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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네째주일낮설교 / 버림과 얻음 (September,Sunday Sermon)

 

제목 : 버림과 얻음

 

말씀:5:1-3

 

1.심령이 가난해 져야 합니다.

 

여러분,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얻기 위한 선행조건이 무엇이겠습니까? 물론 많은 것을 말할 수 있지만 먼저 버리는 작업이 우선되어야 합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뭔가 새로운 것을 얻기 위해서는 기존에 가지고 있던 생각이나 가치관이나 습관이나 이런 것들을 과감히 버리고 그래서 뭔가가 새롭게 들어갈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오물이 잔뜩 들어있는 컵에는 깨끗한 물을 따라 마실 수가 없이 않습니까? 주먹에 돌을 쥐고 있으면 금덩어리를 집어 들 수가 없지 않습니까? 마음속에 미움이 가득 들어 있으면 어떻게 사랑의 마음을 담겠습니까? 마음에 거짓이 가득차 있으면 어떻게 진실을 담겠으며, 원망과 불평이 가득하다면 어떻게 감사의 마음을 담겠습니까?

 

여러분, 성경에서 자꾸만 낮아지고 버리고 비워야 할 것을 말씀하고 있는 이유가 뭡니까? 바로 이것 때문에 그렇습니다. 먼저 버려야 새것을 담을 수 있기 때문이지요. 16:25절을 보겠습니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여기서 목숨이란 물론 그에게 있어서 가장 소중한 것을 말합니다. 즉 목숨을 버리라는 것은 물론 경우에 따라서는 생명도 바쳐야 하겠지만 꼭 생명을 바치라는 뜻이라기 보다는 예수님 안에 진정 생명의 은총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작고 보잘 것 없고 한계속에 있고 죄와 무지속에 있는 우리 생각과 뜻과 그밖에 우리가 소중하다고 여기는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예수님과 예수님의 말씀이 우리 심령 가운데 온전히 자리잡게 되고 그러면 예수님 안에 있는 생명이 우리 가운데 역사하게 된다는 말씀이지요.

 

여러분, 그렇습니다. 정말로 무엇인가를 얻으려면 일단 버려야 합니다. 그래서 경우에 따라서는 내가 버리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강제로 빼앗아 갈 경우도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사실을 눅15장에 나오는 탕자의 비유에서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거기에 보면 어떤 부잣집 아들이 부모에게 유산을 미리 달라고 떼를 써서 결국 자신의 몫을 가지고 집을 나갔습니다. 그러나 이 미련한 아들은 돈좀 있다고 진탕 먹고 마시고 세상 연락을 즐기며 허랑방탕하여 있는 돈 다 날려 버리고 그야말로 알거지가 됩니다. 그래서 남의 집에 돼지치기로 들어갔는데 하필 그해 따라 너무 큰 흉년이 들어서 먹을 것이 없어서 주인집도 먹을 것이 제대로 없어서 돼지밥을 먹으면서 돼지를 치게 됩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가 주목할 것은 바로 이때부터 반전의 드라마가 펼쳐진다는 것입니다. 그는 빈털터리가 되었을 때 즉 그가 자발적으로 그랬든 강제적으로 그렇게 되었든, 원하든 원하지 않든 그가 자신의 모든 것을 몽땅 잃어버렸을 때 비로소 아버지를 생각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내 아버지 집에는 먹을 것이 많은데, 내 아버지 집에는 품꾼도 좋은 것을 먹는데 나는 여기서 굶주려 죽게 되었구나 하면서 내가 한 짓이 있으니 아들로 맞아 달라고는 못할 거고 품꿈으로라도 써달라고 하자 하면서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돌아갔을 때 아버지의 환대를 받고 아들로서의 지위가 회복되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 비유의 핵심은 아무리 죄와 무지가운데 살던 인생이라도 하나님품으로 돌아오기만 하면 그 크신 사랑과 은혜로 큰 잔치를 베풀며 환영해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부가적으로 생각해 볼 수 있는 게 이 탕자가 지위가 회복되는 그 반전 드라마가 언제 펼쳐졌느냐? 그가 어떻게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되었느냐? 하면 굶어 죽을 지경이 되었을 때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뭔가 자신이 가지고 있을 때, 그래서 뭔가 스스로 할 수 있다고 여길 때, 돈이 있어서 흥청망청 쓸 때, 술 친구들과 기생들이 아첨을 하면서 같이 놀아주니까 세상이 제 세상 같았을 때 그는 아버지집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돈 떨어지고, 술떨어지고, 친구떨어지고, 쾌락도 다 떠나고 그래서 철저하게 낮아지고 버림받고 완전히 빈털터리가 되었을 때 그는 비로소 자신이나 돈이나 세상 즐거움이 얼마나 보잘 것 없는 것인지 뼈저리게 느끼고 두손두발 다 들고 아버지 품으로 돌아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자꾸 우리에게 비워라 낮아져라 죽어라는 하는 것은 우리가 다 알거지라 되라는 뜻이 아닙니다. 왜 하나님이 우리를 알거지를 만들기를 바라시겠습니까? 비우고 죽이고 낮아지라는 것은 우리의 지혜와 능력과 경험과 이성이 얼마나 작은 것인지를 인정하고 그것을 의지말고 하나님의 말씀과 인도하심을 따르라는 것입니다. 세상의 것들이 내 삶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고, 삶의 우선순위가 되지 않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 마음 내뜻대로 살지 말고 하나님뜻대로 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과 자신을 바르게 알고 겸손하게 낮아져서 가난한 심령으로 주님과 동행할 때에 천국의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게 되기 때문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 3절을 같이 보겠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라고 말입니다. 말씀 그대로 심령 곧 마음 혹은 영혼이 가난한 사람이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란 자신의 죄와 무지와 연약함과 부족함을 아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도우심과 인도하심과 공급해 주시는 은혜가 없이는 살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하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바라보며 그 뜻대로 힘써 살아가는 그 겸손한 마음의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은 하나님과의 온전한 교제가 이루어져 하나님 안에 있는 온갖 좋은 은혜를 풍성하게 누리게 됨으로 천국을 소유하게 된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는 정말 심령이 가난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부족함과 연약함과 무지함을 인정하고 겸손히 하나님 앞에 무릎꿇어야 합니다. 내 생각과 경험와 이성과 능력과 지혜가 얼마나 작은 것인지를 인정하고 그런 것들을 앞세우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을 앞세우고 그 원리와 그 방법과 그 뜻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생각은 나보다 천배만배억배 더 큽니다. 더 지혜롭습니다. 더 선하십니다. 그러므로 그 말씀을 따를 때에 내가 생각하고 바라고 원하던 것들보다 천배만배억배 더 수지맞는 일이 생깁니다.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물론이고 지금 여기서도 얼마든지 천국의 은총을 누리게 됩니다. 주님이 주시는 기쁨과 은혜와 능력과 평강과 위로와 자유를 맛보게 됩니다. 저와 여러분은 꼭 이런 은총을 누리며 살아가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심령이 부유하면 진노의 대상이 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분명히 주님의 은총을 누리게 됩니다. 심령이 부유하면 교만한 자가 되어 주님의 은총은커녕 도리어 주님의 책망과 진노의 대상이 될 뿐입니다. 다시 말씀드려 심령이 부유하면 그냥 주님의 은총을 누리지 못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분명한 책임추궁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눅12장에 보면 이런 어리석은 자들에게 주시는 경고의 비유가 있습니다. 소위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라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거기에 보면 어떤 마을에 큰 부자가 있었는데 어느 핸가 엄청난 풍년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곡식을 쌓아 둘 창고가 모자라 곡간을 하나 더 짓고, 곡간마다 곡식을 잔뜩 쌓아놓았습니다. 그렇게 여러개의 곡간에 곡식이 잔뜩 쌓인 것을 보자 마음이 너무 든든하였습니다. 이제는 아무 걱정이 없었습니다. 부러울 것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에게 말합니다. 12:19절입니다.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그러자 하나님께서 어떻게 말씀하셨습니까? 12:20절을 계속 보겠습니다.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그러니까 부자는 곡식을 잔뜩 쌓아 놓고 내 영혼아 이제 부러울 것이 무엇이냐, 걱정할 일이 무엇이냐, 이제는 남은 인생 실컷 먹고 마시며 멋지게 즐겨보자꾸나 그런 것입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이 미련한 인사야, 네가 그렇게 많은 물건을 쌓아 두었다만 만일 오늘 밤에 내가 네 영혼을 거두어 간다면 너의 쌓아둔 곡식이 다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오늘밤 그 양식을 내가 다 가져간다면 너는 무엇으로 평안을 누리겠느냐, 오늘 밤 너의 건강을 빼앗아 간다면 너는 정말 실컷먹고 마시며 즐거워할 수가 있겠느냐? 너는 너의 생명이 내 손에 달려 있다는 것을 모르느냐? 이 미련한 인생아, 그랬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부자는 마치 자기가 쌓아둔 양식이 순전히 자기 힘으로 농사지어 얻어서 순전히 자기의 것으로 알았습니다. 먹을 것을 잔뜩 쌓아 두었으니 이제는 먹고 마시며 즐기며 살기만 하면 될 줄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정말 그렇습니까? 아닙니다. 그 많은 곡식도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땅을 주시고 비를 주고 생명을 주셔서 자라나고 싹이트고 열매를 맺게 하신 것입니다. 또한 그것을 주신 하나님께서 지금이라도 가져가시면 그만입니다. 생명도 권력도 명예도 건강도 지식도 물질도 하나님이 도로 가져가시면 그것은 나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어집니다. 결코 내 영혼을 지켜주지 못합니다.

 

그런데 죄와 무지 가운데 있는 인생은 그만 어둠으로 그러한 사실을 알지 못하고 무엇인가 좀 있으면 마치 자신이 다 얻은 줄로 여기고, 자신이 다 마음대로 할 수 있을 줄로 여기고 교만하고 미련하게 하나님을 찾지 못하고 제멋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자기 힘만 믿고 살아갑니다. 자기 지식이나 돈이나 권력이나 건강만 믿고 살아갑니다. 그러다가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 되고마는 것입니다.

 

그래서 잠18:12에서는 사람의 마음의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요 겸손은 존귀의 길잡이니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가 가진 생명도, 먹고 입고 자고 하는 모든 생명의 활동들도, 우리가 누리고 있는 모든 것, 우리가 발딛고 살아가는 모든 삶의 터전들도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인도하심과 보호속에서만 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기억하며 하나님 앞에 엎드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총이 아니면 단 한시도 살 수 없는 연약하고 무지하고 곤고하고 어리석은 인생이라는 것을 기억하며 정말 가난한 심령으로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그렇게 정말 피조물로서의 자기 분수를 알고 겸손히 하나님 앞에 엎드는 삶을 살 때 정말 하나님과의 온전한 관계속에서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마음껏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꼭 이런 인생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버릴 때 가장 좋은 것을 얻게 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버리라, 낮아지라, 심지어 죽으라 하심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버리라 하심은 가짜를 버리고 진짜배기로 채워주려 하심입니다. 낮아지라 하심은 우리를 진정한 의미에서 높아지게 하려 하심입니다. 우리에게 죽으라하심은 진짜 생명을 주시려 함입니다.

