i yemin), 우 외인연대(Guerba-o yesar)로 이 4개의 연대가 궁정기병대의 핵심을 이루었다. 나머지 2개의 연대는 무사연대(silahtar), 와 종자연대(sipahi oglan)로 이들은 카푸쿨루 수바릴레이 내에서도 엘리트로 여겨지는 연대였다. 콘스탄티노플 점령 당시에는 2500명가량의 카푸쿨루 수바릴레이가 있었으나, 16세기 말에는 그 수가 6000명 남짓으로 늘어났다.
각 연대는 ‘케투다 예리’가 지휘했다. 카푸쿨루 수바릴레이에는 전장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운 전 예나체리, 아랍인, 페르시아인, 쿠르드 이슬람교인 이 편입되기도 했다.


나. 예나체리:

술탄의 정예 보병대. 14세기 중반 무라드 1세가 오스만 투르크 최초의 정규보병대인 예나체리를 창설했다. 예나체리가 창설될 무렵에는 1000명 남짓의 예나체리가 있었으나, 점차 그 숫자가 늘어 15세기 중반에는 1만 여명 술래이만 1세(1520~1566년)치하에서는 2만 명의 예나체리가 있었다. 예나체리는 공성부대만이 철갑옷을 걸치고, 대부분은 갑옷을 입지 않았다. 15~16세기의 예나체리는 합성궁을 주 무장으로 애용했으나, 15세기 중반부터 총을 도입하기 시작해서 16세기 말에 이르면 대부분의 예나체리가 머스켓 총으로 무장했다. 예나체리는 거의 모든 무기를 능숙하게 사용할 수 있게 훈련받았으며, 서유럽의 집단사격전술과는 달리 예나체리는 개개인의 사격능력에 의존하는 전술을 썼다. 예나체리는 능숙한 사수로 이름이 높아서 달이 뜬 밤에도 총으로 목표물을 명중시킬 수 있을 정도였다.

강제 징집돼온 그리스도교 아이들 중 시동이 되지 못한 아이들은 외국인아이(Acemi Oglan)로 분류돼 예나체리로 키워졌다. 이들은 맨 처음 시파히의 가정이나, 귀족의 가정, 항구, 궁전주방에서 5~7년간 하인으로 일하면서 이슬람교와 터키어를 배우고, 기본적인 군사훈련을 받았다. 이후 대부분은 훈련대(Acemi Oack)에 입대해 수학교육과 군사훈련을 받았다. 재능이 뛰어난 이들은 예나체리의 엘리트 사단인 보스탄시(Bostanci, 정원사)사단에 바로 입대하거나, 제독부에 입대했다. 혹은 지원부대인 병기부(Ortas Cebeci), 포병대(Topcu), 대포 수송대(Top Arabaci)에 편입되기도 했다. 16세기 말부터 예나체리의 아들이나 이슬람교 자유민 이 예나체리에 지원할 수 있게 되었고, 17세기 중반에는 그리스도교 아이들을 강제징집하는 데브시르메 제도가 붕괴됐다.

예나체리는 3개 사단 196개 연대로 편성돼 있었다. 예나체리의 주요 3개 사단은 세마아트(Cemaat, 집회)사단, 볼루크(boluk, )사단, 세그멘(Segmen, 사냥꾼)사단이었다. 세마아트 사단은 예나체리 사단 중 가장 규모가 큰 사단으로 101개의 연대로 구성되었는데, 술탄의 호위대인 왼손잡이 연대(Solak ortas)와 술탄의 70개의 영지와 이스탄불의 해안방어를 담당하는 엘리트 사단인 정원사 사단(Bostanci)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세마아트 사단의 예나체리는 새로 점령한 지역에 주둔하기도 했다. 볼루크 사단은 예나체리 사단 중 두 번째로 큰 사단으로 61개의 연대로 구성돼 있었다. 볼루크 사단에는 예나체리 사령관의 호위대 및 이스탄불의 성문을 지키는 주둔군이 포함돼 있었다. 세그멘 사단은 34개의 연대로 구성돼 있었다.

예나체리 총사령관(Yeniceri Agas)은 예나체리 출신으로 궁전학교에서 고등교육을 받은 인재 중에 선발됐다. 예나체리 총사령관의 권한은 막강해서 술탄이나 술탄이 임명한 전군 총사령관만이 예나체리 총사령관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었다. 예나체리 총사령관 이외에 예나체리의 사령부에 속한 장군들은: 세마아트 사단 사령관(Kul Kahyast)과 세크멘 사단 사령관(Sekbanbasi), 이스탄불의 주둔군과 예나체리 훈련대를 관할하는 이스탄불 사령관(Istanbul Agasi), 수석 시종장(Ocak Imami), 재무장(Beythulmalci), 징집장(Muhzir Aga), 술탄의 궁전에서 예나체리 총사령관을 대표한 사령관대리(Kahya Yeri), 예나체리의 훈련을 총괄한 훈련대장(Talimhanecibasi), 예나체리의 처벌과 사형을 담당한 감옥소장(Azar Basi), 예나체리의 행정업무를 총괄한 서기관(Yeniceri Katibi) 등이 있었다.

예나체리의 기본부대 단위는 100~3000명으로 구성된 연대(Orta)로 코르바시(Corbaci, 국 만드는 사람)가 연대를 지휘하고, 아스시 우스타(Asci Usta, 주방장)가 부연대장을, 아스시(Asci, 요리사)여러 명이 아스시 우스타를 보조했다. 그 아래로는 하사관을 맡은 전령(Cavus)과 기수(Bayraktar)가 병사들을 지휘했다. 병사들은 경력에 따라서 3등급으로 나뉘었는데 신입병(Eskinci)이 가장 아래계급이고, 전공을 세운 병사는 고참병(Eskinci)으로 승진했다. 병사들 중 가장 높은 계급은 연금병(Oturak)으로 이 계급에 오르면 결혼이 허가되고, 민간인 직업을 병행할 수 있었다. 연금병은 대게 전투에는 참가하지 않았다.


