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사순절 절기예배 설교

 

 

 

 

 

제목 : 십자가의 도

말씀 : 고전1:18-25

1.가장 큰 능력인 십자가

여러분, 세상에서 가장 큰 능력이 무엇이겠습니까? 세상에서 가장 큰 지혜와 지식은 또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이 그것은 생명을 살리는 것입니다. 생명을 풍성하게 하는 것입니다. 생명을 살리고 더 풍요롭게 하는 것, 그것이 가장 큰 능력이요, 지혜요, 지식입니다.

여러분, 안 그래요? 제 아무리 큰 능력이라도 생명을 살리지 못한다면 그게 무슨 대단한 능력이겠습니까? 제 아무리 고상한 학문이라도 생명을 살리고 생명을 풍요롭게 하지 못한다면 그게 무슨 대단한 학문이겠습니까? 온 천하를 다 얻는다해도 생명을 얻지 못한다면 그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억만금이 있어도, 지상 최고의 권세를 얻어도 생명을 잃으면 무슨 유익이 있겠느냐는 말씀입니다. 그렇잖아요? 결국 돈도 지식도 권세도 과학도 문화도 스포츠도 예술도 다 생명의 풍성함을 위해서인데 진정한 의미에서의 생명의 살리지도 못하고 풍성함도 주지 못한다면 그게 무슨 그렇게 큰 의미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진전한 의미의 지식과 능력과 은혜는 생명을 살리고 풍요롭게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생명을 살리는 지혜와 능력이 어디 있습니까? 생명을 풍요롭게하는 지식이 어디에 있습니까? 두말할 필요도 없이 하나님께 있습니다. 예수님께 있습니다. 우주만물의 창조주, 우주 만물의 주권자이신 하나님께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님, 그러나 죄와 사망과 마귀와 지옥과 모든 어둠의 권세를 깨트리시고 부활하신 예수님만이 생명을 살리고 풍성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안 그래요? 누가 살리겠어요? 누가 죄의 문제를 해결하겠어요? 아무도 그 아무것도 못합니다. 정치도 못하고, 스포츠도 못하고, 예술도 달나라 별나라 가는 과학도 못합니다. 오직 생명의 주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만이 하시는 것입니다.

요10:10절 보세요.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또 요14:6절에서는 말씀하십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여러분, 이 사실을 알고 믿은 이 세상에서 가장 똑똑하고 가장 지혜롭고 가장 큰 복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이걸 모르면 제아무리 똑똑하고 잘나도 세상에서 가장 미련하고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세상 모르는 거 하나도 없다해도 생명의 도를 모르면 헛 똑똑이요, 헛 지식인이요, 헛 박사인 것입니다.