 

여러분, 보십시오. 하나님의 사람 모세가 하나님의 은총과 능력을 입었을 때가 언제입니까? 그것은 그가 철저하게 낮아지고 자신의 것을 송두리째 다 버렸을 때입니다. 그는 애굽의 궁궐에서 왕자로 40년을 살았습니다. 애굽의 왕자로서 모세는 모든 것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명예도 권세도 부귀도 지식도 영광도 있었습니다.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때의 모세에게는 하나님의 은총이 필요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도 필요없었습니다. 이미 모든 것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그는 뒤늦게 자신이 히브리인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의 동족들이 애굽의 노예가 되어 학대받고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자기 동족을 괴롭히는 애굽 사람을 보고 분노하여 그 애굽 사람을 죽이고 말지요. 그리고 결국 이 일이 탄로나서 미디안 광야로 도망을 가는 도망자 신세가 됩니다. 하루아침에 왕자의 자리에서 가진 것이라곤 알몸둥이 하나밖에 없는 거지로 전락한 것입니다.

 

거기서 그는 그가 가지고 있던 모든 것들을 철저히 버려야 했습니다. 왕자의 자리도 버려야 했습니다. 권세도 물질도 평안함도 호화스러움도 그곳에서 배웠던 학문도 기술도 모두 포기해야 했습니다. 당시 세계 최강국이었던 이집트의 왕자의 신분에서 이제는 더 이상 내려 갈래야 내려 갈곳이 없을 만큼 인생의 가장 밑바닥으로 떨어진 것입니다. 그야말로 천당에서 지옥으로 떨어진 것과 같았습니다.

 

그러나 그때가 곧 기회였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기회였던 것입니다. 모세가 이집트 왕자에서 하나님의 왕자로 새롭게 시작하는 출발점이었습니다. 그렇게 철저하게 빼앗기고 잃어버리고 낮아졌을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부르셨던 것입니다. 즉 그로 하여금 세상의 모든 것을 포기하게 하시고 그래서 그가 정말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을 때 그를 이집트 왕장가 아닌 하나님 나라의 왕자로 세우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결국 인간의 모든 것을 완전히 잃어버린 다음에 하나님의 능력을 덧입게 됩니다. 세상적인 것을 완전히 제거하신 다음에 하나님의 권능으로 대신 채워 주신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는 그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시킵니다. 하나님의 권세를 가지고 천하를 호령하는 바로왕 앞에 당당히 서서 대결을 펼쳐 애굽에 열가지 재앙을 이스라엘을 구원해 냅니다. 홍해바다의 넘실거리는 파도를 물리칩니다. 하늘에서 만나가 내려오고, 메추라기 떼가 몰려오고, 쓴 물이 단물이 되고, 반석에서 샘물이 터지고, 대적자들을 물리쳤습니다. 작은 것을 잃고 어마어마한 것을 얻은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우리보다 천배만배억배 더 지혜롭고 능력이 있고 은혜와 사랑이 충만하신 분이십니다.

 

여러분, 55:8,9절을 보십시오.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 뭐 당연한 것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이 어떻게 우리와 비교가 되겠습니까? 전능하신 하나님, 은혜의 하나님, 창조주 하나님, 영광의 하나님, 선하신 하나님 그 안에 모든 생명과 부귀와 영광과 지혜와 축복과 평강과 위로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작은 것들을 포기하고 하나님을 따를 때 우리는 놀라운 은혜 가운데 살게 됩니다. 얼마든지 능력있는 삶을 살아갑니다. 어떤 적들도 물리칠 수 있습니다. 환경이나 상황의 적도 물리칩니다. 사탄의 궤계를 물리치고 능력있는 삶을 살게 됩니다. 그까짓 죄의 세력 얼마든지 이길 수 있습니다. 고난과 핍박도 얼마든지 이길 수 있습니다. 더럽고 추한 것들로부터 얼마든지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세상 욕심과 향락과 명예와 권세로부터 얼마든지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세상이 어떻게 변해도 넉넉히 천성을 향하여 달려 갈 수 있습니다. 마귀가 어떻게 교묘하게 유혹하게 당장에 간파해 낼 수 있습니다. 사탄이 유혹할 때 사탄아 물러가라고 큰 소리 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정말 왕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으로서의 삶을 살게 됩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가능한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가능한 것입니다. 내 능력과 재물과 이성과 지식과 경험과 과학으로서는 절대 불가능한 일입니다. 마귀 사탄의 권세, 죄의 권세, 지옥의 권세 절대로 이길 수 없습니다. 그런 것들 의지하다가는 맨날 그런 것들에게 끌려다니며 노예 생활을 할 뿐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과 권능을 의지할 때 세상의 모든 것을 이기는 위대한 승리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와 지혜를 덧입으려면 겸손히 주님 앞에 엎드려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의 은혜와 능력으로 자신 안에 있는 모든 추하고 더럽고 자기 중심적이고 이기적이고 인본주의적이고 물질주의적인 악하고 추하고 왜곡된 것을 비워내야 합니다. 성령의 불길로 태워 버려야 합니다. 그러면 주님이 주시는 지혜와 능력과 은혜가 내안에 들어오게 됩니다. 내 심령이 거룩하고 아름답고 의롭고 올바른 가치관으로 채워지게 됩니다. 그러면 그 은혜와 능력로 지혜로 세상의 모든 것을 이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오늘 말씀을 기억하며 정말 심령이 가난한 자가 되어 우리 자신의 작음과 나약함과 한계와 죄됨과 무지함을 인정하고 겸손히 주님 앞에 엎드려 그것이 환경이든 상황이든 고난이든 핍박이든 유혹이든 죄이든 그 어떤 것이든 모든 어둠의 세력들을 주님의 은혜와 능력과 지혜로 이기고 왕같은 제사장으로서의 삶을 살아가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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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낮예배설교 / 십자가의 승리 (September,Sunday Sermon)

제목 : 십자가의 승리

말씀 : 갈3:13-14

오늘은 고난주일입니다. 고난주일이란 약2000여년 전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셔서 십자가에 달려서 그 참혹한 죽음을 당하심으로써 온 인류에게 죄사함의 은총을 가져다주신 사건을 회상하면서 그 고난의 의미를 되새겨보는 절기입니다.

또 오늘은 종려주일이라고도 하는데 종려주일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죽음을 앞두고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을 방문하실때에 예루살렘으로 들어오는 길목에서 많은 군중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하면서 주님을 환영한데서 유래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종려주일이란 주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위하여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지만 그 십자가의 죽음은 승리를 위한 죽음이었음을 상기하는 주일인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주님의 십자가의 죽음은 부활을 전제로 한 죽음이었으므로 주님의 고난가운데서 주님의 부활을 바라보며 희망과 소망을 갖는 그러한 절기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고난과 승리, 절망과 희망, 죽음과 생명이라는 이 역설적인 의미를 함께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좀더 구체적으로 주님의 십자가 속에는 어떻게 고난과 승리, 절망과 희망, 죽음과 생명이라는 이 역설적인 의미가 함축되어 있습니까?

1.죄의 참혹한 결과를 보여주는 십자가.

그렇습니다. 십자가는 우선 죄가 우리에게 얼마나 참혹한 결과를 가져다 주는지를 분명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러분, 십자가가 무엇입니까? 십자가는 가장 참혹한 사형틀입니다. 요즈음에 많은 사람들이 십자가를 목에 걸고, 차에 걸고 무슨 장식품이나 부적처럼 달고 다니지만 십자가는 본래 가까이 하기에는 너무나 혐오스러운 물건입니다. 십자가는 사람을 가장 잔인하고, 가장 끔찍스럽고, 처절한 고통을 주는 가장 참혹한 사형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상에서의 고통은 육체적, 정신적으로 고통의 정도도 말로 할 수 없고, 고통의 시간 또한 많게는 40여일 동안 계속되는 너무나 잔인한 사형방법인 것입니다.

게다가 십자가의 사형은 먼저 채찍으로 때리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채찍도 보통의 채찍이 아니라 끝에 쇠갈고리가 달려 있는 채찍입니다. 이것으로 사정없이 후려치니 그 고통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매달릴 십자가를 지고 이렇게 살쩜이 떨어져 나가는 채찍질을 당하며 사형장소로 이동합니다.

사형 장소에 도착하면 십자가에 손과 발에 못을 박아서 세워놓습니다. 그러면 못박힌 손목과 발목이 찢어지는 고통을 당하게 됩니다. 낮에는 뜨거운 태양이 내리쬐고, 밤에는 추위가 엄습합니다. 살이 찢어지고, 뼈가 부서지는 아픔을 당합니다. 심지어는 독수리가 와서 뜯어먹기도 합니다. 그것도 잠시잠깐이 아니라 목숨이 긴 사람은 40일 동안이나 그 끔찍한 고통을 당하며 서서히 죽어갑니다. 그러니 그 고통과 비참함과 참혹함을 어찌 말로 다 표현 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그 끔찍한 십자가의 죽음을 당하신 것입니다. 왜 그랬습니까? 죄를 지은 인생은 그런 끔찍한 고통을 당할 수밖에 없다는, 그래서 주님이 우리를 대신하셔서 그 참혹한 고통을 당하시지 않으면 우리 모든 인생이 그런 형벌을 받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계21:8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점술가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거짓말하는 모든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지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진다. 얼마나 끔찍한 일입니까? 그런데 더 끔찍한 것은 그 고통은 영원히 지속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계9:6에서는 “그 날에는 사람들이 죽기를 구하여도 죽지 못하고 죽고 싶으나 죽음이 그들을 피하리로다.”고 말씀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죄는 너무나 참혹한 결과를 가져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한 채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속에 도무지 견딜 수 없는 고통을 영영토록 받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죄는 나중에 지옥에서만 고통을 가져다주는 게 아닙니다. 지금도 여기서도 마찬가지 입니다. 우리에게 아픔과 상처와 고통과 미움과 저주와 갈등과 시기와 질투와 두려움을 가져다 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말 죄를 멀리하고 하나님을 가까이해야 합니다. 그럴 때 영원한 천국의 은총은 물론 여기서도 빛과 같은 은혜를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늘 죄를 멀리하고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삶을 통하여 빛과 같은 은혜를 마음껏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저주를 풀어준 십자가

여러분, 십자가는 바로 이렇게 처절한 고통의 장소였기 때문에 십지가가 우리에게 소망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십자가는 바로 우리가 받을 그 저주, 그 참혹하고 처절한 고통을 대신한 대속의 십자가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오늘 13절 말씀 보세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죄없고 흠없고 티 없으신 예수님, 거룩하시고 순결하시고 영화로우신 예수님이 내가 받을 저주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저주를 받으신 것입니다. 순전히 내가 받을 고통을 위하여 고통을 당하신 것입니다. 내가 받을 지옥의 형벌을 대신하여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우리는 죄의 저주에서 벗어난 것입니다. 사탄의 권세에서 구속함을 받아 죄에서 자유인이 되어 새생명가운데 살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마20:28절에서 예수님을 말씀하셨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그래서 요19:30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그 처절한 고통을 당하시고 돌아가시면서 ‘다 이루었다.’고 선포하셨습니다. 여러분, 인간적으로는 이게 어디 말이나 되는 소리입니까? 사형을 당하면서 그것도 그 저주받은 그 끔찍한 그 참혹한 십자가에서 죽으면서 다 이루었다니 이성적으로는 이게 어디 말이나 됩니까?