다. 포병대와 지원부대:

오스만 투르크 제국은 14세기 말 대포를 도입해, 메메드 1세와 무라드 2세 치하에서 상당한 규모의 포병대를 보유했다. 1440년에는 오스만 군도 서서히 야전포를 갖추기 시작했다. 오스만의 거대한 공성포는 1422년 콘스탄티노플에서 나타나기 시작해 15세기 중반에는 450kg 의 포탄을 1마일 가량 날릴 수 있는 대포가 등장했다. 15세기 중반의 오스만 군이 보유한 대포는 200~300문 정도였다. 15세기 중반의 공성포는 하루에 10발 정도의 포탄을 발사할 수 있었다. 이 시기의 오스만의 포병대는 서유럽의 검은색 연기가 나는 화약보다 우수한 흰색 연기가 나는 화약을 사용했다. 오스만 군의 포병대는 공격하기 바로 전에 다수의 대포가 차례대로 대포를 쏘고, 대포를 장전할 때는 엄폐물 뒤에 숨어 자신을 보호했다. 그 다음에는 중간 크기의 대포가 적군의 요새를 약화시키고, 마지막으로 거대한 공성포가 적의 요새에 결정타를 가하는 방식으로 포격을 가했다. 오스만의 대포는 나무로 만든 지지대를 높이거나 낮추어서 대포의 사정거리를 조정했다. 17세기에 이르면 오스만 군은 포도탄(일종의 산탄)과 폭죽 등을 대포에 쓰기 시작했다.

오스만 투르크 제국군의 포병은 대부분 중앙군 카피쿨루 군단에 속해 있었다. 콘스탄티노플의 점령 이후 메멧 1세는 카피쿨루 군단의 포병대를 포병연대(topcu ocagi)와 대포의 수송임무를 맡는 수송연대(top arabacilari)로 나누었다. 1575년 카피쿨루 군단의 포병연대의 포수는 1000명 정도였고, 17세기 말에 이르면 포수의 숫자는 5000명 이상으로 늘어난다.

포병대를 보조하는 부대는 구포부대 , 수류탄부대, 땅굴부대, 폭탄부대를 포함하고 있었던 야전공병연대(humbaracilar), 와 공성공병연대(lagimcilar)가 있었다. 이 중 야전공병연대는 구포(곡사포)와 유리나 쇠로 만든 폭탄, 유리나 청동으로 만든 수류탄을 주 무기로 사용했다. 공성공병연대는 군대 내의 노동자들을 통제했고, 공성 시에는 땅굴을 파고 폭약을 성벽이나 성문에 폭약을 설치하거나, 참호를 만드는 등의 임무를 맡았다.

이 밖에 카피쿨루 군단에 속한 지원부대는 병기부대(Cebecis), 물 배급부대(Saka), 장인부대(Karhane)가 있었다. 병기부대는 600여명의 기술자가 무기의 수리, 무기의 보급 등의 임무를 맡았다. 물 배급부대는 카피쿨루 군단의 의무병으로 전투 중 부상당한 병사를 후방으로 옮기거나, 부상자를 돌보는 일을 했다. 장인부대는 34개의 중대로 이루어진 기술자 부대로 검 제작공, 양털 제작자, 초장이, 화살 제작자, 포목상, 편자 제작공, 비단공, 약사, 구리 제작자, 주석 제작공, 빵 만드는 사람, 약사, 신발공 등을 포함하고 있었다.


2.봉건기병 시파히: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봉건기병. 오스만 군에서는 봉건기병 시파히가 군의 주력병력이었다. 15~16세기에는 4만 명 안팎의 시파히가 전쟁에 참가했다. 시파히는 보통 중무장을 했으나, 중앙군의 기병대 카푸쿨루 수바릴레이에 비하면 가벼운 무장을 했다. 시파히는 보통 체인메일에 주요부분을 철판으로 덧댄 메일 플레이트 갑옷, 화살, 창, 방패, 칼 등으로 무장했고, 보조 무기로는 메이스를 애용했다. 서유럽의 기사처럼 영지 티마르(timar)가 내려져 기병으로써의 무장을 갖추게 했으나, 서유럽의 기사와는 달리 시파히에게는 자신의 영지에 제한된 권리만을 행사할 수 있었다. 시파히는 자신의 땅을 직접 경작해야 했고, 자기 영지 주변의 주민들에게 돈을 주고 물건을 사야했으며, 국가에서는 시파히에게 봉급을 주지 않았다.

시파히는 소아시아 혹은 유럽지역에 정착했는데, 시파히가 하사받은 영지는 연간 수입 750에스퍼(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은화)에서 2만 에스퍼 사이의 영지를 가지고 있었다. 시파히는 영지에서 나오는 세금의 일부와 영지에서 나오는 농산물 중 5분의 1~3분의 1 정도를 받았다. 영지의 규모에 따라 각 시파히는 일정한 숫자의 기병을 데리고 참전해야 했는데 연간수입 1500~3000에스퍼(소아시아 지역) 혹은 6000 에스퍼 (유럽지방)이상의 영지를 가지고 있는 시파히는 잘 무장한 기병인 종자와 경무장을 한 노예기병 한 명씩을 거느리고 참전할 의무가 있었다. 부유한 영지를 가진 시파히는 15명의 기병을 이끌고 참전했고, 최대 50명의 기병을 이끌고 참전하는 시파히도 있었다.

