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 새벽 기도회 설교] 십자가 정신 (Special Dawn Prayer Meeting)
십자가 정신
베드로전서 2:18~25
기독교 진리의 핵심은 십자가입니다. 기독교에서 십자가가 빠지면 타종교와 별 다를 바가 없습니다. 기독교를 타종교와 명확한 선을 긋게 하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주님이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산에 올라가셔서 기도하시다가 변화되신 사건을 변화산 사건이라고 합니다. 주님에게서 광채가 나고 주님의 옷은 세상에서 빨래하는 사람들이 희게 할 수 없을 정도로 하얗게 변화되었습니다. 그리고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서 주님과 대화를 나누었는데 그 대화의 내용이 주님의 별세 즉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실 것을 이야기 했습니다. 그 만큼 십자가가 중요한 것입니다.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는 "성경을 쥐어짜면 피가 나온다"고 했습니다. 구약에서는 짐승의 피가 흐르고, 신약에서는 예수님의 피가 흐릅니다. 구약은 양의 피로 충만하고 신약은 예수님의 피로 충만합니다. 십자가가 성경 진리의 핵심입니다.
본문은 그 당시 주인의 학대 속에서 고통당하던 종들을 위로하는 내용입니다. 바울은 종들이 당하는 고난을 통해서 주님의 고난에 관한 내용을 끄집어내서 주님이 당하신 고난을 말하면서 그 고난이 주는 의미를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주님의 고난의 의미를 들여다보며 십자가 정신을 생각 하도록 하겠습니다. 주님의 고난은 믿는 자들에게 본을 보이는 고난입니다. 21절에 보면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주님은 우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셨고 우리에게 고난의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주님은 믿는 자들에게 모델이 되셔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본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들은 십자가의 고난은 피하고 부활의 영광만을 받으려고 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부활의 영광의 본을 보여주시기 전에 십자가의 고난의 본을 먼저 보여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본을 따라 가기만 하면 세상은 더욱 아름답게 변할 것이며, 더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섬기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본을 따라가지 못하기 때문에 세상은 주님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인도의 '간디'가 하루는 가장 친한 친구로부터 “왜 너는 예수님을 존경한다고 하면서 믿지 않느냐?”는 질문을 받았습니다. 간디는 그 친구의 질문에 “만약 예수님을 올바로 따르는 신앙인이 한 사람이라도 있으면, 내가 예수님을 믿는 것을 고려해 보겠다”라고 했답니다. 간디 주변에 있던 그리스도인들 중에 간디에게 주님을 따르는 본을 보여준 사람이 없기 때문에 간디는 기독교인이 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간디가 영국에서 유학생활을 할 때 하숙집 주인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간디에게 전혀 본이 되지 못한 삶을 살았습니다. 만약 하숙집 주인이 간디에게 예수님을 따르는 본을 보여주셨다면 간디가 예수님을 믿게 되었을 것이고 그 결과 인도에서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나올 수 있었을 것입니다.
중국의 모택동 역시 젊었을 때 미국으로 건너가서 공부를 했습니다. 그는 두 가지에 관심을 기울였다고 하는데, 하나는 기독교요, 다른 하나는 서구 문물입니다. 그런데 미국에 있는 동안 기독교인들에게 대단히 실망해서 기독교인이 되는 것을 포기하고 공산주의에 빠져서 중국을 공산화 시켰다고 합니다. 그의 주변에도 주님을 따르는 본을 보여주는 사람들이 없었던 것입니다.
주님이 십자가를 지실 때 주님과 관련된 여러 종류의 사람들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 사람들을 중심으로 몇 그룹의 사람들로 나눠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가룟 유다 그룹이 있습니다. 유다는 주님의 제자로 부름을 받았으며, 돈궤를 맡을 정도로 신임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돈에 눈이 어두워 노예의 몸값인 은 삼십에 선생을 판 자입니다. 재물에 눈이 어두워 살고 있다면 가룟 유다 그룹에 속합니다. 여러분도 혹시 세상 재물에 눈이 어두워 예수를 등지고 살지는 않습니까?
본디오 빌라도 그룹입니다. 빌라도는 세속적인 인기와 명예와 권세를 잃을 것이 두려워서 죄가 없으신 주님을 십자가에 처형하도록 명령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권세를 지키기 위하여 생명의 주를 못 박은 것입니다. 누구든지 권력에 눈이 어두워 살고 있다면 이 그룹에 속합니다.