그러나 여러분, 주님의 십자가의 사건은 그야말로 다 이룬 사건입니다. 십자가의 저주받은 죽음을 통하여 우리가 받을 저주를 풀어버린 것입니다. 십자가의 그 처절한, 그 끔찍한 죽음을 통하여 우리가 지옥에서 당할 그 처절한, 그 참혹한 고통의 굴레를 벗겨 주신 것입니다. 우리를 죄의 저주에서, 지옥의 저주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는 방법은 이것밖에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도를 닦아도 죄의 굴레를 벗어던질 수가 없습니다. 돈으로도 권력으로도 지식으로도 과학으로도 물론 안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대속의 죽음을 당하실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죄로 말미암아 그 끔찍하고 처절한 고통을 영원히 당할 수 밖에 없었던 우리를 그 저주에 풀어주셨으니 이 얼마나 감사하고 기뻐하고 찬양하고 영광을 돌려야 할 일 입니까? 영원한 고통에서 해방시켜 영원한 복락으로 인도하셨으니 세상에 이보다 더 큰 은혜와 축복과 사랑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므로 여러분, 정말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찬양하시기 바랍니다. 세상에서 아무것도 없어도 감사와 영광과 찬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그 영원한 저주에서 해방된 은총을 기억하며 감사와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기뻐하며 영광 돌리며 찬양하며 주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3.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는 십자가

여러분, 그렇습니다.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신 사건은 하나님의 사랑의 극치입니다. 이것은 세상의 다른 어떤 사랑과도 비교도 할 수 없이 너무나 큰 사랑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남의 자식을 살리기 위하여 여러분의 자식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내어 주실 용기가 있으십니까? 여러분, 내가 아픈 것은 참을 수 있어도 자식이 아픈 것은 차마 보지 못하는 것이 부모의 마음이 아닙니까? 차라리 내가 죽을지언정 자식이 죽는 것은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것이 부모의 마음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나 같은 죄인을 살리시기 위하여 독생자 예수님을 이 천한 곳에 보내셨습니다. 보내셨을 뿐만 아니라 십자가의 가장 처절한 죽음을 당하게 하셨습니다. 이로써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람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분명히 보여 주신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여기서 확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 요3:16절에서는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여러분, 그렇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의 극치입니다. 범죄한 인생에 대한 하나님의 열정적인 사랑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과 화해되었습니다. 끊어졌던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된 것입니다. 그래서 영원한 저주와 고통에서 해방되어 영생복락을 누리는 너무나 크나큰 복을 받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너무너무 사랑하셔서 이런 특권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더 감사하고 주님을 사랑해야 하겠습니까? 우리를 이처럼 사랑하셨으니 우리는 얼마나 또 사람들을 사랑해야 하겠습니까? 이러한 십자가의 사랑을 기억하며 저와 여러분은 더욱 감사하여 위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아래로 사람을 사랑하는 복된 인생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4.축복을 가져다준 십자가

여러분, 오늘 14절 말씀을 보십시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

왜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느냐, 왜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하셨느냐? 우리에게 아브라함의 복을 주시기 위해서 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의 복이 뭡니까? 한마디로 영생복락입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되어 천국에 가는 복입니다. 그래서 눅16장에 보면 거지 나사로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안겼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의 복을 우리에게 주셨다는 것은 영원한 천국의 복을 주셨다는 말씀이고, 이 복이야말로 지고지선지은의 복입니다.

여러분, 사람들이 복복복하면서 복을 누리기를 원하지만 세상의 복은 온전치 못한 복입니다. 제 아무리 복을 많이 받은 사람이라도 세상에는 걱정 근심이 있고, 질고가 있고, 불안과 외로움과 고통이 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복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 복은 완전한 복입니다. 100%입니다. 아니 200%, 1,000%입니다. 넘친다는 것이지요. 충만하다는 것이지요. 무엇으로 은혜와 기쁨과 평강과 행복이 넘쳐흐르는 것입니다. 부정적인 것들은 조금치도 깃들일 수가 없지요. 하나님이 함께 하시니까요. 주님의 보혈의 공로를 덧입은 우리는 바로 그 복을 누릴 사람들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덧입어야만 죄사함을 받고, 죄사함을 받은 사람들만 이런 은총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고난주일이지만 동시에 종려주일인 것입니다. 종려주일은 승리의 주일을 말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고난을 통해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 부활하셔서 새생명을 주셨기 때문에 승리의 날인 것입니다. 주님의 처절한 죽음으로 우리를 살리신 날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그러므로 이 절기를 보내며 그 저주 받은 십자가, 그 끔찍한 십자가, 그 참혹한 십자가를 통해 우리를 지옥의 저주에서 해방시켜 주신 하나님,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주신 주님을 기억하며 감사와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동시에 주님이 십자가의 고난을 통해 새 생명의 역사를 이루신 것처럼 주님의 고난에 동참할 때만이 새 생명의 역사가 일어난다는 것을 기억하며 어떤 형태로든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먼저는 자신이 더욱 생명의 은총을 풍성히 누리며 주님의 역사를 아름답게 이루어 가는 복된 인생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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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둘째주일낮설교 / 성숙한 그리스도인 (September,Sunday Sermon)

 

말씀 : 고전2:14-3:3

제목 : 성숙한 그리스도인

프란시스 베이컨이라는 사람은 사람을 다음과 같은 세 부류로 구분을 했습니다. 첫째는 거미 같은 인생입니다. 거미는 거미줄로 집을 지어놓고 거기에 걸려드는 것을 잡아먹는 곤충입니다. 그러므로 거미같은 인생이란 덫을 놓고 남의 등이나 쳐먹고 살려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두 번째는 개미 같은 인생이라고 하였습니다. 개미는 부지런한 곤충으로 사람들에게 매우 긍정적인 이미지를 갖고 있지만 여기서 말하는 개미같은 인생이란 긍정적인 의미는 아닙니다. 이것은 남에게는 줄줄 모르고 그저 자신만을 위해서 모아 들이는 이기적인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꿀벌 같은 인생입니다. 꿀벌은 물론 꿀벌이 의도적으로 그렇게 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어쨌든 열심히 모아서 남에게 다 줍니다. 심지어는 요즘에는 자기 생명을 받쳐 벌침으로 사람들을 고쳐주기도 줍니다. 그래서 꿀벌 같은 인생이란 이타적인 삶을 추구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여기서 가장 바람직한 인간상이 어떤 모습인지, 우리는 어떤 모습을 지향해야 하는지는 제가 말씀드리지 여러분들께서 더 잘 아실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이러한 세상적인 관점에서의 세종류의 인간상과는 전혀 다른 관점에서의 세종류의 인간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먼저는 육에 속한 사람이요, 다음은 육신에 속한 사람이요, 그 다음은 영에 속한 사람입니다.

이에 대하여 말씀을 나눌 때에 주께서 저와 여러분에게 은총을 베풀어 주셔서 저와 여러분은 우리 주님이 가장 원하시는 인간의 모습을 향하여 좀더 달려감으로 주의 생명의 은총이 충만한 삶을 살아가게 되시기를 간절히 축복합니다.

1.육에 속한 사람

오늘 본문에 보면 먼저 육에 속한 사람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14절을 보십시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육이란 yucikov"(프쉬키코스)인데 이는 육적인, 천성적인이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이것은 혼에 속한 사람, 즉 성령으로 거듭나지 못하여 죄와 무지를 그대로 가지고 죄된 육신의 소욕대로, 죄의 본성대로 살아가는 사람을 말합니다.

따라서 육에 속한 사람은 영이 죽은 사람들입니다. 우리 인생은 본래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영과 육과 혼을 가진 존재로 지음 받았는데 죄로 말미암아 영이 죽음으로 육과 혼도 죄와 어둠속에서 살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으로 이것을 회복시켜야 영혼을 살려야 하는데 성령을 받지 못하여 영이 죽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은 성령의 일을 거부합니다. 깨닫지도 못합니다. 인정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면서 도리어 믿는 일을 미련하고 어리석고 연약한 사람들이나 하는 일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좀전의 14절 말씀 다시 보세요.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

성령이 없기 때문에 성령의 일을 받지 않는 거지요. 복음을 받아들이기는커녕 미련하고 황당하다고 여깁니다. 그런게 어디있느냐며 도리어 생명에 속한 사람들을 조롱하고 비웃고 핍박하고 해요. 당연하지요. 인간의 죽은 영혼이 성령으로 거듭나야만 진리를 알고, 성령의 일을 아는데 그들에게는 성령이 없으니 다만 미련할 뿐이요, 어리석게 여겨질 뿐인 것입니다.

성령을 통해서는 진리를 알고, 주님을 알고, 생명의 길을 아는데 성령이 없으니 듣기는 들어도 듣지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는 거지요. 영이 죽어 있어서 성령을 체험할 수가 없고,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와 부활의 진리에 대해서, 천국과 지옥에 대해서 전혀 깨달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저 죄된 육과 혼의 요구대로 삽니다. 육과 혼의 본능을 따라, 타락한 본성을 따라 사는 거 뿐이예요. 비록 정신적으로 나름대로 고상한 가치를 추구한다해도 그러나 육은 육이고, 혼은 혼일 뿐이예요. 결국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따라 살다가 죄의 심판을 받게 되는 거예요.

여러분, 그렇습니다. 죄된 육신의 본능을 따라 사는 삶은 결코 하나님 앞에 인정받을 수 없습니다. 죄된 육신의 본성을 따라 사는 인생은 결코 누구도 죄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설령 세상에서 좀 고상하고 선하고 가치있는 삶을 산다해도 누구도 죄로부터 자유롭지 못합니다. 만에 하나 육과 정신이 최상의 가치를 드러내며 산다고 해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는다면 결코 하나님 앞에 인정을 받을 수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지옥의 고통을 면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여러분은 한분도 절대로 이 편에 서 있어서는 안됩니다. 우리의 사랑하는 사람들이 그 편에 서 있지 않도록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동원해야 합니다. 그 무엇보다도 천만다행으로 단순히 육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 되었다는 이 사실을 기억하며 감사하며 기뻐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사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육신에 속한 사람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육에 속한 사람이라는 말과 유사해서 좀 혼돈이 됩니다만 성경에서는 육에 속한 사람과 육신에 속한 사람을 분명히 구분하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자, 오늘 3:1절의 말씀의 봅시다.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들을 대함과 같이하노라.”