여러분, 한번 따라 합시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똑똑한 사람이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큰 능력을 받은 사람이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지혜로운 사람이다.’ 왜요? 그렇지 않은 것 같아요? 왜 표정들이 별로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까? 아닙니다. 사실입니다. 생명을 영원히 살리고 생명을 영원히 풍성하게 하는 지식과 믿음을 가진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지혜로운 사람, 가장 똑똑한 사람, 가장 능력있는 사람입니다. 모든 죄와 무지와 어둠과 사망과 지옥과 마귀의 권세를 이긴 사람들입니다.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소유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똑똑하고 능력있고 지혜로운 사람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러므로 감사하며 사세요. 이 시대 최고의 지혜로운 사람으로써 거기에 걸맞는 자부심과 삶의 양식도 가지고 사세요. 최고의 지식인이요, 최고의 지혜자로써 거기에 걸맞게 그 가장 고상한 지식을 바탕으로 거룩함과 의와 진리로 주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진정 주님의 자녀로써 주님께 영광을 돌리고 주님의 은총과 능력과 생명의 기쁨을 풍성히 누리며 살아가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왜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고,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최고의 능력이며 지혜이며 지식입니까? 여기에 대해 좀더 자세히 살펴볼 때에 주님의 생명의 능력이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2.주님의 십자가만이 인간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 주님께 대한 지식이 최고의 지혜이며 능력인 첫 번째 이유는 그 지식안에서 우리는 주님의 십자가를 통해 죄사함의 은총을 받게 되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의 죽음을 통하여 우리의 죄를 대속하셨고, 그 주님의 대속함이 없이는 그 어느 누구도 죄에서 자유로울 수 없고, 죄에서 자유롭지 못하면 천국의 은총을 누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십자가는 사람들이 만든 형벌 가운데 가장 참혹하고 끔찍하고 처절한 것입니다. 십자가 사형언도를 받은 죄수는 형벌을 받기 전에 먼저 초죽음이 되도록 채찍질을 당했습니다. 그리고는 벌거벗은 채로 십자가에 매어 답니다. 그리고 죽을 때까지 매달아 놓습니다. 생명이 질긴 사람은 열흘 동안 십자가에 매달려서 처절한 고통을 당하며 죽어갑니다. 살이 찢어지고, 뼈가 부서지고 때로는 독수리들이 몰려와 산채로 살을 뜯어먹기도 합니다. 그야말로 상상을 초월하는 끔찍하고도 처절한 고통이 그 십자가위에서 벌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께서는 바로 이 참혹한 십자가에 달리셨던 것입니다. 그 참혹하고 끔찍한 형벌을 당하신 것입니다. 왜요?

거기에 대한 답변은 이사야서의 말씀에 아주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53:5,6)

우리의 죄, 아니 나의 죄를 위하여 죄없고 흠 없으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것입니다. 거기서 우리가 당해야 할 그 끔찍한 죄의 대가를, 우리가 받아야 할 그 처참한 지옥의 고통을 대신 당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죄과가 도말되었고, 그래서 죄로 말미암아 우리가 겪어야 할 참혹한 고통에서 해방되어 자유와 평화와 새생명을 얻게 된 것입니다.

이 방법 밖에는 도무지 다른 방법이 없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혹시 다른 좋은 방법이 있으십니까? 한번 말씀해 보십시오. 우리의 죄의 문제를 해결할 다른 대안이 있으면 말씀해 보십시오. 없습니다. 돈으로도 안됩니다. 지식으로도 안됩니다. 과학으로도 안됩니다. 무슨 고상할 철학으로도 안됩니다. 천년만년 도를 닦아도 안됩니다. 오직 주님의 십자가밖에는 달리 해결할 방법이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우리의 죄과 대신하여 받으신 멸시와 천대와 수치의 십자가였습니다. 처절하고 끔찍한 참혹한 고통과 절망과 죽음의 십자가였습니다. 그러나 이 십자가를 통해서 죄사함의 은총이 찾아 왔습니다. 새로운 생명의 찾아 들게 되었습니다. 은혜의 날이 도래하게 된 것입니다. 죄에서 은혜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지옥에서 천국으로 옮겨지는 역사가 일어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십자가는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이요, 생명이며, 소망이며, 가장 큰 힘이며 지혜이며 능력인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18절에서는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러한 사실을 기억하며, 특별히 지금 사순절을 보내면서 주님의 십자가의 의미를 마음 속 깊이 되새기며 우리 주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십자가에서 날 위하여 참혹한 죽음을 당하신 예수님을 마음속에 온전히 모셔 들이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이기적이고, 편협적이고, 자기 중심적이고, 죄와 무지와 어둠속에 빠져 있는 자신의 못난 자아랑 십자가에 못박아 버리고 온전히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갈때에 주님의 새생명의 은총이 넘치는 복된 삶을 살아가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주님의 십자가만이 생명을 살리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 주님의 십자가만이 인류에게 생명을 주는 유일한 길입니다. 왜냐하면 십자가 없이는 죄사함이 없고, 죄사함이 없이는 생명이 없기 때문입니다. 죄없고 흠없으신 우리 주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과가 도말되었고, 우리의 죄과가 도말됨으로 비로소 새생명의 은총을 덧입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죄된 인생을 살리는 유일한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앞서 말씀드린 18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또 엡 2:16절에서는 말씀하고 있습니다.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한마디로 하나님께서는 죄로 말미암아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과 단절된 인생을 다시금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셨다는 것입니다. 죄로 말미암아 영원한 형벌에 처할 수 밖에 없었던 인생을 위해서 주님이 십자가에 대신 고난을 당하심으로 하나님과 우리 인생을 화목한 관계로 이어 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도무지 어찌할 수 없는 엄청난 죄의 장벽을 하나님께서 십자가를 통하여 깨뜨려 버리신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죄와 사망과 지옥의 권세를 깨뜨려 버린 유일하고도 가장 강력한 가장 한 무기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앞에서도 말씀드렸지만 가장 강력한 가장 지혜로운 힘은 생명을 살리는 힘입니다. 생명을 살리는 일이 세상에서 가장 큰 능력이요, 힘이요, 가장 큰 지혜인 것입니다.