구레네 시몬 그룹입니다. 그는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주님을 구경하다가 로마 병정에 의해서 억지로 십자가를 지게 되었습니다. 억지로 지고가는 십자가에는 기쁨과 즐거움과 감격이 없습니다. 하지만 억지로라도 십자가를 지고 간 것은 놀라운 축복입니다. 그때에는 재수 없는 일을 만난 줄 알았는데 나중에 보니 그것이 복이었습니다. 롬 16:13에 보면 구레네 시몬의 가족은 사도 바울이 인정할 정도로 귀한 가정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역사적으로 구레네 시몬의 12대 후손이 로마의 황제 콘스탄틴 대제입니다. 콘스탄틴 대제가 기독교를 공인한 사람입니다. 얼마나 축복된 일입니까? 억지로라도 십자가를 지고 나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그 열매를 주실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 그룹입니다. 평안할 때는 주님을 위하여 목숨이라도 바칠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막상 고난의 현장에서는 주님을 부인하고 십자가의 현장에는 나타나지도 않았습니다. 고난은 회피하고 영광만 추구하는 신앙입니다. 모든 일에 앞장서는 것 같으나 헌신의 자리에는 나타나지도 않는 사람입니다.
사도요한 그룹입니다. 주님을 향한 뜨거운 사랑 때문에 십자가의 현장도 떠나지 않는 사람입니다. 목숨이라도 드려서 주님을 섬기는 사람입니다. 주님을 위해서는 죽음도 감수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사도요한처럼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을 위하여 목숨이라도 내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기독교 역사를 보면 주님을 따르기 위하여 스스로 육체적인 고통을 선택한 분들이 있습니다. 중세의 수도사들이 대표적인 예가 될 것입니다. 중세의 수도사들에게 영향을 가장 많이 준 사람이 토마스 아켐퍼스입니다. 그가 쓴 「그리스도를 본받아」라는 책은 성경 다음으로 많이 팔린 책이라고 합니다. [그리스도를 본받아]의 내용은 주로 자신을 너무 믿지 말고 이 세상의 유혹과 위험으로부터 피하라는 것, 자신을 바로 아는 지식이 있어야 한다는 것, 자신에 대한 계속적인 비판이 필요하다는 것,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이 추구해야 할 덕목들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는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님의 삶을 그대로 모방하는 것을 최고의 미덕으로 여기라고 말합니다. 그의 영향을 받고 「걸식교단(mendicant order)」이라는 것이 생겨났습니다. 결식교단의 대표적인 인물은 프란시스입니다. 프란시스 같은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집이나 아내나 형제나 부모나 자녀를 버린 자는 영생을 얻으리라.”는 말씀을 문자적으로 따라서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버렸습니다. 그리고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이나 가지지 말고, 여행을 위하여 주머니나 두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는 말씀대로 제자들을 끌고 다니면서 이 집 저 집에서 걸식을 하면서 전도했습니다.
저는 프란시스 같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삶을 닮으려고 했던 열정은 참 좋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방법에 있어서는 바람직한 방법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가정도 직장도 재산도 버리고 걸식하며 산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리 주님은 우리가 세상을 떠나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을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 속에서 신앙을 지키며 믿음으로 세상을 변화시키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해마다 예루살렘에서는 골고다 언덕으로 가는 ‘비아 돌로로사(Via Dolorosa)’라는 길에서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가장행렬을 합니다. 저는 가장행렬 정도는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필리핀에서는 실제로 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는 십자가 처형을 재현합니다. 이런 것은 문제라고 봅니다. 필리핀에서는 고난당할 사람을 선택해서 십자가에 실제로 못을 박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는 사람은 흠이 없는 청년으로 몸에 상처도 없어야 하고, 빚진 것도 없어야 합니다. 필리핀 천주교회는 십자가에 달린 그 청년의 생활을 평생 다 책임져줍니다. 이건 아닙니다. 주님을 본받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21절에 자취라는 말이 나오는데 두 가지 뜻이 있습니다. 하나는 어린이들이 글씨를 배울 때 점선으로 된 글씨본을 따라서 그대로 글씨의 모양을 만드는 것을 말합니다. 또 하나는 본받아야 할 좋은 글씨체라는 뜻이 있습니다. 훌륭한 스승의 글씨체를 보고 영향을 받아서 열심히 노력하여 자기 것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스승의 가르침을 새롭게 해석해서 자기체를 만들어냅니다. 여기서 자취를 따라 간다는 말은 전자가 아닌 후자 즉 스승의 글씨체를 보고 영향을 받아서 자기 것을 만들어내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 16:24에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자는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야 합니다.