전쟁에 참가하는 시파히는 1000명의 기병을 지휘하는 점호장(alay bey)밑에 편입됐다. 점호장은 시파히 중 가장 높은 계급으로 각 속주의 기병을 소집하는 임무를 맡았다. 점호장 밑에는 기수(beyrak-dar)와 수위장(cavus) 점호장을 보좌했다. 한 속주에서는 보통 1000~3000명의 시파히를 소집할 수 있었는데 각 속주의 총독(sancak bey)은 휘하에 1~3명의 점호장을 거느리고 있었다. 총독은 20명 이상의 시파히로 구성된 친위대를 데리고 다녔으며, 속주의 행정업무와 군사를 총괄했다. 이와 더불어 총독은 각 주요도시에 경찰총장(subashis)을 임명했다. 경찰총장은 전시에는 100~수백명의 병력을 지휘했다. 100명을 지휘하는 사람은 중대장(ceri-bashi)로 주로 부유한 영지를 가진 시파히가 중대장을 맡았다. 중대장 아래로는 10명을 지휘하는 십장(ceri-surucus)이 있었다. 전쟁이 일어나면 시파히 10명 중 1명이 후방에 남아 세금징수를 하고 영지의 방어를 맡았다.


3. 속국: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속국들은 오스만 군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다. 특히 오스만 제국의 초기인 14~15세기에는 오스만 군중 속국의 병사가 차지하는 비율이 높았다. 오스만 제국 의 속국 대부분은 주요도시가 오스만 제국에게 점령당한 다음에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종주권을 인정했다.

속국 귀족의 자제들이나 터키 귀족의 자제들은 술탄의 호위 기병대인 무테페리카(Muteferrika)에 소속돼 오스만 제국식의 교육을 받으면서 인질의 역할을 했다. 발칸 반도의 여러 기독교 속국들은 그리스도 교 5~10가구에 1명의 기독교 중장보병 보이누크(voynuk)를 제공했다. 속국의 중장기병은 기독교 군주가 자신의 직할부대를 제공하거나, 오스만 제국에서 면세를 받거나 영지를 하사받은 이들이 중장기병으로 참전했다. 기독교 속국에서는 최대 5만 명의 병력차출이 가능했다.

크림 칸국의 타타르 족은 궁기병을 오스만 제국에 제공했다. 대부분의 타타르 부족민은 가난했기 때문에 대게 보병으로 참전했다. 타타르 족의 칸은 칸의 직할지에서 뽑은 20개 중대의 말탄 총병을 보유하고 있었다. 칸의 직할부대 이외에 타타르 족 귀족들의 병력이 타타르 군의 다수를 차지했다. 코사크 인은 4개의 바퀴가 달린 무거운 마차를 연결해 요새를 만들고 그 위에 가벼운 대포와 총병을 배치하는 야전요새를 애용했다. 코사크 인은 전투용 카누를 이용해서 우크라이나 의 강을 지배했다. 동부 소아시아의 쿠르드 족은 1514년 오스만 제국의 속국으로 편입돼 기병을 제공했다.

중동의 속국들은 대부분 자국의 방위목적 이외에는 오스만 제국에 병력을 파견하지 않았다. 대부분 중동의 속국들은 반독립 상태를 유지해 소수의 예나체리를 제외하고는 오스만 제국군이 주둔하지 않았다.

속국은 또한 무기를 만드는 자원을 제공했다. 세르비아에서는 대포를 제작해 오스만 제국에 상납하고, 몰도비아, 트란실바니아, 왈라키아에서는 머스켓 총을 만드는 나무, 짐말, 주석, 초석, 밧줄등을 오스만 제국군에 상납했고, 쿠르드 족, 이라크, 레바논에서는 심지, 유황, 초석 등을 오스만 제국군에 상납했다.


4.비정규군:

오스만 군의 비정규군은 크게 보병 지원병인 아자브(azab, 젊은 남자), 적군 영토를 약탈하는 목적으로 쓰인 경기병 아킨지스(akinjis, 약탈자), 각 지방의 방위를 책임지는 각종 경비대 등으로 나뉘었다.

아자브는 전쟁기간 동안 보병으로 지원한 병사들로, 전쟁이 끝나면 언제든지 군대를 떠날 수 있었다. 오스만 제국에서는 최대 4만 명의 아자브를 동원할 수 있었다. 아자브는 주로 활로 무장을 했고, 칼을 갖고 있거나 막대기로 무장한 아자브도 있었다. 아자브는 아군이 전투 진형을 짜기까지 화살로 적군을 묶어두는 임무를 맡았다. 원래 아자브는 전쟁중에만 봉급을 받았으나, 14세기말에는 항상 봉급을 받으면서 요새에 주둔하는 아자브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16세기부터는 국경지방의 속주에 사는 모든 이슬람교인이 주둔군 아자브나 해군 아자브로 징집될 수 있었다. 베야지드 2세 치하에서 국경지방의 20~30가구의 주민들이 한 명의 아자브를 지원하는 제도가 정착됐다.