여러분, 보세요. 생명을 죽이는 것은 아주 쉽습니다. 총알 하나면 생명을 죽일 수 있습니다. 아니 막대기 하나로도 생명을 죽일 수 있습니다. 아니 바늘 하나로도 생명을 죽일 수가 있습니다. 원자폭탄을 터트리면 한꺼번에 수십만의 생명이 희생당합니다. 지금도 세계 도처에서는 지진과 해일과 테러와 화재와 전쟁과 기아로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생명을 살리는 일은 어떻습니까? 살리는 일은 그렇지 못합니다. 생명을 살리는 일은 고사하고라도 생명체에 생긴 조그만 상처하나도 치료하기는 어렵습니다. 몸에 조그마한 상처를 내기는 쉽지만 그 상처를 치료하는데는 많은 시간이 필요합니다. 손가락 하나가 절단되기는 쉬우나 그것을 원상복구 시키기는 어렵습니다. 더더구나 죽은 생명을 살린다는 것은 아예 불가능합니다.

그러니 여러분, 과연 무엇이 가장 큰 능력이겠습니까? 원자폭탄을 수없이 만들어서 많은 사람을 위협하고, 여차하면 터뜨려서 생명을 죽이는 것이 능력이겠습니까? 엄청난 군대를 훈련시키고, 최첨단 무기로 무장을 하고, 경제력을 쌓고, 돈을 벌고, 엄청난 기술력을 축적하는 것이 능력이겠습니까? 열심히 공부하고 배우고 지식과 지혜와 기술을 쌓는 것이 능력이겠습니까?

물론 그것도 능력 맞습니다. 그런 것들도 어느 정도 생명의 풍성함을 가져다 줄 수 있습니다. 과학의 힘으로 병을 보다 잘 치료하고, 생명을 조금 더 연장시킬 수도 있습니다. 또 윤리와 도덕과 종교와 철학도 어느 정도 힘이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고, 감동을 주기도 하며 어느 정도 선한 길로 이끌어 갈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런 것들의 가치도 인정하고 발전시켜 나가야 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물질이나 과학이나 도덕이나 윤리나 사상이나 철학이나 하는 등의 세상적인 지혜와 힘에는 분명 한계가 있습니다. 결코 생명을 살릴 수는 없습니다. 생명의 가치를 좀더 향상 시키고, 좀더 풍요롭게 하고, 좀더 가치있게 해 줄 수는 있을지언정 죄와 사망 가운데 있는 우리 인생을 건져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지옥의 권세에서 건져주어 영원한 생명의 길로 인도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오직 우리 주님의 십자가만이 우리를 살립니다. 죽어가는 생명들을 살리는 능력입니다. 영원한 죽음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우리 인생을 인도하는 것입니다. 다른 어떤 것으로도 할 수 없는 생명을 살리는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누리게 할 뿐 아니라 이 땅에서도 얼마든지 생명의 능력과 은총과 기쁨을 마음껏 누리게 하는 힘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결코 세상의 다른 어떤 것에 여러분의 삶의 기초를 두지 마시기 바랍니다. 세상의 다른 어떤 것도 주님보다 앞세우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직 우리의 생명을 영원히 살리고 풍요롭게 하는 주님께 삶의 근거를 두고 목적을 두고 그 바탕 위에서 다른 모든 삶을 영위해 나가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인도하심 가운데 주님 안에 있는 그 힘과 은혜와 능력과 기쁨과 평안이 충만한 복된 삶을 살아가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4.주님의 십자가만이 참된 지혜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십자가의 도가 가장 큰 지식이며 지혜입니다. 또 말씀드리지만 무엇이 참된 지혜이며 지식입니까? 생명에 관한 지식입니다. 생명을 풍요롭게 하는 지식입니다. 죽은 영혼 살리는 지혜가 진짜 지혜입니다. 온천하를 얻어도 생명의 은총을 누리지 못한다면 가장 불쌍한 인생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을 알아도 생명의 도를 알지 못하면 가장 무식한 사람입니다.