여러분, 이 말씀을 잘 보세요. 특별히 후반절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안에서 어린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그 말씀이요. 고린도 교인중에 아직 믿음이 성숙하지 못한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 사람들에 대하여 바울은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안에서 어린아이들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은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거예요? 밖에 있다는 거예요? 안에 있다는 거지요. 안에 있긴 있는데 어린아이같은 자들, 성숙하지 못해서 어린아이 같지만 그래도 그리스도안에 있는 자들이라고 말씀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 안에 들어오긴 했는데 아직은 육체적인 삶을 다 벗어던지지 못한 사람, 영보다 육의 지배를 더 많이 받으며 사는 사람들이 있다는 거예요.

여러분, 그럴 수 있습니다. 자, 보세요. 남자가 20세가 되면 군에 입대합니다. 입대하자마자 군인은 군인입니다. 그런데 군인으로서의 모습은 아직 갖추어지지 않았습니다. 군인인 것만은 틀림이 없는데 아직 군인 노릇을 잘 못합니다.

사람이 태어나도 마찬가지입니다. 아기는 태어나면서 사람입니다. 아니 엄마 뱃속에 잉태할 때부터 사람입니다. 그러나 태어나자마자 곧바로 사람 구실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 구실 제대로 하려면 상당한 시간이 필요합니다. 젖을 먹고 이유식을 하고 밥을 먹고 학교에 다니고 오래 기간 훈련과 교육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나서야 비로소 사람다운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물론 그래도 사람구실 제대로 못하는 사람도 있지만...

영적으로 이런 사람들이 바로 육신에 속한 자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 안에 들어오긴 했지만 아직 어린아이라서 주님의 모습이 별로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을 어린아이들처럼 대하며 젖을 먹였던 것입니다.

2절이지요.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치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 고린도 교인들 중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너무나 어린아이와 같아서 차마 밥을 먹이지 못하고 젖을 먹였다는 것입니다. 밥을 먹이면 체 할 것 같아서, 단단한 밥을 먹이면 배탈이 날 것 같아 못 먹이고 계속 젖을 먹였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혹시 여러분 곁의 성도들이 좀 부족하고 연약해도 너무 타박하지 마세요. 그럴 수 있느냐고 몰아세우지 마세요. 그럴 수 있습니다. 뭐 솔직히 다 도토리 키재기 아니겠습니까? 내가 성숙했으면 얼마나 성숙했겠어요. 내가 믿음이 좋으면 얼마나 좋겠어요? 우리 서로 다 부족하고 연약하고 허물 많은 존재라는 것을 기억하며 감싸주고 덮어주고 격려해주고 위로해 주고 기도해 주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렇다면 젖은 무엇이고, 밥은 무엇입니까? 젖은 부드럽고 넘기기 쉽고 영양가가 많은 음식입니다. 밥은 무엇입니까? 단단합니다. 그냥 안 넘어 갑니다. 씹어야 합니다. 자기가 침으로 삭혀서 넘겨야 합니다. 거친 것도 있고, 쓴 것도 있습니다. 맵고 짜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도 젖과 밥이 있습니다. 젖은 부드럽고 달콤한 말씀들, 소화가 잘되는 말씀들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사랑합니다. 믿으면 구원받습니다. 주님이 축복해 주실 것입니다 등의 주로 은혜에 관한 말씀들입니다. 밥은 단단하고 넘기기 힘들고 소화가 잘 안되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주로 책망이나 헌신의 요구에 대한 말씀들입니다. 이런 말씀은 씁니다. 소화가 잘 안됩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이런 말씀을 들으면 배탈이 나기도 합니다. 그러나 어른이 되면 반드시 먹어야 할 말씀이기도 합니다.

여러분, 여기서 목사의 고민이 깊어집니다. 성도들에게 무슨 말씀을 전해야 할까? 어떤 양식을 먹일까? 어떤 분에게는 부드럽고 달콤하고 술술 넘어가는 말씀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어떤 분에게는 단단하고 거칠고 맵고 쓴 말씀도 필요합니다.

어떤 분은 아직도 어린아이이고, 어떤 분은 한참 일할 나이이고, 어떤 분은 이미 노년기에 접어들었습니다. 어떤 말씀은 어떤 분에게는 고단백 영양분이 될 수 있지만 어떤 분은 먹고 배탈이 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다 큰 어른들에게 매일 젖만 먹일 수도 없습니다. 또 단단한 음식만 먹일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많은 고민을 하며 기도하며 말씀을 준비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달콤한 말씀만 바라지 말고 혹 쓴 말씀이라도 믿음으로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혹은 너무 초보적인 말씀을 한다고 그거 다 아는 건데 라고 생각하지 말고 믿음으로 아멘으로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우리는 육신에 속한 사람이라는 이 말씀에서 큰 위로와 격려를 받게 됩니다. 정말 부족하고 연약하더라도, 아직도 세상의 모습이 많이 남아 있다해도 주님을 시인한다면 우리는 비록 어린아이이긴 하지만 주님의 자녀라는 것 때문입니다. 천만다행히도 주님께서는 그런 어린아이와 같은 우리의 모습도 받아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혹시 여러분이 부족하고 연약하고 허물된 모습이 많더라도 낙심하거나 절망하지 말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나는 구원받았다는 그 믿음과 확신을 가지고 기쁨으로 주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의 삶이 더욱 생동감이 있고, 활력이 넘치는 복된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영에 속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육신에 속한 사람, 즉 영적 어린아이와 같은 삶은 물론 구원을 받긴 했지만 우리가 머물러 있어야 할 위치는 결코 아닙니다. 주님은 우리가 성장하기를 원하십니다. 성장하여 자신의 몫을 감당하고, 그러는 가운데 더욱 은혜와 기쁨과 감격을 누리며 주의 역사를 펼쳐 가기를 원합니다. 거기가 바로 우리가 있어야 할 위치입니다. 이것이 바로 세 번째 부류의 사람인 영에 속한 사람의 모습입니다.

오늘 2:15절 보세요.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여기서 ‘신령한 자’가 바로 영에 속한 사람입니다. 말그대로 육과 혼의 지배보다는 영의 지배를 받으며 사는 사람이지요. 물론 그렇다고 이런 사람들이라고 100% 영의 지배를 받는다는 것은 아닙니다. 육과 혼의 지배를 완전히 벗어던지고 100% 신령하게 사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영에 속한 사람과 육신에 속한 사람을 정확하게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라고 구분하기는 힘듭니다. 그러나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래도 육 보다는 영에 더 많이 지배를 받는 사람은 신령한 사람이요, 영의 지배를 받긴 받지만 아직은 영보다는 육과 혼의 원리에 더 많이 좌우되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은 육신에 속한 사람 즉 아직 성숙하지 못한 크리스찬이 아닐까하고 말입니다.

영에 속한 사람은 어떻게 삽니까? 오늘 15, 16절을 보세요.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

먼저 15절 보면 아주 신나는 말씀이 있어요.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지만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않는대요. 이게 무슨 말씀이예요? 나는 남을 마음대로 판단하지만 남에게는 절대 판단 받지 않는다는 말이예요? 아닙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신령한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알고 바르게 판단할 수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그런 사람은 남에게 판단 받을 만한 일을 잘 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하나님의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기 때문에 주님의 기쁘신 뜻이 무엇인지 알고 그것을 향해 힘써 달려가기 때문에 남에게 정죄받고 비난받을 일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런 사람에게는 진정한 자유가 있다는 거예요.

16절절 보세요.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 잘못하면 주님을 가르친다는 말처럼 들을 수도 있는데 그게 아니라 주님을 다른 사람에게 가르쳐 준다는 거지요.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기 때문이지요.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기 때문에 죽어가는 영혼을 바라보며, 또 아직도 미성숙하여 어린아이와 같은 영혼들을 바라보며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고 그리스도를 전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신령한 사람이란 주의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사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러기에 주님의 뜻을 바르게 알고, 주님의 뜻을 바르게 알기에 남에게 판단 받을 만한 일을 하지 않습니다. 또한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기에 주님의 마음을 알고 그 마음을 따라 그리스도를 증거하며 생명을 살리는 일에 열심히 참여하며 산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믿으면 약하지만 하나님의 사람임은 맞습니다. 믿으면 구원받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거기에 머무를 수만은 없습니다. 계속해서 아기로 남아 있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계속해서 쫄병으로 남아 있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계속해서 젖만 먹고 있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계속해서 밥을 먹여줄수는 없지 않습니까? 계속해서 보살핌을 받고 있을수는 없지 않습니까?

물론 그렇게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주님의 마음을 가지고 살기에 그 자신에게는 기쁨과 감격과 은혜와 생명력이 충만한 복된 삶이 되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을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기억하며 먼저 정말 여러분이 육에 속한 사람, 즉 성령을 배제한 채 그저 육신의 본능을 따라 사는 위치에 있지 않다는 것 때문에 무엇보다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만에 하나 아직도 그저 육신의 본능만을 따라 살고 있다면 속히 영에 속한 사람 쪽으로 자리를 옮기시기 바랍니다.

혹시 아직도 온전히 영에 속한 사람이 되지 못하여 육신에 속한 사람 즉 믿음의 어린아이와 같은 사람에 속했다해도 그러나 주님의 사랑으로 구원의 은총을 누릴 수 있는 백성이 되었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감사와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기왕이면 한 단계 더 나아가 영에 속한 사람으로써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주님의 마음을 가지고 살아 갈 때에 기쁨과 은혜와 생명력이 넘치는 풍성한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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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낮예배설교: 

말씀 : 신6:4~9

제목 : 사랑의 우선순위

1.사랑에도 우선순위가 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단어가 있다면 그것은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사랑, 인간의 하나님께 대한 사랑, 부모의 자녀 사랑, 자녀의 부모에 대한 사랑, 남녀 간의 사랑, 친구간의 사랑, 인간의 동식물에 대한 사랑 등 어떤 종류의 사랑이든 사랑은 모두 아름답고 가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사랑이 아름답고 가치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가치나 우선순위에 있어서 차이가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예를 들면 사람에 대한 사랑이나 동물에 대한 사랑이 모두 가치있고 귀한 것이지만 사람에 대한 사랑이 우선적인 것이고, 더 큰 가치를 지닐 것입니다. 또 똑같은 사람에 대한 사랑이라도 부모님께 대한 사랑이 친구에 대한 사랑보다는 더 우선적이고, 더 가치가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좀 극단적인 예이긴 하지만 만약 사랑하는 부모님과 친구와 애완견이 물에 빠져서 허우적거리고 있다면 누구를 먼저 구하겠습니까? 당연히 사람이 우선이 되어야 할 것이고, 그 중에서도 부모님이 우선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사랑은 모두 아름답고 귀한 것이지만 분명 귀중함이나 가치에는 차이가 있고 그래서 우선순위가 있습니다.