아킨지스는 원래 투르크 족의 전사 출신으로 이루어졌던 궁기병 부대로 1362년부터 국경지방의 주요 전략 요충지에 배치돼 적국의 영토를 약탈하는 임무를 맡았다. 전쟁 중에 아킨지스는 본대보다 먼저 적군의 영토에 진출해 적국 영토의 약탈, 적군의 통신망 교란, 정찰, 주요도로 확보 의 임무를 맡았다. 평상시에는 적국의 약탈로부터 국경지방을 방위했다. 아킨지스는 점령이 어려운 산악지대에 투입되거나, 점령이 어려울 경우, 반란군이나 적군을 상대로 게릴라전을 벌였다. 아킨지스는 투르크의 족장들이 지휘했고, 아킨지스는 족장에게 봉급을 받거나, 약탈로 생계를 이어갔다. 오스만 제국은 최대 3만 명가량의 아킨지스를 동원할 수 있었다. 아킨지스는 10단위로 구성돼 있었고(10명, 100명, 1000명),보통 2마리의 말을 끌고 다녔다. 아킨지스는 창과 활, 세이버로 무장했다.

오스만 제국에는 아자브와 아킨지스 외에 각 지역을 방위하는 비정규군이 존재했다. 고눌루얀(gonulluyan, 지원병)은 각 지방에서 주요도로의 순찰과 요새의 방위를 맡은 지원병으로 기병과 보병을 소유하고 있었다. 마르톨로(martolo)는 발칸 반도에서 세금을 면제받으면서 지방군으로 주둔한 부대였다. 고눌루얀과 마르톨로는 대게 소규모로 수백명 이하의 병사들이 지방의 경비 군으로 활약했다. 마르콜로와 고눌루얀 중 일부분은 갑옷을 착용했으며, 창, 칼, 방패, 총 등의 무기로 무장했다.


5. 해군:

오스만의 해군은 동지중해의 사라센과 비잔틴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수백 년간 오스만은 이탈리아 및 서지중해 국가들과 비슷한 형태의 해군을 보유하고 있었다. 오스만 해군의 주요임무는 육군을 수송하고 가능하면 해안포격으로 육군을 지원하는 것이었다. 또한 오스만 해군은 제국의 방대한 해안선을 방어하고, 기독교 해적의 안식처였던 지중해 여러 섬을 장악했다.

오스만 투르크 제국은 14세기 초반 카라시 공국과 다르나넬 공국을 점령하면서 비잔틴 제국 출신의 선원과 투르크 전사들로 이루어진 소규모의 해군을 창설했다. 15세기 중반부터 오스만 제국은 동지중해에서 베네치아에 맞설 수 있는 강력한 해군을 건설했다. 1470년 오스만 해군은 92척의 겔리 선을 보유해 흑해의 제해권을 장악했다. 15세기 말에 이르면 오스만 해군에 소속된 배는 500척에 육박했다. 1499~1502년 베네치아와의 전쟁에서 오스만 제국은 60척의 3단 겔리 선, 30척의 푸스타에 선, 3척의 대형 겔리선, 2척의 대형 카락선, 18척의 소형범선, 보급선 127척에 총 선원 수 3만 7천명을 동원했다. 오스만이 베네치아와의 전쟁에 참가시킨 2척의 대형 카락은 1080톤에, 2층 갑판, 탑승인원 1000명의 대형선이었다.

오스만은 1421~1430년 경 해전에 대포를 도입해 15세기 베네치아 인들은 오스만 제국의 배들이 그들의 배보다 더 낳은 대포로 무장하고 있다고 기록했다. 15세기 오스만 제국의 겔리 선은 대형포로 무장하고 소형 노선인 푸스타에 선은 다수의 소형포를 장착했다. 오스만 해군은 화약무기를 도입해 상대적으로 적은 수의 함선으로 홍해와 아라비아 만, 인도양의 재해 권을 장악하고, 포루투갈와 에디오피아의 해군을 견제할 수 있었다. 1511년 오스만 제국은 홍해함대를 현대화했고, 1525년에는 수에즈에 1530년에는 아라비아 만의 바르사에 해군기지와 조선소를 건설했다. 이어 알제리와 튀니스를 합병해 오스만의 해군은 서유럽을 위협했다. 17세기에 이르면 오스만의 지중해 함대는 북 아프리카 함대, 이집트 함대, 에개해 함대가 포함돼 있었다.

오스만의 해군은 오스만의 해양 속주에서 지원했다. 겔리 선의 선원들은 그리스, 알바니아, 북아프리카, 달마티아, 터키 해안가에서 징병됐다. 겔리 선의 노 젓는 사람들은 전쟁포로나 범죄자가 주를 이루었다. 이외에도 범선을 전문으로 하는 선원들은 칼욘실러(kalyonciler, 갈레온 선원)라고 불렸다. 15세기의 오스만 해군은 선박 수에서 서유럽을 압도했고, 강력한 함선과 대포를 보유하고 있었으나, 선원의 질이 서유럽보다 떨어졌다.

오스만 제국은 강에서 활약하는 함대도 보유하고 있었는데 이 중 다뉴브 함대는 60~200척의 소형선을 보유하고 다뷰브 강에서 병력수송, 대포운반, 육군의 지원 등의 임무를 맡았다. 모라바 함대는 80~100척의 겔리선, 겔리엇, 보트로 기병과 보병을 수송했다. 300명의 상비군이 항상 모라바 함대를 지키는 임무를 맡았다.


6. 전략, 전술:

오스만 제국은 많은 정복전쟁을 치루면서 점차 계획적이고, 유연한 전략을 수립해갔다. 전쟁은 그 전 해의 10월~11월에 계획을 시작해서 다음 해 8~9월에 전쟁을 시작했다. 군 사령부는 이전 전투의 기록과 옛 군인들의 목격담을 조사하고, 막대한 양의 보급품을 준비했다. 지방군의 동원령은 12월에 내려져 동원령을 받은 지방군은 이스탄불, 베오그라드, 코르틴 등의 도시에 집결했다.