그렇다면 오늘 날 예수 그리스도의 본을 따라 고난의 길을 간다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주님처럼 나무 십자가를 진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십자가의 정신으로 사는 것입니다. 저는 십자가 정신을 두 가지로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1.십자가 정신이란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내 뜻을 내려놓는 정신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전날 밤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셨습니다. 그 때 이런 기도를 하셨습니다.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주님 자신은 십자가를 원하지 않으셨으나 아버지의 뜻이 십자가를 지는 것이었기 때문에 자신의 뜻을 내려놓고 아버지의 뜻대로 십자가를 지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정신입니다.
코뚜레를 한 소는 자기가 가고 싶은 곳이 있어도 주인이 끄는 대로 끌려갑니다. 코가 아프기 때문에 어쩔 수 없습니다. 십자가를 본받는 생활이 그런 것입니다. 우리도 내가 하고 싶은 일, 내가 가고 싶은 곳이 있어도 내 뜻을 내려놓고 주님이 원하시는 일, 주님이 원하시는 곳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소하고 다른 점은 소는 코뚜레 때문에 억지로 주인이 끄는 대로 끌려갑니다. 소에게는 선택할 수 있는 의지가 없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의 뜻이 알아지면 예수님처럼 스스로 자신의 뜻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뜻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100세에 얻은 아들을 모리아산에서 제물로 드릴 때 어땠겠습니까? 아브라함의 마음이 그것을 원했을까요?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아브라함도 아들을 죽여 제물로 드리는 것을 원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원하셨기 때문에 자기 뜻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그의 순종을 보시고 이삭을 죽이지 못하게 하신 것만 아니라 아브라함의 자손이 하늘의 별처럼 많아지게 하셨습니다. 그 때 아브라함이 바로 십자가의 정신을 실천한 것입니다.
우리는 생활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분명히 드러났지만 나 자신이 원하는 것과 다르기 때문에 갈등할 때가 있습니다. 또 성령께서 감동을 주신 일과 나 자신이 원하는 것이 다를 때가 있습니다. 이럴 때 내가 원하는 것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감동을 따라는 것이 십자가 정신으로 사는 것입니다.
2.십자가 정신이란 타인을 위하여 나를 희생하는 정신입니다.
주님은 누구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까? 첫째는 아버지를 위해서입니다. 그것이 아버지의 뜻이었기에 십자가를 받아드리셨던 것입니다. 둘째는 아버지가 택하신 사람들을 위해서입니다. 사람들이 범죄 해서 저주 가운데 빠졌는데 그 저주에서 해방시켜 주시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주님은 자기 자신을 위하여 십자가를 지신 것이 아닙니다. 타인을 위하여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주님이 타인을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는지 본문에서는 세 가지를 말씀합니다.
첫째, 주님은 믿는 자들의 죄를 사하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24절).
24절에 보면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가지고 계시는 변함없는 원칙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사랑의 원칙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자연계와 만물을 사랑하십니다. 그 중에서도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창조된 사람을 특히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부족하고 연약한 저와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교회를 사랑하십니다. 여러분이 가진 것이 없고 이룬 것이 빈약하고 내 놓을 것이 없어도 하나님은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말로만 하는 사랑이 아니라 몸과 마음과 행동으로 나타내는 직접적인 사랑을 갖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요한 3:16)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요일 4:16)
예수님은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생들을 미워하시지 않고 미워하실 수 없다. 이것이 사랑의 원칙입니다.
하나님에게 또 하나의 원칙이 있습니다. 그것은 공의의 원칙입니다. 공의의 하나님은 죄를 가장 싫어하시고 미워하십니다. 하나님은 죄와 함께 하실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죄를 용서받기 위해서는 죄 값은 반드시 치러야 합니다. 하나님은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죄 용서 받는 유일한 하나님의 방법을 계시하셨습니다. 그것은 흠이 없이 깨끗하고 정결한 양을 죽여 피를 뿌림으로 용서받는 것입니다. 성경은 “피 흘림이 없이는 죄 사함이 없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왜 꼭 그렇게 해야 합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사람이 지은 죄로 사람이 죽어야 하는데 대신 양이 피를 흘리고 죽는 것입니다. 양의 생명을 바쳐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은 개인적으로 국가적으로 때가 되고 절기만 되면 양을 잡았습니다. 한 마리 깨끗한 양에게 지금까지 저지른 내 모든 죄를 뒤집어씌우고 잡아 피 흘리게 하는 것입니다. 매번 매년 이 일은 제사장에 의해서 반복되고 또 반복되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이 양보다도 비교할 수 없는 놀라운 양 한 마리를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세례요한이 외쳤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바로 그분입니다. 이 어린양의 죽음으로 저와 여러분의 죄와 저주가 벗겨졌고 자유 함과 평화를 얻었습니다. 하나님은 신약시대를 사는 우리들의 완전하고 영원한 구원을 위하여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셨습니다. 어린 양으로 오신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피 흘려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를 용서하셨습니다.