그런데 요즘에 보면 어떤 바보같은 사람들이 개 사랑하기를 사람보다 더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미친 중년부인이 남편없이는 살아도 개 없이는 못산다고 했답니다. 그러면서 개에게 온갖 정성과 시간과 돈을 쳐 들이고 심지어는 개한테 엄마가 어쩌구저쩌구하면서 말을 합니다. 자기가 개 엄마면 그러면 자기도 갭니까? 심지어는 개 사랑하기를 하나님보다 더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헌금은 돈 만원도 무서워 벌벌 떨면서 개에게는 아낌없이 돈을 바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만약 개보다 우선순위에서 밀려난다면 기분이 어떻겠습니까? 그야말로 개보다 못한 존재가 되는 거 아닙니까? 하물며 하나님이 개보다 우선순위에서 밀려난다면 도대체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합니까? 여러분, 물론 세상의 모든 것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러나 바르게 사랑해야 합니다. 가치의 차이가 있습니다. 우선순위가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가장 우선되어야 하고 가장 가치있는 사랑은 무엇입니까? 두말할 나위없이 하나님께 대한 사랑입니다. 왜 그런지 제가 설명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창조주이십니다. 생명의 주인이십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전지전능하신 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기까지 해서 우리를 구원해 주신 분이십니다.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주신 분이십니다. 더 이상 무슨 이유가 필요하겠습니까?

눅14:26절을 같이 보겠습니다.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보십시오. 심지어는 부모와 형제와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나의 제자가 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부모와 형제와 자매와 자기 목숨을 미월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다만 세상의그 어떤 소중한 것이라해도 하나님보다 우선이 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 인생이 가장 우선적으로 사랑해야 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물질이나 명예나 권력이나 부귀영화는 말할 것도 없고, 개 따위는 더더구나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는 부모나 친구나 남편이나 아내나 자신을 사랑하는 것보다도 우선 되어야 합니다. 마22:37~38절을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무엇이 가장 크고 첫째되는 계명이라고 하셨습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웃 사랑은 그 다음인 것입니다. 부모 형제 자식 이웃 그 누구라도 하나님보다 먼저 일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물론 모든 것을 사랑하되 올바른 사랑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최우선적으로 가장 크게 사랑해야 마땅한 하나님을 가장 먼저 가장 크게 사랑할 줄 아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고 주님 안에 있는 생명의 은총을 풍성히 누리는 복된 삶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면 좀더 구체적으로 왜 하나님을 가장 먼저 가장 크게 사랑해야 합니까?

2.여호와는 유일하신 참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제일순위에 두고 사랑하며 섬겨야 될 이유는 앞에서 이미 언급이 되었지만 그 분만이 유일하신 참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4,5절을 함게 보겠습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무슨 말씀입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는데 그러면 왜 그래야 하느냐?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최우선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며 그 말씀을 가르치고 지켜야 할 전제조건이며 이유이며 근거인 것입니다.

4절에서 우리는 세 단어를 주목해야 합니다.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다. 하나님, 여호와, 유일하신 이 단어입니다. 하나님은 신이라는 뜻으로 전능자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여호와는 스스로 있는 자라는 뜻으로 스스로 있다는 것은 존재의 근거가 타인에게 있지 않고 자기 자신 안에 있는 존재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유일하신 하나님 여호와라는 말씀은 오직 여호와 우리 하나님만이 유일하게 스스로 존재하시는 분으로 모든 우주만물의 근거가 되신다는 말씀입니다. 그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으로 모든 우주만물의 창조주로써 우리를 인도하시고 섭리하시고 역사하시는 그래서 우리 모두의 생명의 주인이 되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이런 전능하신 하나님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 한분뿐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직 유일하게 우리를 창조하시고, 인도하시고, 주관하시는 유일하신 하나님을 마음과 성품과 힘을 다하여 다른 무엇보다도 우선하여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안 그렇습니까? 하나님이 우주만물의 주권자이시며 생명의 근원이시며 구원자이신데 그 분보다 소중한 존재가 어디에 있겠으며, 그 분보다 사랑해야 할 존재가 무엇이겠으며, 그분보다 더 믿고 섬기고 공경하고 의지하고 따라가야 존재가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 모든 성도님들은 오직 유일한 창조주이시며,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만을 온전히 주인으로 모셔들이고 최우선적으로 그 분을 사랑하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오직 유일한 하나님의 아들로써 우리의 생명의 주인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모셔 들이고 마음과 정성을 다해 사랑하며 섬기며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진실로 모든 생명과 위로와 소망과 구원의 근원이신 하나님 안에서 참된 생명의 은총과 기쁨과 평강이 충만한 삶을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그 유일하신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해야 하겠습니까?

3.마음과 뜻과 힘을 다하여 사랑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오직 유일한 창조주이시며, 섭리자이시며, 생명의 주인이시므로 우리의 모든 것을 다 동원해서 사랑해야 합니다. 오늘 5절을 보겠습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어떻게 사랑하라고요?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마음을 다하여 사랑한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이것은 한마디로 전인격 즉 모든 영성과 생각과 감정과 의지를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쉽게 말하면 이런 것입니다. 남편이나 아내가 어떻게 서로를 사랑해야 합니까? 마음을 다해서 사랑해야 합니다. 자기 남편도 사랑하고 다른 남자도 사랑하면 안되는 것입니다. 남편은 다른 여자에게 한눈을 팔면 안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말은 세상과 하나님을 겸하여 사랑하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과 감정과 의지를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6:24절에서는 예수님은 말씀하신 것입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진정하고 완전하고 유일한 우리의 참된 주인이신 하나님께 충성을 다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또 뜻을 다하여 사랑하라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여기서 뜻이란 원어로 ‘영혼, 생명’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따라서 뜻을 다한다는 것은 생명을 바쳐서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마22:37절에서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린바와 같이 하나님은 우리의 생명의 주인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더더구나 죄로 말임아 영원한 형벌 가운데 처할 수 밖에 없던 인생을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하여 새로운 생명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생명은 이제는 나의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의 것이므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용해야 하는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내어 놓으라고 하면 언제라도 내어 놓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마10:39절에서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그 다음에 힘을 다하여 사랑하라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힘을 다한다는 것은 말 그대로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역량을 다 동원해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힘에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우선은 육체의 힘입니다. 육체가 가지고 있는 힘이 적든 크든 어쨌든 우리가 할 수 있는 대로 그 힘을 주님을 사랑하는 일에 사용하라는 것입니다. 또한 재능의 힘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공부를 잘하고, 어떤 이는 미술을 잘하고, 어떤 이는 음악적인 재능이 있습니다. 어떤 이는 운동을 잘하고, 어떤 사람은 리더십이 있습니다. 또 권력과 물질의 힘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권세가 있고, 어떤 사람은 돈이 많습니다. 이것도 큰 힘이 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모든 종류의 힘을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일에 사용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힘을 주님을 사랑하는 일에 사용해야 합니다. 물론 자기 자신이나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해서도 사용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우선하여 그 모든 힘을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에 동원하여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모든 힘을 주신 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본래부터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생명과 구원을 주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그러한 모든 힘들을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에 사용할 때에 그 힘이 자신과 남들에게 생명을 주고 기쁨을 주고 소망을 주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여러분의 마음과 성품과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세상의 다른 무엇을 사랑하는 것보다 가치있는 일입니다. 복된 일입니다. 아름다운 일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죽어가는 영혼들을 살리고 우리 모두에게 생명의 기쁨을 가져다주는 일입니다. 또한 그런 믿음으로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할 때 하나님은 너무너무 기쁜 마음으로 우리에게 더 큰 은혜로 채워주십니다. 은혜로 성령으로 기쁨으로 평강으로 사랑으로 백배천배만배로 갚아 주십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우리에게 주신 모든 것을 동원해서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고 주님 나라를 이루어가며 주님의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그런 사랑을 할 수 있습니까?

4.진정한 사랑은 예수님 안에서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가 이와 같이 정말 우리의 모든 것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는데 문제는 우리가 예수님 믿고 구원을 받긴 했지만 아직도 죄와 무지속에 있기 때문에 진정으로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기가 너무나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해서 못할 때가 너무나 많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에이 어차피 잘 안되는 것 공연히 속 끓이지 말고 포기하자 하면서 포기해야 합니까? 물론 그럴 수는 없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너무 슬퍼하고 안타까워하십니다. 주님의 나라를 이루어 갈 수가 없습니다. 나 자신이 생명의 은총을 온전히 누릴 수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여러분, 할 수 있는 길이 있습니다. 할 수 있기 때문에 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어떻게 할 수 있습니까? 간단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면 됩니다. 나는 할 수 없지만 예수님은 하십니다. 나는 무능하지만 예수님은 전능하십니다. 나는 무지하지만 예수님은 모든 지혜를 가지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내가 예수님 안에 예수님이 내 안에 계시면 가능해 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요15:5절에서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빌4:13에서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나는 할 수 없지만 주님은 하시기 때문에 주님 안에 들어가면 되는 것입니다. 주님이 나와함께 하시면 주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주님께 우리의 생각과 의지와 모든 것을 맡기면 주님께서 지혜와 능력과 사랑을 주셔서 가능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이 주시는 마음과 사랑과 지혜와 능력으로 주님과 자신과 가족과 이웃을 바르게 사랑할 수 있게 되고, 그러면 물론 주님 안에 있는 생명의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마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랑은 모두가 귀한 것이지만 그러나 사랑에도 우선순위가 있습니다. 사랑은 모두 아름다운 것이지만 그 중에서도 더 아름답고 더 귀한 사랑이 있습니다. 물론 가장 고귀하고 아름다운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우리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이야말로 가장 고귀하고 가장 아름다운 사랑입니다. 그리고 우리 인간의 사랑 중에서는 말할 것도 없이 우리의 창조주이시며, 우리의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죄와 사망과 지옥의 권세에서 건져주신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입니다. 이 사랑이 가장 큰 사랑이고 가장 고귀한 사랑이고 최고의 가치를 지니는 사랑입니다. 생명의 은총을 더욱 풍성하게 누리는 길이요, 천하보다 귀한 생명의 역사를 이루어가는 길입니다.