전쟁이 시작되면 술탄의 깃발이나 재상의 깃발이 토프카피 궁전에 세워졌다. 진군로에 있는 도로와 다리는 수리되고 다리가 없는 강에는 다수의 거룻배를 띄워 다리를 대신했다. 오스만 군은 해질 때 행군을 시작해 정오에 야영지를 세웠다. 행군 중에는 먼저 경기병대가 정찰을 하고 중무장한 엘리트 기병대가 그 뒤를 따랐다. 기병대의 뒤로 보병대와 기술자 부대가 따르고 부대의 측면과 후위는 기병대가 보호했다.

오스만 군은 보병이 중앙을 방어하는 동안 기병이 적군의 측면이나 후방을 강습해 섬멸하는 방어적인 전술을 애용했다. 16세기 초 오스만 군은 경기병대가 적군을 아군의 보병대 앞으로 유인해 오면 아자프와 예나체리, 포병대가 적군을 사격하고 기병대가 적군의 측면을 돌파하는 전술을 썼다. 예나체리의 전술은 일단 적군을 사격하고 쐐기꼴의 진형을 이루어 적군에게 돌격하는 방식을 썼는데, 당시 예나체리의 돌격은 무적으로 알려졌다.

오스만 군은 전투마차를 야전요새로 애용했는데, 각 마차는 2마리의 노새가 끌고 각 마차에는 총병과 작은 대포가 배치됐다. 마차의 밑에는 탄약상자를 넣고 필요하면 마차 여러 대를 체인으로 연결해 야전요새를 만들 수 있었다.

오스만 군이 공성전을 치룰 때는 궁병과 총병이 성을 향해 사격을 가해 적군이 성 뒤에 숨게 함과 동시에 사다리 부대가 성벽으로 접근했다. 장기간의 공성전을 치룰 때는 깊은 참호를 파 계속 성벽 쪽으로 서서히 전진하고 30~100명의 지원자로 이루어진 각 공성부대가 제한된 임무(가령, 성문 밑에 폭약을 설치한다던가)를 수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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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랍지역 베두윈(유목민)의 생활과 문화

 

우리가 중동하면 떠올리는 친근한 풍경은 양이나 염소를 몰며 사막을 오가는 유목민 무리의 모습이다. 현대에 들어와 그 비율이 감소하고는 있지만 유목은 전통적으로 중동 지역의 대표적인 삶의 방식이며 이 지역 문화의 모태였다. 건조한 사막 기후라는 자연 환경의 여건상 중동인들은 옛부터 유목을 생업의 하나로 삼아 왔으며 이에 따라 오늘날 그들, 특히 아랍인들의 사고와 삶의 방식은 유목 문화에 뿌리를 두고 있다. 중동인들의 삶과 문화에 대한 관찰은 국제정치·경제 등 각 방면에서 우리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이 지역 주민들의 의식구조를 보다 정확하게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수세기 동안 중동 사회는 세가지 유형의 공동체 즉 베두윈, 정착 농경민, 도시 주민으로 구분되어 왔다. 현재 이곳 주민의 50%가 농업에 종사하고, 45% 이상이 도시거주자이며 5% 미만이 유목민이다. 이들 세 부류의 생활방식에서 특히 베두윈이 도시 문명의 영향에 동화되지 않은 채 자체의 전통적인 생활형태를 지속해 왔음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그러나 유목민들 중에는 매년 농업 종사자로 정착하거나 도시 직업을 구하는 자들이 증가하고 있다. 유목민들이 정착민으로 변화하는 과정에는 강력하게 중앙집권화된 정부의 성장과 서구 기술의 영향이 크다.

 

끊임없이 이동하는 필연적인 삶의 방식에 따라 베두윈의 물질 문화는 빈약하다. 이들의 주요 재산은 자신이 기르는 동물과 거처인 천막에 불과하다. 천막 기둥의 수가 보여주는 천막의 크기는 그 소유자의 부와 사회적 지위의 표시가 된다. 그들은 빈번한 이동으로 인해 적은 양의 생활 필수품만을 갖고 다닌다. 의복 또한 거친 재료로 된 긴 겉옷이 주 복장이며 겨울에는 낙타털로 짠 천으로 만들어진 외투가 고작이다. 양이나 염소, 낙타, 말을 기르고 그 부산물인 우유, 버터, 치즈 및 양모를 팔아 생계를 해결한다. 특히 낙타는 젖과 고기, 의복과 천막 재료를 제공하고 운송 수단으로 매우 중요하다.

 

중동에서 석유가 발견되고 수자원이 개발되기 이전에 사막은 유목민에게 근근히 생계를 제공해 주었다. 이러한 환경에서는 부족만이 있었으며 보다 큰 규모의 정치 구조는 존립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대규모 사회는 행정·군사 및 비생산적인 부문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잉여 식량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부족이 감당하는 주요 임무는 구성원 개개인을 타집단으로부터 보호하는 것이었다. 부족은 혈족 간의 단결을 강조하고 집단 유대와 상호 책임을 최상의 가치로 내세움으로써 유지되었다. 이러한 소규모 사회에서는 집단 의식이 우선시되며 개인은 집단의 도덕률을 준수하며 살아야 하는 부담을 져야 했다. 개인은 집단의 규율을 따르며 자신의 이익을 집단의 이익과 일치시킴으로써 집단이 개별 성원에게 제공하는 지원에 보답해야 했다. 따라서 유목 집단에서는 중앙정부에 대한 충성보다는 소속 부족에 대한 충성이 더욱 중요시 된다. 부족민은 자신들만의 법을 가지고 있으며 중앙정부의 정책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기도 한다. 그들은 세금 납부나 의회법률의 인정, 군복무, 국경 준수를 거부하기도 한다.