사람들은 십자가를 미련하다고도 말합니다. 사람들은 십자가를 무기력하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외면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하면서 예수님을 열렬히 맞이했던 이스라엘 사람들도 예수님이 잡히셨을 때는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아우성을 쳤습니다. 십자가가 무슨 능력이냐, 그렇게 무기력하게 붙잡혀서 어떻게 우리가 요구하는 것을 들어주겠느냐하는 것입니다. 그 저주 받은 십자가는 필요없으니 뭔가 좀 대단한 능력으로 로마군대를 물리치고 우리를 해방시키고 먹을 것 입을 것 실컷 먹고 자유를 누리며 살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계실 때에 거기서 내려오라, 거기서 뛰어 내려서 너를 구원하라 그리하면 우리가 믿겠노라고 조롱을 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요즘에도 이 생명의 도를 알지 못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십자가를 멸시합니다. 무시합니다. 그게 무슨 사람을 살리는 능력이냐고, 그게 무슨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하겠느냐고, 우리는 그 따위는 필요 없으니 돈이나 달라고 아우성을 칩니다.

그러나 실상은 십자가가 미련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미련한 것입니다. 사실은 십자가가 무기력한 것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지식과 재물과 권력과 인간의 이성이 무기력한 것입니다. 십자가가 헛된 것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것들이 헛된 것들입니다. 그것들은 결코 우리의 생명을 보장할 수 없습니다. 생명을 살릴 수 없습니다. 오직 주님의 십자가만이 우리의 생명을 구원할 수 있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지혜인 것입니다.

오늘 20절과 25절 보세요.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뇨 선비가 어디 있느뇨 이 세대에 변사가 어디 있느뇨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케 하신 것이 아니뇨?”(20절)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25절)

여러분, 지혜자가 어디 있습니까? 선비가 어디 있습니까? 참된 변사가 어디 있습니까? 누가 하나님보다 지혜롭게습니까? 누가 하나님보다 강하겠습니까? 누가 하나님보다 똑똑하겠습니까? 누가 우주의 근원을 알겠습니까? 누가 영원한 미래를 알겠습니까?

오직 참된 지혜하는 하나님 뿐입니다. 진짜 진짜 진진짜 선비는 주님 뿐입니다. 참된 변사는 주님뿐입니다. 참으로 강한 자는 하나님 뿐입니다. 참으로 참된 지식을 가진 분은 하나님 뿐입니다. 그 하나님 택하신 인류구원의 방법인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만이 인류를 살리고 풍요롭게 하는 유일한 길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십자가의 도를 따르십시오. 누가 어떻게 세상없는 소리해도 십자가의 도가 지혜이고 능력이고 복음이고 생명입니다. 십자가의 도외에 다른 복음은 없습니다. 생명얻는 지혜가 없습니다. 생명얻는 능력이 없습니다. 생명얻는 도가 없습니다. 오로지 주님의 십자가의 도만이 생명의 도요, 지혜의 도요, 능력의 도입니다.