그러므로 이 놀라운 사랑을 받은 저와 여러분은 우리의 창조주이시며 생명의 주관자이신 하나님, 우리에게 모든 것을 공급해 주시는 하나님을 무엇보다도 먼저 사랑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영광의 보좌를 버리시고 낮고 천한 곳에 오셔서 온갖 모욕과 고통을 당하시고 마침내 십자가의 저주받은 죽음까지 당하셔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신 예수님을 다른 무엇보다도 우선적으로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되 반은 세상을 사랑하고, 나와 내 가족과 내가 즐겨하던 것을 먼저 사랑하고 그 나머지 찌끄레기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가장 먼저 가장 크게 가장 소중한 부분을 드려서 정말 마음과 뜻과 힘과 목숨을 다하여 사랑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고 주님의 생명의 역사를 힘있게 이루어가고 주님 안에 있는 그 놀랍고 풍성한 생명의 은총을 마음껏 누리며 살아가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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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예수님 안에 있는 진정한 자유

 

말씀 : 2:19~21

 

1.진리 안에서의 갈등

 

 

여러분,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때때로 마음이 무겁고 갈등과 고민이 생길 때가 있습니다. 심지어 어떤 초신자들은 공연히 교회에 나와서 마음이 편치 않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차라리 아예 하나님도 모르고 말씀도 듣지 않았더라면 부담없이 내 마음대로 내가 하고 싶은 일 하면서 살텐데 공연히 교회에 나와서 하나님 말씀 듣고 보니까 부담만 되고, 걱정이 되고, 갈등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 일을 잘 하지 못하는 것도 부담이 되고, 이웃을 섬기지 못해서 마음이 무겁고, 때로는 주일날도 가족들하고 어디 나들이나 다녀오고 싶은데 그것도 맘대로 못하고, 헌금생활 제대로 못하는 것도 마음이 무겁고 그렇다고 또 하자니 돈이 아깝고 그래서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갈등과 고민이 될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만약 여러분에게 이런 고민과 갈등이 있다면 그것은 긍정적이고 희망적인 현상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영혼의 감각이 살아나고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이런 고민과 갈등이 없다면 그 영혼은 완전히 죽어서 감각이 없는 영혼인 것입니다. 영혼이 죽은 사람은 죄와 무지 가운데 있는 육신이 시키는대로 살아가면 됩니다. 먹고 싶으면 먹고, 자고 싶으면 자고, 놀고 싶으면 놀고, 아무거나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며 살아가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갈등도 고민도 없는 것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도덕적 감각이 완전히 죽어 있는 사람은 어떻습니까? 도적질을 하고도 오늘 한건 했다며 먹고 마시고 즐깁니다. 사기꾼들은 사기 쳐서 돈을 빼앗고는 기분이 좋아서 낄낄 거립니다. 마약에 취한 사람은 죽어가는 줄도 모르고 좋다고 희희낙락합니다. 술에 취하면 죄를 짓는데 용감해 집니다. 왜 그렇습니까? 도덕성이 마비되어서 그런 것입니다. 양심이 죽어서 감각이 없는 것입니다. 죽은 사람은 때리고 차고 꼬집고 별짓을 다해도 아픈 줄을 모르는 것입니다. 영혼이 죽은 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섬기지도 않고 죄짓고 제멋대로 살아가면서도 고민이 없습니다. 희희낙락합니다. 제 마음대로 살아가면서 나는 자유하다, 평안하다며 정신 나간 소리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살아있는 것은 아픔이 있습니다. 양심이 살아있는 사람은 죄를 지으면 아픕니다. 조그마한 죄에도 통증을 느낍니다. 그러나 죽은 것은 아픔이 없습니다. 죄를 짓고도 뻔뻔합니다. 그래서 영혼과 정신이 살아있는 사람들에게는 갈등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알기 전에는 그저 육의 욕구를 따라 살면 되었지만 예수님 믿고 영혼이 살아나면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 위한 욕구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아직도 옛 자아가 남아서 자꾸만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살도록 충동질하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내가 주인이었기 때문에 내 맘대로 살면서 아무 갈등과 고민 없이 마음대로 살았지만 이제는 새주인이신 예수님을 모셔들이고 예수님이 이끄시는대로 살아가려고 하는데 아직까지도 내가 주인 노릇하던 그 행세가 남아 있어서 자꾸만 육의 욕망을 따라 가려고 할 때가 많기 때문에 우리 안에서 계속해서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에서 진리 때문에 겪는 고민과 갈등이 있다면 그것은 긍정적이고 희망적인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영혼이 살아나고 있다는 증거요, 진리에 대한 갈증이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런 갈등과 고민이 우리를 더욱 하나님 앞에 세움으로 성화의 길을 가게 하고 하나님 안에 있는 생명의 은총을 좀 더 풍성하게 누리게 하는 긍정적인 에너지로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고후7:10절에서는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자신을 죄인 중의 괴수라고 하였지만 그 죄인중에 괴수라는 인식이 자신을 더욱 하나님 앞에 가까이 세우게 함으로써 인류역사상 가장 위대한 역사를 이루었던 신앙인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신앙생활하면서 진리 때문에 겪는 갈등과 고민이 있을 때, 내가 정말 너무 부족하고 미련하고 죄많은 인생이라고 생각될 때, 하나님께 너무 죄송스럽고 마음에 부담이 되고 갈등이 생길 때 너무 낙심하고 탄식하고 자책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자책하고 탄식하고 낙심하는 것은 오히려 우리를 더 주저앉힐 뿐입니다. 힘을 빼놓고 무기력하게 만들 뿐입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 방법은 하납니다. 주님 앞에 엎드려 구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그러한 연약함과 부족함을 인정하고 그래서 갈등과 고민이 있을 수 밖에 없음을 인정하고 주님 앞에 엎드려 구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좋으신 하나님, 은혜의 하나님, 능력의 하나님께서 힘주시고 은혜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점점 성화되어가고 그러면 점차 그런 갈등과 고민도 최소화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런 고민과 갈등보다는 성령께서 주시는 자유와 평안과 위로와 소망이 훨씬 크기 때문에 감사와 기쁨과 은혜와 평안과 소망과 참 자유가운데 할렐루야 찬양하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에게 이런 은혜가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하면 좀 더 성화되어 주님과의 갈등을 최소화시켜 주님의 은혜들을 풍성하게 누릴 수 있을까요?

 

2.속사람을 강하게 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갈등과 고민을 이기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우리를 그렇게 고민과 갈등과 죄속으로 몰아가는 옛자아를 이기는 것입니다. 그러면 옛자아를 이기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하나님께서 주시는 속사람을 강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옛자아보다 새 자아가 힘이 훨씬 세면 우리는 옛자아에게 질질 끌려다니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새자아보다 옛자아가 힘이 세면 옛자아에게 질질 끌려다니니까 우리의 삶이 엉망이 되는 것입니다.

 

한 인디언 노인이 손자에게 말했었습니다. “얘야, 사람의 마음속에는 늘 두 마리의 늑대가 싸우고 있단다. 한 마리는 악마 같은 놈으로 늘 거짓과 미움과 도적질과 향락과 음란과 분노와 질투와 탐욕과 교만 등의 악한 모습으로 나타나 우리를 나쁜 길로 내몰려고 하고, 다른 한 마리는 착한 늑대로써 믿음과 사랑과 기쁨과 평화와 희망과 친절과 선함과 겸손과 진실과 용서 쪽으로 우리를 끌고 가려고 하지.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이와 같이 나쁜 늑대와 좋은 늑대가 들어 있어서 끊임없이 싸우고 있단다.”

 

그러자 손자가 물었습니다. “할아버지, 그러면 좋은 늑대와 나쁜 늑대가 싸우면 누가 이기나요?” 그러자 할아버지가 말했습니다. “그야 사람이 먹이를 주는 늑대가 이기지!” 그러니까 나쁜 늑대에게 먹이를 주면 나쁜 늑대가 힘이 세져서 이기고, 좋은 늑대에게 먹이를 주면 좋은 늑대가 힘을 얻어서 나쁜 늑대를 굴복시킨다는 것이지요. 힘이 센 놈이 이기는 것은 당연한 거지요.

 

여러분, 그렇습니다. 예수님 믿고 예수님을 새 주인으로 모셔들이더라도 지금까지 우리를 완전히 지배해왔던 이 나쁜 늑대인 옛자아가 완전히 물러가지 않아서 자꾸만 새자아에게 도전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나쁜 늑대인 옛자아를 물리쳐야 하는 것입니다. 이 나쁜 옛자아를 이기려면 새자아를 강하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엡3:16절에서는 그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오며...” 속 사람을 강건케 하라. 그래야 너희가 세상의 모든 죄와 유혹과 왜곡된 사상들을 이긴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나쁜 늑대의 힘을 약하게 만들고, 좋은 늑대를 힘이 강하게 할 수 있습니까? 여러분, 육체를 강건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육신에 필요한 영양분을 듬뿍 공급하고 열심히 운동을 하면 됩니다.

 

영혼의 강건함도 동일합니다. 영적인 좋은 양식을 충분히 섭취하고 영적으로 열심히 훈련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나쁜 늑대인 옛 자아에게는 먹이를 주지 말고, 좋은 늑대에게만 먹이를 주고 그 좋은 늑대가 열심히 움직이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나쁜 늑대는 점점 힘을 못쓰게 되고, 완전히 먹이를 끊어 버리면 굶어 죽게 되는 것입니다. 반면에 좋은 늑대인 새자아에게는 영양가 있는 풍성한 양식을 충분하게 공급해 주면 살이찌고 생명력이 풍성해지고 힘이 세지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양식만 주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영양가 있는 양식을 듬뿍주고 열심히 운동을 시켜야 근육이 튼튼해져 힘이 세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새자아에게 영양가 있는 음식을 듬뿍 공급하고 열심히 운동을 시키면 힘이 세져 바짝 말라서 힘없는 옛자아 따위는 단숨에 때려 눕힐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나쁜 늑대에게 주는 먹이는 무엇이고, 좋은 늑대에게 주는 먹이는 무엇입니까? 물론 영적, 정신적 양식입니다. 나쁜 늑대에게 주는 먹이는 이런 것들입니다. 맨날 싸우고 죽이고 빼앗는 폭력적인 오락을 즐기거나 그런 폭력적이고 음란한 영화를 보고, 술집이나 도박장을 기웃거리고, 거짓되고 속되고 우상숭배와 저속하고 더러운 말을 일삼는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 등이 모두 못된 늑대가 좋아하는 먹이인 것입니다.

 

반대로 책을 읽어도 건전한 교양도서를 읽고, 아름다운 사랑과 올바른 가치관을 심어줄수 있는 영화를 보고, 믿음의 사람들, 선한 사람들, 진실한 사람들을 가까이 하는 것은 좋은 늑대에게 먹이를 주는 것입니다. 물론 가장 확실한 영혼의 양식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생명의 말씀, 진리의 말씀, 은혜의 말씀을 읽고 듣고 묵상하는 것은 우리 영혼을 살리는 확실한 양식입니다. 기도하며 찬양하며 믿음 안에서 아름답게 교제하는 것도 우리 영혼을 살찌게 하고 아름답게 하고 생명력이 넘치게 하는 귀한 양식인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교회를 섬기고 이웃을 섬기고 전도를 하고 이웃을 돕고 선을 행하는 것은 좋은 늑대를 열심히 운동을 시키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의 양식을 먹고, 세상에서도 아름답고 선한 것들을 가까이하고 하나님의 거룩한 역사에 참여하며 선을 행하는 일에 참여하는 것이 바로 좋은 늑대에 양식을 풍성하게 공급하고 열심히 운동을 시키는 일인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사람들은 100% 확실하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난 자아가 옛자아를 이겨 거룩하고 아름답고 복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반대로 자꾸만 옛자아에게 먹이를 주고 새자아는 거의 굶다시피 한다면 보나마나 옛자아가 새자아보다 힘이 세니까 옛자아에게 져서 질질 끌려다니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6:55절에서는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그랬습니다. 예수님이 생명의 양식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생명의 생수인 것입니다. 예수님을 온전히 우리 심령에 모셔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말씀으로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말씀을 끊임없이 묵상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걸 잘 안하니까 영양실조에 걸려 새자아가 맥을 못추는 것입니다. 자꾸만 세상의 헛된 양식만을 사모하며 그것만을 쫓아다니니까 옛자아는 기세등등하고, 새자아는 빈약하기 짝이 없어 옛자아 앞에서 기도 못펴고 초라한 모습으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너무나 잘 아시는 시편1:1-3절에서는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열심히 양식을 잡수시기 바랍니다. 억지로라도 잡수시기 바랍니다. 살기 위해서 잡수시기 바랍니다. 밥맛이 없을 때 살기 위해서라도, 힘을 내기 위해서라도 억지로 먹어야 하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억지로라도 먹고 영적인 운동을 열심히 하시기 바랍니다. 몸을 안 움직이면 몸이 자꾸 약해집니다. 아예 안 움직이면 온 몸이 굳어서 꼼짝도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움직이기 싫어도 자꾸 움직여야 합니다. 운동하기 힘들고 귀찮아도 자꾸 운동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 몸이 힘을 쓰는 것입니다.