 

오늘날 아랍세계에서 시골과 도시의 많은 주민들은 자신들의 근본이 베두윈이라고 주장한다. 무엇보다 주목을 끄는 점은 많은 정착민들이 베두윈 기풍을 행동양식의 이상적인 귀감으로 삼고 있다는 점이다. 사실상 서구화에 탐닉한 일부 아랍인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아랍인들은 베두윈을 과거의 영광된 아랍 영웅시대의 계승자이며 살아있는 증인으로 우러러 보고 있다. 다마스커스를 비롯한 도시의 명문가에서는 자식을 한두해 동안 사막 유목민에게 보내 예절과 가치관을 배우도록 하는 것이 관례로 되어 있다.

 

아랍 베두윈이 전통적으로 중시하는 대표적인 도덕적 가치는 환대에서 나타나는 관대함이다. 손님에 대한 환대는 가난한 베두윈들도 행하는 숭고한 덕목으로 오늘날에도 아랍 도시인들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인상적인 관습이다. 극진한 환대를 베푼 자는 이를 통해 자신의 위신을 높인다는 것 외에 잠재적인 고객과, 부족 분쟁시의 정치적 협력자를 확보하게 된다. 결국 환대는 궁극적으로 베두윈 최상의 목표인 집단 강화를 위해 활용된다. 환대의 관습은 사막이라는 절박한 환경에서 생겨났다. 사막에서 집단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개인은 그 생명을 보전할 수가 없다. 사막이 그를 죽이든지 그와 마주치는 사람들 무리가 그를 죽일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길잃은 개인을 맞아주고 보호하는 것은 서로의 생존을 위해 당연한 일이 되었다. 환대의 규율에 따라 도망자도 손님이 되며 주인은 자신을 희생하더라도 그를 지켜주어야 한다. 이러한 환대의 관습은 오늘날 촌락과 도시 생활에서도 변형된 형태로 유지되고 있다. 즉 결혼, 장례, 할례, 건물 완공, 라마단(이슬람교 금식의 달) 기간 등의 행사를 맞이해 주인은 주민들, 특히 가난한 자들에게 음식을 제공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타인에게 물질을 베푸는 관대함의 관습은 전통적인 아랍사회에서 빈부 격차가 존재하며 부의 재분배가 제대로 실현되지 않고 있음을 반증한다고 볼 수 있다.

 

현대 아랍인들에게 남아있는 베두윈 문화의 잔재 중 대표적인 것은 그들의 육체노동에 대한 멸시에 가까운 기피의 태도이다. 오늘날까지 아랍 유목민들과 일반인들 중에는 농사나 기능직에 종사하는 것을 불명예스런 일로 생각하는 자들이 많이 있다. 편안한 생활을 선호하며 근육을 사용하지 않는 일을 좋아하는 아랍인들의 성향은 아랍문화의 서구화 과정에 있어 부정적인 영향을 주고 있다. 이집트 사회에서 육체노동의 낮은 위치는 계급 의식을 조장하고 협동과 대화, 발전의 기회를 가로막고 있다는 전문가의 지적이 제기된 바도 있다. ‘인간은 이마의 땀을 흘리고서야 빵을 먹을 것’이라는, 성경 창세기에 반영된 중동 지역의 신화는 아랍 베두윈들의 노동관을 보여준다. 곧 그들에게 있어 노동은 신이 인간에 내린 징벌과 저주의 결과이다. 고대부터 현대까지 이르는 기간 중 중동지역의 행위 규범에서 이상적인 것은 가능한 한 육체노동을 피하고, 요행이나 상업 활동에 의해 부를 얻는 것이었다. 중세 아랍의 생활과 가치관, 신앙 등을 반영한 아랍의 고전 『천일야화』에는 힘든 노동으로 살아가는 것은 인간에게 닥치는 최악의 운명임을 암시하는 내용들이 산재해 있다.

 

일부 학자들은 베두윈의 자유로운 삶과 용맹, 남성다움, 명예를 중시하는 그들의 가치관을 강조하며 그들의 생활을 낭만적으로 기술하기도 한다. 아랍 베두윈의 사회적 관습은 이슬람의 선지자 무함마드와 그의 추종자들이 지켰던 관습과 매우 유사하고 베두윈의 언어는 가장 순수한 아랍어라는 점이 부각되기도 한다. 현대화의 물결 속에서 베두윈 사회가 위축되고 그 낭만적인 모습도 점차 사라져 가겠지만 베두윈 문화는 과거에도 그러했듯이 앞으로도 순수와 이상의 상징으로서 이 지역 주민들의 삶 속에서 계속 중요한 위치를 차지할 것이다.

 