특별히 사순절 기간을 보내면서 이 사실을 분명히 기억하며 그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주님을 온전히 모셔들이고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때에 정말 큰 능력과 기쁨과 생명의 풍성함으로 주님과 동행하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반응형
블로그 이미지

Mission School

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
반응형


[사순절예배설교] 빌라도의 선택  Pilate's Choice,Lent Preaching      


 


 


제목 : 빌라도의 선택

말씀 : 마27:15-26

 


어떤 사람들은 사도신경의 내용 중에 나오는 빌라도라는 사람은 좀 억울하지 않느냐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즉 그는 나름대로 예수님을 석방하려고 애쓴 사람인데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라고 하면서 저주받은 사람의 대표격으로 말하기는 좀 그렇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사실 어떻게 보면 좀 그런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분명 성경에 보면 그는 예수님이 죄가 없다는 것을 알고 나름대로는 예수님을 석방하려고 애쓴 흔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그는 왜 사도신경에서 대대로 저주받은 이름으로 오르내리게 되었을까요? 저는 오늘 사순절 다섯 번째 주일을 맞으며 이 문제를 생각해 보며 사순절의 의미를 되새겨 보고자 합니다.

1.빌라도는 정의를 끝까지 지키지 못했습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성경을 보면 분명히 빌라도는 예수님의 문제에 대하여 공정하게 처리하려고 애썼던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였노라.”라고 하면서 나름대로 예수님을 석방시키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빌라도는 당시 예수님과 관련된 사건을 군중들의 요구대로 처리하지 않고 정당한 방법으로 처리를 하려고 노력하고 있는 것입니다.

게다가 24절에서 빌라도가 군중들 앞에서 손을 씻으며 나는 이 사람의 죄에 대하여 무죄하다고 말했다는 것은 그는 어느 정도 종교성도 가지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죄없는 사람을 죽이면 윤리적으로 옳지 않은 일일뿐 아니라 하늘의 진노를 사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어쨌든 빌라도는 예수님의 사건에 대하여 공정성을 기하고 정의에 입각하여 처리하려고 애썼습니다. 여기까지는 그런대로 긍정적으로 봐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빌라도가 억울하다고 할 수는 물론 없습니다.

왜냐하면 저와 여러분이 이미 잘 알고 있듯이 빌라도는 그러한 공정성을 끝까지 지키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당시 유대 나라는 로마의 식민지하에 있으므로 중대 사안에 대한 법적인 결정은 로마 총독의 재가를 받아야만 했습니다. 특히 사형집행에 관해서는 로마 정부 즉 로마에서 파송된 총독에게 권한이 주어져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빌라도는 예수님과 관련된 사건에 대하여 공정하게 판단하여 최종결정을 해야할 위치에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사형시켜야 한다고 고소하고 있는데 만약 사형을 받을 만한 죄가 있다면 사형언도를 해야 하고, 죄가 없다면 무죄를 선언하고 석방을 시켜야 할 위치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에게는 죄가 없었습니다. 그것은 빌라도 자신의 말이기도 했습니다. 오늘 23절에 보면 “어찜이뇨?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고 말하고 있고 또 요18:38절에서는 “이 사람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였노라.”(요18:38)고 하였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자기 권한을 올바르게 행사하여 무죄를 선언하고 석방을 시켜야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빌라도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십자가의 처형이라는 최악의 결정을 내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죄없으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죄인중의 죄인이 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니 설령 예수님을 석방시키려고 조금 애를 썼다고해서 억울하다고 하소연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여기서 이 점을 명심해야 합니다. 우리는 마지막까지 옳은 선택, 옳은 결정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상황 때문에, 환경 때문에 혹은 이해득실 때문에 마지막에 가서 옳지 않은 결정을 해서는 곤란하다는 것입니다. 상황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비 진리편에 설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은 받아들여 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이런 빌라도의 이 옳지 않은 결정을 보면서, 그래서 대대로 저주받은 이름으로 오르내리는 모습을 보면서 언제 어떤 상황가운데서라도 마음뿐만 아니라 행동으로 옳은 선택, 옳은 결정을 하여 우리의 삶을 더욱 빛나게 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빌라도는 명예를 위하여 정의를 팔아먹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빌라도가 그런 잘못된 결정을 내린 것은 자신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였을 것입니다. 성난 군중들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자신의 권력과 부귀영화를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만 정의대신 타협을 선택한 것입니다.