십자가는 죄인의 죄를 용서해 주시는 하나님의 방법이고 능력입니다. 하나님은 오직 이 방법만을 고집하십니다. 왜냐하면 다른 방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달리신 갈보리의 십자가는 나의 죄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십자가로 용서받지 못할 죄가 없습니다. 좋으신 하나님은 십자가 밑에서 고백되어 지는 모든 죄를 깨끗하게 용서해 주십니다.
사실 죄 문제가 해결된다는 것은 모든 문제가 해결 되었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문제가 죄로 인하여 시작되었습니다. 이제는 모든 문제가 십자가로 해결된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를 보면 모든 문제가 죄로 인하여 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 먹은 후에 어떤 문제가 발생했습니까? 영적인 문제, 가정의 문제, 대인관계의 문제, 환경의 문제, 건강의 문제, 죽음의 문제 등등 이런 모든 문제가 죄로 인하여 발생한 것이다. 주님은 우리의 모든 문제를 십자가에서 해결하신 것입니다.
노르웨이의 어느 도시 '양의 교회'라는 크고 유명한 교회가 있는데, 이 교회의 종탑 밑에는 한 마리의 양이 새겨져 있다고 합니다. 이 교회의 이름과 종탑 밑에 어린양을 쌔긴 데에는 아름다운 이야기가 있다고 합니다. 그것은 이 교회를 처음 세울 때 있었던 일인데, 교회 종탑을 만들게 위해 꽤 높은 곳에서 일을 하던 한 인부가 그만 실수로 발을 잘 못 디디는 바람에 미끄러져 떨어지고 말았답니다. 종탑 아래에는 단단한 아스팔트였기 때문에 떨어지기만 하면 그 자리에서 죽을 것은 뻔한 일이었습니다. 바로 그 때 그 밑을 양치기와 그가 이끄는 한 무리의 양떼들이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모여선 사람들이 '저런! 저런!' 하고 있는 동안 그 사람은 지나가든 양떼 위에 '퍽!' 하고 떨어졌습니다. 사람들이 우르르 모여들었습니다. 모두들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수군거리고 있는데 놀랍게도 인부가 아무 대도 다친 곳이 없이 그 자리에서 서서히 일어서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인부가 일어난 자리 밑에는 불상 하게도 한 마리의 어린양이 죽어 있었습니다. 이에 그 교회의 교인들은 사람의 목숨을 대신하여 죽은 그 어린양을 기념하기 위하여 짓고 있던 교회 이름 '양의 교회'라 하고 종탑 밑에 양을 새겨 넣었다고 합니다.
교회는 양의 교회입니다. 어린 양되시는 주님이 죽으심으로 교회에 들어오는 모든 사람이 구원을 얻은 것입니다.
둘째, 주님은 믿는 자들의 병을 치료하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24절).
주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채찍에 맞으셨는데 채찍에 맞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24절에 분명히 말하고 있다. “저가 채찍에 맞으므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시 103:3에 보면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주신 대표적인 2가지 은택이 나옵니다. 첫째가 죄 사함의 은택이며, 둘째가 병 고침의 은택이다. “그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모든 병을 고치시며”
병 고침은 하나님의 구속사업의 계획안에 들어 있습니다. 마 8:16,17절에 “저물매 사람들이 귀신 들린 자를 많이 데리고 예수께 오거늘 예수께서 말씀으로 귀신들을 쫓아내시고 병든 자를 다 고치시니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에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건강에 대한 믿음과 신유의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주님이 채찍에 맞으신 이유가 우리의 나음을 위해서라고 하는데 우리가 병약한 자아상을 가지고 살아가면 안 됩니다.