(김능우·한국외대 아랍어과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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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세기경 아라비아반도는 비잔티움제국과 사산조 페르시아와의 세력다툼으로 전란에 휩싸여 있었습니다. 파르티아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로마와 파르티아, 파르티아를 무너뜨리고 그들을 대신한 사산조 페르시아는 전쟁상태에 있었는데 이들 세력들 사이에서 아라비아 사막지대에 거주하던 아랍부족들은 양측간 중개무역을 통해 막대한 자본을 축적했습니다. 당시 아라비아반도는 로마인들이나 페르시아인들로부터 별볼일 없는 땅으로 여겨졌습니다. 이곳에는 로마인들의 눈으로 보기에 여전히 미개한 풍습들이 남아있었으며, 가증스러운 수백개의 우상을 세워놓고 숭배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메카는 많은 오아시스 도시들 가운데서 가장 큰 번영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서 570년경에 예언자 무함마드(محمد = 마호메트)가 태어납니다. 그는 어린시절에 고아가되어 상인이었던 삼촌의 손으로 자라게 되는데, 이후 삼촌의 직업을 물려받아 상인이 된 그는 26세때 가게주인인 15세 연상의 카디자와 결혼해서 가족을 이룹니다. 그러다 40세 무렵 그는 영적인 명상을 위해 메카 외곽의 히라 동굴에 들어갑니다. 그러던 어느날 그는 번쩍거리는 광채와 함께 천사 가브리엘을 만나, 그로부터 신의 계시를 받습니다. 집으로 돌아온 그는 완전 딴사람이 되어 메카의 시민들에게 예언을 선포합니다. 하지만 이미 돈맛을 볼때로 본 메카 귀족들은 무함마드와 추종자들을 박해하기 시작했으며, 박해에 이기다못한 그들은 622년, 메카를 떠나 메디나로 피신합니다. 이를 히지라 (هجرة) 라고 부르며 이슬람력의 기원 원년으로 삼습니다. 무함마드는 스스로를 하느님(아랍어: 알라)이 보낸 최후의 예언자라고 주장했는데, 실제로 그의 사상이나 이슬람 경전 꾸란(القرآن)은 근본적으로 그리스도교나 유대교의 유일신 사상과 일치합니다.

 

꾸란의 첫장인 개경장(Al-Fatiha - الفاتحة). 개경장에는 이슬람신앙의 핵심이 들어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자비롭고 자애로우신 하느님의 이름으로 / 온 우주의 주인이신 하느님께 찬미를 드리나이다. / 그 분은 자비롭고 자애로우신 분이며 / 심판의 날을 주관하시도다 / 우리는 당신만을 경배하며 당신께만 구원을 청하노니 / 저희를 올바른 길로 인도하여 주소서. / 그 길은 당신께서 축복하신 길이며, 노여움을 받은 자나 방황하는 자가 걷지 않은 길이나이다. / 
 

메디나에서 무함마드는 포교활동과 부족간의 분쟁조절, 그리스도교국인 에티오피아왕의 보호를 통해 세력을 이룹니다. 그는 메디나의 대표자가 되었으며 이윽고 메카와의 전투를 시작합니다. 624년 5월 17일, 메디나군과 메카군은 바드르에서 전투를 벌입니다. (غزوة بدر) 이 전투에서 메카군은 무함마드 군의 일방적인 돌격에 큰 피해를 입어 전승에 의하면 '70명이 전사하고, 70명이 사로잡히는 큰 피해'를 입었다고 전합니다. - 이슬람학자들은 이는 메카 총전력의 15~16%정도로 추측합니다 - 바드르전투는 꾸란에도 다음과 같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하느님은 그대가 한심하리만큼 적은 병력을 갖고 있었을때 그대를 바드르에서 도왔다. 그 분은 그대가 감사해하는 것을 보고 그대가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모습을 보았다. 그대가 믿음에 대해 말하였던것을 기억하라. "하느님께서 3000명의 천사를 보내어 그대들을 도와줘도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하는가? 그렇다. 그대가 굳건하게 믿음을 갖고, 올바르게 행한다면 적이 그대를 향해 빠른속도로 밀려 올지라도, 그대의 주님은 무시무시한 5000명의 천사를 보내어 그대를 도울것이다." - 이므란(가족장) 3:123~125

 

무함마드 시대 아랍인들은 동시대 비잔티움인이나 페르시아인에 비해 지극히 가벼운 무장을 하고 있었습니다. 위 그림은 무함마드시대 무슬림 전사들의 모습을 고증한 그림으로, 왼쪽부터 지휘관, 복합궁을 들고 있는 아랍인 궁사, 무슬림에게 우호적인 베두인 족장의 모습입니다. 이슬람하면 떠오르는 언월도는 아직 없었고, 체인메일을 착용한 경우가 일부 보이지만 돈이 많거나 사회적인 지위가 높은 전사들만 국한되었습니다. 흥미있는 점은 그림 뒤의 낙타안장에 가죽으로 된 등자가 달려있다는 점입니다. 당시 아랍인들에게 등자가 알려졌는지는 알 수 없으나 썩어서 남아있지 않는 가죽등자는 사용했을 법 합니다. 메카와 메디나 사이의 분쟁은 시간이 흐를수록 뛰어난 전략전술을 구사하는 동시에 많은 부족들과 연합한 무함마드에게 유리하게 돌아갔고 결국 630년 무함마드의 군대는 메카를 정복하고, 까바 신전에 모셔져 있던 수백개의 우상을 모조리 때려부수고 난 다음, "하느님 외의 신은 없다!" 를 선언합니다. 이 선언은 세계사의 구도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으며, 새로운 문화권의 탄생을 선언하는 메시지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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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2년, 예언자 무함마드는 메카를 정복하고 얼마 되지 않은 후계자를 남기지 못하고 사망합니다. 이때 무슬림공동체는 아라비아반도 전체에 확대되어 있었지만 구심점을 잃은 무슬림공동체는 곧 분열될 기미를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이때 무함마드의 장인이자 가장 가까운 친구인 아부 바크르(573 ~ 634.8.23 - ابو بكر الصديق)는 무슬림들에게 다음과 같은 연설을 합니다. "무함마드만이 사도는 아니며. 많은 사도들이 그 이전에 존재했다. 만일 그가 사망하거나 살해당했다면, 그대들은 발길을 돌려버릴 것인가? 누구든 그의 발꿈치를 돌린다 한들 하느님께 해를 끼치지는 못하리라. 그러나 감사해하는 이에게는 그분께서 즉시 상을 내려 보상하시리라." - 이므람 3:144

 

17세기에 필사된 화려한 장식을 한 <코란>의 모습. 코란은 아부 바크르의 시대에 최초로 수집되기 시작해서 우스만 시대에 완성되었는데, 이시기의 코란 필사본과 오늘날의 것을 비교해 봤을때 전혀 차이가 없다고 한다.