성난 군중들은 빌라도를 향하여 아우성을 칩니다.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이 예수는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고 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만약 이런 반역자를 살려두면 당신은 로마의 충신이 아닙니다. 그러니 어서 이 사람을 십자가에서 처형하라고 명령을 내리십시오.” 이렇게 소리를 치고 있습니다.

그 소리가 얼마나 큰지 빌라도는 그 소리를 외면할 수가 없었습니다. 자칫하면 무슨 큰 폭동이라도 일어날 태세였습니다. 그러면 치안상태가 어려워지고 그렇게 되면 자신에게 그 책임이 돌아올 것입니다. 로마 황제에게 무능한 총독이라는 소리를 듣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자신의 자리가 위태로워 질 것이었습니다. 출세길에 막대한 지장이 있을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마 빌라도는 고민에 빠졌을 것입니다. 내가 보기에는 저 예수라는 사람에게는 죄가 없다. 그렇지만 저 무지몽매한 백성들이 저렇게 아우성을 치고 있다. 저 성난 군중들의 아우성을 무시했다가는 내가 지금까지 쌓아올린 공든 탑이 무너져 내릴지도 모른다. 내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저 나사렛 촌사람 하나 때문에 내 출세 길을 막을 수는 없지 않는가?

이렇게 생각하고 결국 그는 큰 무리의 소리에 굴복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도록 명령을 내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이것이 빌라도의 또 하나의 큰 잘못이었습니다. 자신의 결정이 진리냐, 정의냐, 옳은 것이냐가 아니라 자신의 결정이 얼마나 자신의 명예와 권력과 부를 지키는데 도움이 되느냐하는 것이 판단의 기준이 되어 그릇된 결정을 내렸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여기서 또한 기억해야 합니다. 세상의 소리, 육신의 소리, 유혹의 소리를 뿌리치고 주님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곡된 세상의 소리가 아무리 크더라도 그런 것 다 뿌리쳐 버리고 진리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때로는 어떤 때는 그러면 물질적으로, 명예적으로 손해가 되는 것처럼 보인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옳은 소리, 진리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 그 소리를 따라 살아갈때에 결국은 하나님과 사람앞에 인정받게 되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모두 그런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빌라도는 진리의 소리를 작은 소리라고 무시하며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사실 빌라도는 조금만 귀를 기울였다면 진리의 소리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 소리는 바로 그의 아내를 통해서 들려왔습니다. 그것은 바로 오늘 19절의 말씀에 나타나 있습니다. “총독이 재판 자리에 앉았을 때에 그 아내가 사람을 보내어 가로되 저 옳은 사람에게 아무 상관도 하지 마옵소서. 오늘 꿈에 내가 그 사람을 인하여 애를 많이 썼나이다.”