 

새 자아도 그렇습니다. 억지로라도 먹어야 합니다. 귀찮아도 먹어야 합니다. 힘들어도 영적인 활동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 새자아가 강해집니다. 힘이 세집니다. 그래서 옛자아를 이깁니다. 그러므로 영적인 양식, 생명의 양식을 열심히 먹고, 열심히 영적인 활동을 함으로 말미암아 여러분 속에 있는 새 자아, 영혼, 좋은 늑대가 토실토실 살이찌고 강건해지고 생명력이 넘침으로 끊임없이 우리에게 도전해오는 옛자아를 단숨에 눕혀 버리고 승리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예수님을 완전한 주인으로 모셔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속사람을 강건케하여 옛자아를 제압하기 위해서는 앞에서 말씀드린대로 생명의 말씀, 진리의 말씀을 듣고 선하고 좋고 아름다운 것을 보고, 하나님의 거룩한 역사에 열심히 참여해야 하는데 그러면 우리 가운데 나타나는 변화가 무엇입니까? 바로 그런 과정에서 예수님이 내안에 온전히 들어오시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살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그런 지혜와 능력과 은혜를 달라고 사모하는 마음으로 주님 앞에 세울 때 성령께서 역사하시고, 성령께서 역사하시면 드디어 예수님이 완전히 우리 가운데 들어오시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내 안에 거하시면서 우리를 이끌어 가시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깨달음을 주시고, 볼 수 있는 눈을 주시고, 들을 수 있는 귀를 주시고, 믿음을 주시고, 지혜를 주시고, 능력을 주시고, 은혜를 주셔서 진리가운데 살 수 있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옛자아란 놈이 감히 준동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악바리 같은 옛자아가 대들긴 하겠지만 그러나 한방에 K.O. 시켜 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옛자아가 우리 가운데 온갖 유혹과 정욕과 탐심을 불러 일으켜 우리를 넘어뜨리려고 하고 협박도 하지만 예수님이 우리의 주인이 되셔서 우리를 지키시고 인도하시면 옛자아는 이빨도 빠지고 발톱도 빠지고 힘도 다 빠져버린 호랑이에 불과한 것입니다. 이빨도 발톱고 힘도 다 빠져 버린 호랑이는 무늬만 호랑이지 실상은 호랑이가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더 이상 이런 나쁜 늑대, 나쁜 호랑이에게 끌려다니지 않고 그런 것들을 물리쳐 승리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바로 그런 삶을 살았기에 승리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주님을 온전히 그의 심령속에 모셔 들여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의식을 가지고 살았을 때에 모든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과 도전과 유혹과 핍박과 환난과 고난을 이기고 생명의 역사를 이루어갔던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20절에서 그는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나는 죽었다. 오직 내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다. 내가 이 육신을 가지고 살아있는 것은 오직 믿음 안에서 즉 믿음을 따라서, 말씀을 따라서, 주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산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주인이 되셔서 완전히 그를 사로 잡았기 때문에 주인이신 주님만을 위해서 살 수 밖에 없는 인생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이런 사람에게는 옛자아가 더 이상 준동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 모든 역경속에서도 주님의 은혜가 내게 족하다고 하면서 항상 기뻐하며 감사하며 승리의 삶을 살아갈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마칩니다. 여러분에게 신앙적 갈등과 고민이 있습니까? 마음이 무거울 때가 있습니까? 희망적 징조입니다. 무언가 영혼이 살아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므로 낙심하거나 절망하지 마십시오. 그렇다고 거기에 안주하지도 마십시오. 주님 앞에 엎드리십시오. 조금 더 힘을 내어 여러분의 거듭난 자아에게 양식을 듬뿍 공급하십시오. 영적인 활동을 조금 더 활발하게 하십시오.

 

그러면 예수님이 여러분의 주인이 될 것입니다. 힘 주시고 은혜 주시고 능력 주실 것입니다. 여러분의 새자아가 힘을 얻게 될 것입니다. 생명력이 넘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여러분의 새자아가 옛자아를 확실히 제압하고 예수님 안에 있는 진정한 자유와 기쁨과 평안과 은혜를 온전히 누리는 복된 삶이 될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에게 이런 삶이 있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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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월 첫째주일낮예배설교 / 믿음과 순종과 축복 (September,Sunday Sermon)


말씀 : 창22:9~14

제목 : 믿음과 순종과 축복

1.믿음과 순종과 축복

믿음이 있는 곳에 순종이 있고, 순종이 있는 곳에 축복이 있다. 여러분, 맞는 말입니까? 예, 맞는 말입니다. 안 그래요? 믿음이 있으면 순종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있지요. 있고말고요. 아니 믿는데 순종이 없을 수 있습니까? 안 그래요? 좋으신 하나님, 은혜의 하나님, 능력의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 구원의 하나님을 믿는데 어찌 순종이 없겠느냐는 말씀입니다.

또 순종이 있는 곳에 축복이 있다. 이것도 마찬가지잖아요. 순종하는 복이 안 오면 그게 이상한 거지요. 능력의 하나님, 은혜의 하나님, 축복의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데 어찌 복이 없겠습니까? 여러분, 신28:2절 보세요.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이르리니....”라고 말씀하고 있잖아요. 그러면서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 네 몸의 자녀와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짐승의 새끼와 소와 양의 새끼가 복을 받을 것이며....’ 하시면서 오만가지 복을 다 주실 것을 말씀하고 있잖아요. 여러분, 하나님이 뭐 허튼소리 하시는 분이 아니시지 않습니까?

그래서 진실로 믿음으로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았던 사람들은 영원한 영광의 나라는 물론 지금 여기서고 많은 복을 받았습니다. 그 중에 한 사람이 오늘 말씀에 나오는 아브라함인데요, 오늘 말씀은 여러분이 너무 많이 들어서 식상하실지 모르겠지만 그러나 어떻습니까? 귀가 따갑도록 들었는데 잘 됩니까? 잘 안되지요. 왜요? 귀가 따갑도록 들었지만 실상은 그래봤자 얼마나 안 되기 때문입니다. 안 그래요? 이 이야기 들어봤자 몇 번 들었습니까? 한 백번 들었을까요? 그런데 세상에서 정치이야기, 경제이야기, 먹고 마시고 놀고 즐기며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는 몇 번 쯤 들었을까요? 한 천 번 들었을까요? 만 번도 더 들었을걸요. 그러니까 믿음 안에서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아가는 이야기는 아무리 많이 해도 세상에서 먹고 입고 잠자고 놀고 하는 이야기의 백분의 일, 천분의 일도 못 듣고 못 보는 거예요. 그러니 잘 안 되는 건 어쩌면 당연하지요. 그러면 안 되는 게 당연하다고 가만히 있을 겁니까? 아니죠. 그러므로 더욱 말씀을 듣고 기도하는 일에 힘써야 하지요. 그래야 조금이라도 기독교적 가치관이 확립되고 그래야 조금이라도 더 그러한 삶을 살아가고 그래야 조금이라도 하늘의 신령한 은혜와 땅의 기름진 축복을 누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오늘 본문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인간적으로는 말도 안되는 명령을 내리십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아브라함의 독자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다 읽어드리지 못했지만 2절 말씀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아브라함에게 아들 이삭을 번제물로 삼아 각을 뜨고, 불에 태워 하나님께 바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게 말이 됩니까? 인신제사는 우상숭배자들이 하는 악습으로 하나님이 가장 미워하시는 일입니다. 게다가 이삭은 하나님께서 큰 민족을 이루게 해 주겠다고 약속하시고 무려 25년 만에 달랑 하나 주신 약속의 자녀입니다. 하나님의 약속대로 장차 큰 민족을 이루고 주께 영광을 돌려야 하는 아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이삭을 잡아 불에 태워 번제물로 바치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게 말이나 되느냐 말입니다.

아마도 아브라함도 처음에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게 정말 하나님의 말씀일까? 이삭은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의 자녀가 아닌가? 그것도 아이를 도저히 낳을 수 없는 100세나 되어서 기적적으로 주신 아들이 아닌가? 하나님께서 나에게 큰 민족을 이루게 해 주겠다고 약속하시지 않았는가? 큰 민족을 이루려면 오히려 더 많은 자식을 주셔야 하는데 겨우 하나밖에 없는 자식을 불에 태워 인신제사로 드리라니 내가 늙어서 헛소리를 들었나? 망령이라도 들었나? 하고 말입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아브라함은 인간적으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고 받아들일 수도 없고 말도 안되는 명령에 순종합니다. 왜요? 그게 하나님의 명령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분명 선하신 하나님, 능력의 하나님, 은혜의 하나님이라는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내가 생각하기에는 분명 말도 안되지만 분명 뭔가 하나님의 섭리와 뜻과 계획이 있을 것을 믿었기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여기서 우리가 먼저 생각할 것은 하나님의 말씀은 언제나 우리의 이성으로 다 수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섭리는 언제나 우리 보다 높고 깊어서 우리가 다 이해하지 못할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모든 이성과 경험과 능력을 초월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안 그렇습니까?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이성적으로 이해가 됩니까? 예수께서 사망권세를 깨트리시고 부활하셨다. 경험적으로 납득이 갑니까? 저 영원한 천국, 이것이 인간의 논리와 과학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까? 여러분, 오해하지 마십시오. 착각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을 이성적으로 믿으려고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모든 이성과 과학과 논리를 초월하시는 분이십니다. 아니 그런 것들을 창조하신 분이십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 모든 것을 내려놓고 이해가 되든 말든 납득이 되든 말든 순종할 것 뿐입니다. 아브라함이 만약 조금이라도 이성이나 논리를 가지고 생각했더라면 절대로 이삭을 바칠 수 없었습니다. 오히려 아니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인신제사를 드리지 말라고 하신 하나님이 어떻게 그런 명령을 내리실 수 있습니까? 어떻게 내 자손을 하늘의 별과 같이 땅의 티끌과 같이 많게 해주시겠다고 해놓고 25년 만에 겨우 아들 하나 주어놓고 그걸 도로 달라고 하십니까? 하면서 따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런 자신의 모든 생각들을 다 내려놓고 오직 하나님의 주권과 선하심과 인도하심을 믿고 순종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이게 바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취해야 할 태도인 것입니다. 이해가 가든 안가든 하나님의 말씀을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의 죄와 무지를 인정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높으심과 인도하심과 선하심을 인정해야 합니다. 언제나 내 뜻과 이성과 경험과 논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수용하고 따라야 합니다. 그래서 잠3:5,6절에서는 말씀합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이해가 되든 말든, 세상의 가치와 같든 다르든, 내 경험과 맞든 안 맞든, 손해가 되든 유익이 되든, 내 생각과 관계없이 인정하고 따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정 하나님을 따르는 자들의 태도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내 모든 생각과 경험과 환경을 떠나서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십시오. 오직 온전한 길이며 진리며 생명이신 예수님의 뜻에 온전히 순복하십시오. 그저 갓난아이와 같이 주님의 말씀을 따라 주님과 동행하십시오. 그때에 분명 주님 안에 있는 은혜의 풍성함이 여러분과 함께 하실 것입니다.