 

이후 이슬람공동체는 그를 '공동체의 봉사자'(خليفة 할리파=칼리프)로 선출하고, 그를 중심으로 다시 단결하기 시작합니다. 아부 바크르 사후 이슬람공동체는 오마르, 우스만, 알리까지 3명의 할리파를 선출하게 되는데, 이 시대를 일컫어 '정통칼리프 시대'(632~661 - الخلفاء الراشدون)라고 부릅니다. 당시 중동의 구도를 비유하면, 두마리의 사자와 호랑이가 - 비잔티움제국과 사산조 페르시아 - 피터지게 싸우다가 둘다 치명적인 상처를 입고 쓰러져 있는데 갑자기 웬 하이애나가 - 이슬람제국 - 나타나 기지개 켜고 일어나는 형국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하이애나는 사자와 호랑이를 모두 건드려 손쉽게 승리를 거둡니다. 위의 그림은 정통 칼리프시대의 이슬람군대의 모습으로, 1번 인물은 '후원자,지지자'라는 의미의 안사르 전사(الأنصار)이고, 2번 인물은 무슬림군대와 싸우던 페르시아 기마궁사의 모습인데, 그의 말에는 목재 등자가 달려있습니다. 오늘날 남아있는 유물은 없지만, 등자를 사용했을 가능성은 있어보입니다. 3번 인물은 북아프리카의 유목민족인 베르베르족 전사로 갑옷은 입지 않고 있으며 창과 투석기로 무장하고 있습니다.

 

9세기경 필사본에 등장하는 비잔티움군대와 이슬람군대의 모습

 

아부 바크르가 이끄는 이슬람군대는 동시대 비잔티움군이나 페르시아군과 비교해 보았을때, 지극히 빈약한 무장을 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슬람군대는 거의 대부분이 말과 낙타를 탐으로써 그들의 적이 가지고 있지 않은 뛰어난 기동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또한 비잔티움군이나 페르시아군이나 사막지형에는 익숙하지 않았고, 또한 양측군대가 대부분 전방에 배치되어 있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남쪽의 방어는 취약한 상태였습니다. 아부 바크르의 군대는 이라크 남부를 통해 먼저 사산조 페르시아를 공격하고, 634년 유능한 족장 칼리드 이븐 알 왈리드(592~642 - خالد بن الوليد)의 군대가 비잔티움,페르시아 연합군을 피라즈에서 대파함에 따라 이라크 정복을 완료합니다. - 오마르의 통치시기인 651년에는 페르시아 제국 전체를 병합하기에 이릅니다. - 이윽고 말머리를 비잔티움제국으로 돌려 634년 9월에는 시리아의 수도 다마스쿠스를 함락시키고, 637년 10월에는 알레포 전투에서의 승리를 통해 시리아 전체를 정복한 뒤, 이어서 654년에는 이집트와 북아프리카, 시칠리아까지 진출하기에 이릅니다.

 

이슬람제국의 무한확장 - 자주색 영역은 무함마드 시대의 영역, 짙은 핑크색 영역은 정통 칼리프시대에 확대된 영토이며 상아색으로 칠해진 영역은 우마이야 왕조시대에 확대된 영역을 나타낸다.

 

세례자 요한의 유골이 안치되어있고, 로마 교황으로써는 최초로 2001년 이슬람사원을 방문한것으로 유명한 시리아 우마이야 모스크의 모습. 715년에 현재 모습으로 완성되었지만 이곳은 그 이전부터 그리스도교도와 무슬림이 함께 공유하던 장소였다.

 

이집트를 정복한 무슬림들이 세운 군사도시 알 푸스타트(الفسطاط)의 유적. 이 도시는 한때 20만명이 거주했던 이집트의 수도였으나 1168년, 십자군의 침공을 우려한 파티마왕조의 재상 샤와르(شاور بن مجير السعدي)에 의해 파괴되었다.

 

이슬람공동체가 그토록 빠른시기에 중동전역에 확대될 수 있었던 것은 비잔티움과 페르시아가 긴 소모전으로 국력을 소모한 탓도 있지만, 비잔티움제국의 경우 이집트와 시리아 일대에 퍼져있던 아리우스파와 콥트교등 단성론파를 이단으로 여기며 탄압한 탓도 있었습니다. 단성론파 그리스도교는 로마 가톨릭교회가 인정하는 삼위일체론과 예수의 신성성을 부정하는 교리를 가지고 있는데, 이는 비잔티움황제가 예수의 대리인임을 주장하는 이데올로기와 정면으로 배치되었기 때문에 탄압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슬람교의 유일신 사상은 이들 단성론파가 주장하는 바와도 상통하는 바가 있었으며, 또한 무슬림들은 세금만 꼬박꼬박 내는 한 어떤 종교도 믿을 수 있도록 허락해 주었으므로 오히려 그들의 정복을 환영하고 협력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초기의 민주주의적인 성격을 띄었던 이슬람공통체는 661년, 무와이야(602~680 - معاوية بن أبي سفيان) 가 쿠데타를 일으켜 마지막 정통칼리프 알리를 암살하고 우마이야 왕조를 개창함으로써 비잔티움제국과 같은 신성제국의 길을 걷기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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