그러니까 빌라도의 아내가 자신의 꿈 이야기를 하면서 예수님의 일에 관여하지 말라고 충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꿈인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분명히 예수님은 죄가 없는 옳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분을 해롭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꿈에 그분의 고통앞에서 자신도 몹시 괴로움을 당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절대 저 사람들의 잘못된 요구를 들어주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빌라도는 끝내 그러한 아내의 소리를 외면했습니다. 왜 일까요? 아마도 그 소리는 너무나 작은 소리였기 때문에 무시해도 좋다고 여겼기 때문일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까? 아내의 소리는 혼자였습니다. 그래서 너무나 작은 소리였습니다. 그 소리는 너무나 미미한 소리였기 때문에 자신의 권력을 위협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는 소리는 너무나 큰소리였습니다. 아우성으로 들려왔습니다. 수많은 군중들의 소리였습니다. 그래서 그 소리는 자신의 권력을 삼킬 듯한 거대한 소리였습니다. 그래서 결국 그는 옳은 소리였지만 작은 소리에 불과했던 아내의 소리는 무시해 버렸고, 잘못된 소리였지만 큰 소리였던 군중들의 소리를 따라 악을 행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습니까? 사실인즉 우리도 이런 선택의 기로에 선다면 자칫하면 빌라도와 같은 결정을 하기가 쉽습니다. 작고 소수이지만 진리의 소리, 정의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거기에 따라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하는데 옳지 않은 소리임에도 불구하고 큰 소리, 많은 소리에 따라 어떤 결정을 내릴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진리는 항상 요란하고 커다란 소리에 있는 것만은 아니라는 점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진리는 항상 세상 많은 사람들이 가는 곳에 있는 것만은 아니라는 점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오히려 진리는 좁은 길에, 작은 소리에, 잘 들리지 않는 소수의 소리에 있을 때가 더 많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열왕기상 19장에 보면 엘리야가 이세벨의 핍박을 피하여 동굴 속에 숨어 있습니다. 그때 엘리야 앞에 몇 가지 상황이 벌어지는데 먼저는 산을 흔들만한 요란한 바람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러나 거기서 하나님의 음성은 들려오지 않았습니다. 그 다음에 땅을 흔드는 지진이 있었는데 거기서도 역시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오지 않았습니다. 또 지진 후에 불이 일어났으나 거기서도 하나님의 음성은 들려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런 요란한 상황이 지나가고 갑자기 고요해졌습니다. 그러더니 아주 작고 세밀한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귀를 기울여야 겨우 들을만한 가냘픈 소리였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음성이었습니다. 엘리야는 그 작은 소리를 듣고 다시 힘을 얻어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40일 금식 기도하실 때도 그랬습니다. 거기서 예수님께서 40일을 금식하고 힘들어 하실 때 아주 그럴듯한 소리가 들려옵니다. “여기 있는 돌들로 떡을 만들어 먹으라. 그리하여 네 배고픔을 해결하고 군중에게 나누어주라.”는 것이었습니다. 다음에는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라. 기적을 보여주라. 그러면 너는 최고의 인기스타가 될 것이다.”는 것이었습니다. 다음은 “천하만국 권세를 가지라. 너는 최대의 권력자와 성공자가 될 것이다.”는 것이었습니다.

모두가 그럴듯한 소리였습니다. 세상에서 부귀영화와 명예를 누리라는 유혹의 소리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러한 현란하고 요란스런 거짓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그러한 커다란 거짓소리를 물리치시고 조용히 들려오는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 결국 인류구원의 역사를 성취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빌라도는 그렇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인기의 소리에, 명예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작은 소리라고 아내로부터 전달된 진리의 소리를 무시하고 듣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오늘 우리에게까지 저주받은 이름으로 오르내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세상의 요란한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이 아니라 주님의 조용한 음성에 귀를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다수의 큰 소리에 파묻혀 그만 진리의 소리를 놓치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세상에서 누가 어떻게 떠들어대든 주님앞에 조용히 엎드려 세미한 주님의 음성을 듣고 진리의 길, 생명의 길로 달려가시는 저와 여러분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4.빌라도는 사람들의 큰 소리 때문에 양심의 소리를 외면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빌라도는 그 자신이 분명히 말했습니다. 예수, 그에게는 죄가 없다는 것입니다. 나는 그에게서 어떤 죄도 찾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곧 양심의 소리이기도 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죄가 없었고, 죄가 없으니 예수님을 석방하려고 나름대로 애를 썼던 것입니다. 그에게는 죄가 없다. 그에게는 죄가 없다. 그러니 그를 석방하라. 이것이 빌라도의 양심의 소리였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양심의 소리보다는 사람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어쩌면 자신의 지위를 위태롭게 만들지도 모를 사람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임으로 양심속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외면하고 군중들의 소리에 굴복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혹시 당장은 손해가 되는 일처럼 보인다고 할지라도 사실은 그것이 성공의 길이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조카 롯의 경우를 한번 생각해 봅시다. 그들은 함께 살다가 가축이 많아져 갈라서야만 했습니다. 목축업을 생계수단으로 하는 그들에게는 양떼를 방목할 수 있는 풀밭과 물의 근원이 가장 중요한데 유대 땅의 그러한 환경은 제한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종들과 롯의 종들간에 다툼이 벌어집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이제는 롯과 헤어질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고 롯에게 선택권을 주며 떠나라고 합니다.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선택의 우선권을 네게 주니까 네가 먼저 우선권을 결정하라.”(창13:9)