2.온전한 순종

여러분, 그렇습니다. 아브라함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명령이었지만 말씀에 순종합니다. 창22:3,4절 보세요.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종과 그의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이 자기에게 일러 주신 곳으로 가더니 / 제삼일에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그 곳을 멀리 바라본지라.”

여러분, 이 말씀을 보십시오. 그는 아침 일찍 떠났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솔직히 무언가 하나님의 섭리가 있을 것임을 믿었지만 밤새도록 얼마나 고민을 했겠습니까? 아무리 믿음이 좋아도 아들을 잡아서 번제로 드리라는데 그 심정이 어떠했겠습니까? 그러나 아브라함은 날이 밝자마다 곧장 시행에 들어간 것입니다. 아내 사라에게 말도 없이 떠났습니다. 아내에게 말했다가 보나마나 이 양반이 나이가 들더니 드디어 망령이 들었냐고 하면서 핀잔만 들을 것이 뻔했기 때문에 아내에게 말도 하지 않고 떠난 것입니다. 그리고 솔직히 자신도 시간을 지체하다간 아들을 번제로 드릴 자신이 없었기에 마음 변하기 전에, 마귀가 틈타기 전에 떠난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여기서 한가지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명령은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즉시 시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시행하고 그 뜻대로 살아가는 일을 뒤로 미루면 안됩니다. 어떤 사람은 계속 나중에 나중에 그럽니다. 이것만 해 놓고, 저것만 해결하고...... 나중에 생활이 안정되면, 나중에 시간 나면, 나중에 할 일 없어지면... 그러나 여러분, 지금 못하는 사람이 나중에 여유 생기면 할 수 있을 것 같죠? 그런 사람은 99%는 여유생기면 놀러 다닙니다. 여유돈 있으면 세상에서 먹고 마시고 즐기는데 쓰게 됩니다. 설령 나중에 한다 해도 지금 못한 것은 죽을 때까지 아니 천국에 가서 까지 못한 것으로 계속 남아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마귀가 장난칩니다. 마음이 변하기 쉽습니다. 방해꾼이 생기기 쉽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아침 일찍 길을 떠나 사흘 동안 걸어 하나님이 지시하는 곳으로 걸어갑니다. 여러분, 그 사흘길을 걸어오는 동안 아브라함의 심정이 어떠했겠습니까? 아무리 하나님의 무슨 뜻이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고, 그래서 길을 떠나오긴 했지만 그래도 사랑하는 외아들을 자기 손으로 잡아 불에 태워서 번제로 드려야 한다는 것을 생각할 때 그 마음이 과연 어떠했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마음을 다잡으며 발걸음은 재촉합니다. 이삭을 잡아 번제로 드릴 것을 생각하면 마음이 천갈래 만갈래 찢어지는 듯 아팠지만 그는 묵묵히 발걸음을 재촉했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하나님께서 지시한 산 밑에 이르러 종들을 거기 머물라고 하면서 번제에 쓸 나무를 아들의 등에 지우고, 자기는 칼과 불을 들고 산을 오르기 시작합니다. 그때 이삭은 이상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번제를 드리려면 제물이 있어야 하는데 이상하게 제물이 없는 겁니다. 그래서 아버지에게 묻습니다. ‘아버지, 나무와 불은 있는데 제물은 어디 있습니까?’

여러분, 이 말을 듣는 순간 아브라함의 마음이 얼마나 뜨끔했겠습니까? 차마 ‘네가 바로 번제물이다. 하나님께서는 너를 번제로 드리라고 하셨단다. 나도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이지만 하나님께서 너를 제물로 바치라고 하셨단다. 그러니 나로서도 어쩔 수가 없구나.’ 차마 이렇게 말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예비해 주실 거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묵묵히 산에 올라 드디어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곳에 도착하게 되고, 아브라함은 번제를 드릴 준비를 합니다. 장작을 쌓아 올렸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제물을 잡아서 각을 떠서 장작더미에 올려놓고 태워야 할 차례였습니다. 그 번제물은 다름 아닌 사랑하는 아들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떨리는 목소리로 아들에게 말합니다. ‘아들아, 하나님께서 너를 번제로 드리라는구나. 내가 너를 대신해서 번제가 될 수만 있다면, 내가 너를 대신해서 죽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니? 그러나 내가 아닌 너를 요구하시는구나. 그러나 사랑하는 아들아 분명히 하나님의 뜻이 있을 거야. 그러니 순종해야지.’ 하면서 아들을 결박합니다. 그 운명의 순간에 하늘이 무너지고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과 아픔이 몰려 왔습니다. 그러나 해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떨리는 손으로 아들을 붙잡아 결박하고 장작더미 위에 올려놓았습니다. 그리고 아들을 죽이려고 눈을 감고 칼을 높이 들어 올렸습니다.

여러분, 그 상황을 상상해 보십시오. 아들을 제물로 바치기 위해 결박하는 아버지의 심정. 아들을 장작더미위에 올려 놓고 칼을 높이 들어 올린 아버지의 심정, 정말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들 이삭, 그것도 하나 밖에 없었던 아들 이삭, 차라리 내가 너를 대신해서 결박 당할수만 있다면.... 내가 너를 대신하여 번제물이 될 수만 있다면... 차라리 내가 너를 대신해서 죽을 수만 있다면... 차라리 내가 너를 대신해서 불 태워 질수만 있다면.... 이런 마음으로 이삭 대신 자신이 번제물이 되고 싶었지만 하나님이 요구하는 건 자신이 아니라 이삭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무슨 선한 뜻이 있을 것이기에, 하나님의 말씀이니 거역할 수 없었기에 가슴을 도려내는 듯한 아픔속에서 도저히 눈뜨고는 할 수 없는 일이었기 눈을 감고 아들을 향해 칼을 내리치려고 하였습니다.

여러분, 이게 순종입니다. 내 생각과 달라도, 도저히 이해가 안가도, 있을 수 없는 일을 시켜도 그냥 따르는 것이 순종입니다. 아무리 내 생명과도 바꿀 수 없는 귀한 것이라도 하나님이 필요로 하신다면 그냥 드리는 것이 순종입니다. 이것이 믿음이고 이것이 순종입니다. 그래서 순종하는 자에게 주님의 은총이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게 믿음이고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인정이며 하나님께 대한 신뢰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주님을 믿습니까? 주님의 선하심을 믿습니까? 구원자이심을 믿습니까?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상황이 이래요. 형편이 이래요. 저래요. 이래서 곤란해요. 저래서 곤란해요. 그럼 내가 손해봐요. 웃음거리 돼요. 주일날 하루 쉬면 손해가 얼만지 아세요? 아니 이 귀한 걸 달라고요? 그럼 난 어떻게 살라고요? 여러분, 이런 거 다 버리세요. 그냥 믿고 따르세요. 순종하세요. 그게 믿음입니다. 그런 믿음의 사람에게 주님의 한량없는 은총이 임합니다. 저와 여러분에게 이런 은혜가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순종하는 자에게 임할 복

여러분, 그렇습니다. 순종이 곧 온전한 믿음이기에 순종하는 자에게 주님의 놀라우신 은총이 임합니다. 보십시오. 아브라함이 이삭을 내리치려고 할 때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창22:11,12절을 같이 보겠습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그를 불러 이르시되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시는지라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 사자가 이르시되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이삭을 바치라고 하시던 하나님께서 도리어 다급하게 아브라함을 제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니 너 정말로 이삭을 잡으려는 것이냐? 내가 정말 이삭을 죽여서 번제로 받기를 원하는지 아니냐? 아니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나는 네 믿음을 보고 싶었단다. 이제 충분하다. 그 믿음이면 충분하다. 너는 정녕 믿음의 조상이 될 만한 자격이 있다. 그러니 이삭을 풀어주고 내가 너를 위해 준비한 양으로 번제를 드리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아브라함은 아들을 풀어주고 옆에 뿔이 나무에 걸려 꼼짝 못하고 있는 양을 가져다가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이삭이 아닌 양으로 제사를 모두 마쳤을 때 다시금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창22:16,17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도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

여러분,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 요구했던 것은 이삭이 아니라 믿음이었습니다. 순종이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독자 이삭을 빼앗아가려고 했겠습니까? 왜 말도 안되는 인신제사를 드리라고 했겠습니까? 그게 아니라 믿음과 순종을 요구하셨고 그 믿음과 순종이 있는 자에게 임할 하나님의 은총을 그렇게 보여 주셨던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믿음이 있으면 순종하게 되고, 순종하는 자에게는 축복해 주십니다. 왜냐하면 순종이 곧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순종이 하나님께 대한 신뢰이기 때문입니다. 순종이 곧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신앙의 고백이기 때문입니다. 순종이 하나님의 나의 주인이라는 종의 고백이기 때문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종이 주인에게 따질 수 있습니까? 우매 자가 지혜 자에게 따질 수 있습니까? 피조물이 창조주에게 왜 그래야 하느냐고 따질 수 있습니까? 죄인이 구세주에게 이러니저러니 말할 수 있습니까? 여러분, 믿음과 순종은 별개의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믿음이요, 진정 주님만이 생명의 주님이시오, 구원자시오, 주권자라는 믿음이 있다면 순종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순종이 곧 믿음이요, 그래서 순종하는 자에게 복이 임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이러한 순종의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때로는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아도, 현실적으로 도저히 받아들이기 어려워도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가장 소중한 것을 달라고 하셔도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결코 빼앗으려는 것이 아니라 주시려고 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온전히 주인으로 모시고 우리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순종하실 때에 좋으신 하나님, 선하신 하나님, 능력의 하나님, 구원의 하나님께서 우리가 상상하지 못한 좋은 것으로 채워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정말 우리의 모든 생각 지식 경험 이성 가치관 나 내려놓고 순종하심으로 주님께서 채워 주시는 영육간의 풍성한 은혜를 마음껏 받아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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