나를 대신해서 채찍에 맞으신 주님의 고난의 능력을 믿는다면 우리는 병들지 않고 건강하게 살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믿음대로 역사해주실 것입니다. 94세에 돌아가신 할머니의 간증입니다. 그분은 50살 때 예수님을 영접했는데 예수님을 영혼 구원의 구세주로만 믿지 않고 병을 치료하시는 주님을 영접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믿음대로 무병장수 하다가 94세에 세상을 떠나게 하셨습니다. 이분은 자녀들을 모아놓고 “너희들 지난 40년 동안 내가 아픈 것 보았느냐”, “나는 병 없이 본향에 가련다.” 하시더니 94세에 소천하셨습니다. 그런데 죽던 날 시계를 보시더니 “나는 오늘 10시에 집으로 간다.” 하시더니 9시에 성경 요한계시록 20장, 21장을 읽다가 10시가 되자 “예수님이 계신다. 나는 가야한다. Goodbye!” 하고 손을 흔들더니 의자에 앉은 채로 본향집으로 가셨습니다. 막 11:23절에 보면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또 우리가 믿음을 가지고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병을 고쳐주실 것도 믿어야 합니다. 우리가 믿고 기도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손길을 통해서 병든 자들을 일으키실 것입니다. 2007년 1월 이스라엘 선교 갔을 때 일이 생각납니다. 우리 일행은 나사렛 교회에 가서 기도사역을 하고 돌아왔습니다. 우리가 한국에 돌아온 후에 나사렛 교회 목사님께서 우리의 기도사역을 통해서 C형 간염환자가 고쳐졌다는 이메일을 보내왔습니다.
셋째,주님은 믿는 자들을 더 이상 방황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25절에 보면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십자가를 알기 전에는 길 잃은 가엾은 양과 같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십자가로 말미암아 이제는 영혼의 목자 되신 주님 앞으로 돌아왔습니다. 주님의 십자가는 그것을 쳐다보는 사람에게 큰 위로와 평안과 희망을 주십니다.
계22:16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광명한 새벽별이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주님은 우리의 인생의 나침반이라는 뜻입니다. 나침반이 발명되기 전에 뱃사람들은 별을 보고 길을 찾았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인생의 광명한 새벽별이 되셔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주님은 그 일을 위하여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시 23:1 에 보면 여호와는 양을 인도하는 목자입니다. 목자이신 주님을 따라가면 방황하지 않습니다. 양은 목자를 따르는 것이 가장 좋은 길을 가는 것입니다. 주님은 길 잃은 양과 같은 우리가 방황하지 않게 하시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주님을 만나면 인생의 방황이 끝납니다. 주님을 어설프게 만나면 믿는 것 같은데도 인생의 방황이 계속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주님을 만났습니까? 인생의 방황이 끝났습니까? 주님은 우리의 인생에 방황을 끝내주시기 위하여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희생당하신 것입니다.
십자가의 정신은 주님이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하시고, 질병의 문제를 해결하시고, 인생의 방황의 문제를 해결해주시기 위하여 십자가를 짊어지신 것처럼 우리도 타인을 위하여 희생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는 것은 희생을 의미하는 것만은 아닙니다. 희생을 초월하는 하나님의 높이심이 숨어있습니다. 빌 2:5-11을 보면 십자가 희생 뒤에 숨어 있는 하나님이 주시는 영광을 볼 수 있습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주님은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지만 하나님은 주님을 부활시키시고 모든 자들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고 모든 자들로 그분 앞에 무릎을 꿇게 하셨습니다.
백화점 왕으로 유명한 워너메이커는 자기가 가진 것으로 평생 타인을 섬기는 삶을 살았습니다. 이분이 종로 2가에 있는 YMCA 건물을 지어준 분입니다. 그가 남을 위한 희생을 희생으로 여기지 않고 살게 된 계기가 있습니다. 젊을 때 하루는 장미화원을 잘 가꾼 한 가정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이 집의 주인은 그를 자신의 정원으로 데리고 가서 백장미와 흑장미 등 온갖 장미들을 구경시켜 주었습니다. 그런 다음 장미꽃들을 꺾어버리기 시작했습니다. 몇 개의 덩굴은 꽃 한 송이만을 남겨두고 모두 가지를 쳐버리기도 하였습니다. 워너 메이커는 “아니, 왜 가지를 모조리 칩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주인은 웃으면서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좋은 장미 덩굴을 만들려면 가지를 쳐내야 합니다. 내가 가지를 쳐서 잃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가지를 잘라내 잃는 것이 없다’는 말에 충격을 받은 워너 메이커는 그날부터 나누어주는 사업을 시작했고 결국 점점 더 큰 사업체를 갖게 돼 나중에는 미국의 대재벌이 되었습니다.
남을 위하여 나를 포기하고 희생하는 것은 결코 나를 망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나 자신을 복된 존재로 만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위하여 십자가를 지신 것이 아니라 남을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우리도 십자가 정신으로 타인을 위하여 고난을 당하는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삶을 살아야 겠습니다.
오늘은 십자가 정신에 대해서 함께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십자가 정신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내 뜻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뜻을 선택하는 것이 십자가 정신입니다. 둘째는 남을 위하여 나를 희생하는 정신이 십자가 정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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