여러분, 이때 롯의 양심의 소리는 무엇이었을까요? 롯은 아버지 어려서 아버지 하란을 잃고 큰아버지 아브라함 밑에서 성장하였습니다. 그러니 지금까지 길러주신 늙은 아브라함에게 이 좋은 것을 다 드리고 젊은 자기는 양떼를 몰고 새로운 개척지를 향해 사막을 떠나는 것이 정상적인 사람의 양심의 소리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롯은 자기 양심에 들리는 소리를 무시하고 좋은 것을 자기가 차지해 버립니다. 그래서 늙은 큰 아버지 아브라함은 좋지 못한 땅으로 떠나게 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양심의 소리를 버리고 좋은 땅으로 갔던 롯은 풍요로운 땅에서 잘먹고 잘살았을까요? 그렇지 못했습니다. 당장은 성공한 것 같이 보였습니다. 그러나 죄악의 땅 소돔과 고모라에서 그들은 큰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그 땅이 불의 심판을 받을 때 그 동안 모아 놓은 재산을 다두고 떠나야 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그의 아내는 그 땅에 미련을 두고 뒤돌아보다가 소금기둥이 되어버리고 맙니다. 나중에는 종족 보존이라는 미명하에 딸들이 아버지를 술취하게 만들고 관계를 맺어 모압과 암몬 족속이 형성됩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께 버림받은 민족이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소리, 양심의 소리를 버리고 당장 눈에 좋게 보이는 것을 좇아 갔던 롯은 재물로, 가문의 체통도, 윤리도, 믿음도, 하나님의 유업도 모두 잃어버리는 비극적 결과를 가져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제 말씀을 정리합니다. 우리는 지금 사순절 다섯 번째 주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사순절을 다른 절기가 아닙니다. 바로 세미한 주님의 소리를 듣는 절기입니다.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떠들어대는 시끄럽고 요란한 소리를 듣는 것이 아니라 세미하게 들려오는 주님의 진리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시간입니다. 무슨 화려한 소리, 대박이 터지는 소리, 출세하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소리, 양심의 소리,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절기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세상의 부귀영화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뜻에 귀를 기울이셨습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래서 인류구속의 대업을 이루셨습니다.

그러나 빌라도는 세상 사람들의 커다란 소리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아내의 꿈을 통해서 보여주신 작은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죄가 없다고 하는 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에 그는 세상의 권력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부귀영화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그렇게 하면 성공한 인생이 될 줄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인생은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그렇게도 지키고 싶었던 권력과 부귀영화도 누리지 못하고 나중에 사마리아인들의 어떤 폭동과 관련되어 총독의 지위도 박탈당하고 로마로 소환되어 갔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그는 세상의 지위도 빼앗기고 영광의 나라의 은총을 누리기는커녕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가장 흉악한 죄인으로 대대로 남은 저주받은 인생이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이 사순절을 보내면서 정말 세상의 크고 시끄러운 소리, 많은 사람들이 떠들어대는 군중의 소리, 부귀영화의 소리, 물질의 소리, 무사안일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아니라 혹시 작은 소리일지라도 주님의 소리, 양심의 소리, 진리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진실로 여러분 모두는 주님을 따라 진리의 길을 달려감으로 진정 하나님과 사람앞에 인정받으며 생명의 은총을 세세토록 누리는 복된 삶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조학환 목사

 

반응형
블로그 이미지

Mission School

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